우리나라 여성의 상당수는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갖지 못하고 있다. 낙태율이 높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여성단체 관계자의 말을 듣곤 설마 했다. 그런데 사실이었다. 몇 차례 산부인과에 전화해봤지만 낙태시술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병원은 한 곳도 없었다. 물론 “진료부터 받아보고 나서 상담해보자”는 병원은 여럿 있었다. 2009년 12월 대다수 병원이 가격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낙태시술을 많이 하는 것으로 유명한 병원들은 특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성적 자기 결정권 갖지 못한 여성들
2010년 3월1일 보건복지가족부(이하 복지부)가 ‘불법 인공임신중절 예방 종합계획’을 통해 불법 낙태 단속 방침을 밝힌 후 달라진 모습이다. 하지만 낙태시술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보긴 힘들다. 낙태 반대운동을 펼치는 산부인과 의사 모임인 ‘프로라이프의사회’ 최안나 대변인은 “예전엔 전화만 돌리면 수술 여부를 알 수 있었지만 지금은 수소문해야 간신히 알아낼 수 있다. 번거롭기는 하지만 여전히 낙태는 자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역설적으로 ‘낙태 특수’를 노리는 병원도 속속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프로라이프의사회 게시판에는 과다한 낙태시술로 과로를 호소하는 병원 직원들의 호소가 끊이질 않는다.
프로라이프의사회의 성명서에서 촉발된 낙태 반대운동은 지난 11월16일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가 저출산 대책의 하나로 불법 낙태시술 단속을 포함할 예정이라고 발표하면서 더욱 확산됐다. 급기야 프로라이프의사회가 낙태시술 병원을 고발하자 산부인과들은 표면적으로 낙태시술을 중단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발과 우려도 만만치 않다. “낙태할 수밖에 없는 사회 제반환경은 개선하지 않은 채 국가가 나서서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 여성계는 “낙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여성의 상황이 무엇인지부터 파고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늘도 낙태할 만한 병원을 찾지 못했어요. 이미 두 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맞벌이라 셋째는 엄두도 못 내죠. 아파트 대출금을 갚아야 해서 회사를 그만둘 수도 없고요. 급한 마음에 여성단체에 연락해 병원을 수소문해봤지만 감감무소식이라 속이 타들어가요.”(기혼여성 L씨, 35세)
복지부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간한 ‘2009년 전국 결혼 및 출산 동향조사’에 따르면, 인공임신중절의 이유는 ‘추가 자녀를 원치 않는다’가 32.4%로 가장 높았고 출산 연기(14.5%), 혼전임신(13.8%), 터울조절(10.7%), 산모건강(10.4%) 순으로 나타났다. 경제적 어려움 또한 주요 원인이다. 고용환경이 불안정할수록 낙태율이 높은 것에서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낙태 회수를 보면 임시·일용직 근로자가 0.29회로 가장 높았고, 무급가족종사자(0.27회), 고용주·자영업자(0.20회), 상용근로자(0.16회) 순이었다.
물론 성폭행에 의한 임신으로 낙태를 결심한 사례도 적잖다. 통계상 성폭행 때문에 낙태하는 비율은 낮지만, 성폭행 신고율 자체가 7%에 못 미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또한 적다고 보기 힘들다.
이런 표면적 이유 속에는 여성이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갖지 못한다는 한국적 현실이 숨어 있다. 자신의 성적 의사를 명확히 밝히거나 상대 남성에게 콘돔을 반드시 착용하게 하는 등의 방법으로 성관계를 주도한다면, 원치 않은 임신을 막을 수 있다.
“우리나라 여성의 상당수는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섹스)하고 싶을 때 하자는 말을 하거나 하기 싫을 때 싫다고 말하는 여성이 얼마나 될까요. 데이트 강간, 부부 강간을 당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실제로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 대부분이 부부 강간을 털어놓곤 합니다.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여성일수록 성적 자기 결정권이 떨어집니다. 물론 데이트 비용을 남자친구에게 의존하는 여성도 그럴 수 있죠.”(여성의전화 활동가 송란희 씨)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첫 경험을 어떻게 하게 됐느냐’는 질문에 22%가 ‘남성의 설득과 요구’, 10%가 ‘남성의 강요’라고 대답했어요. 즉, 성관계가 남성의 리드에 따라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는 거죠. 이는 남성들이 포르노를 통해 성교육을 받은 결과예요. 포르노에서는 남성이 성관계를 주도하고, 여성은 싫은 내색을 보이다가도 결과적으로 즐기는 것으로 나오죠. 남성들이 강압적인 관계에 대해 죄책감을 갖지 않는 것은 물론, 여성들도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상황에서 남성이 자발적으로 콘돔을 끼는 일은 거의 없어요.”(푸른아우성 구성애 대표)
피임에 대한 여성의 무지 및 수동적 태도 또한 ‘낙태의 덫’에 걸리는 하나의 요인이다. 피임연구회 이임순 회장(순천향대 의과대 산부인과 교수)은 “누가 피임의 주체가 돼야 하는지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는데, ‘남성이 해야 옳다’고 대답한 비율이 44.5%나 됐다. 이는 ‘여성이 해야 한다’(4.8%)는 물론, ‘남녀 모두 해야 한다’(37.1%)는 답변보다 훨씬 높았다”고 말했다. 콘돔 효과를 과신하는 여성도 적지 않다.
“어떤 부작용이라도 낙태보다 낫다”
“제 주변엔 ‘구멍 난’ 콘돔 사례가 많아요. 콘돔을 꼈으니 피임약이나 응급피임약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콘돔에 문제가 생겨 임신이 된 겁니다. 저도 그렇게 아이를 가졌고요.”(여성단체 활동가 A씨 )
성관계 후 72시간 이내에 복용하면 배란을 방해하거나 수정란의 착상을 차단해주는 응급피임약도 있지만, 약의 존재 자체를 모르거나 알더라도 부작용에 대한 걱정 등으로 복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산부인과 전문의들은 “어떤 부작용이라도 낙태보다 낫다”고 말한다.
‘2009년 전국 결혼 및 출산 동향조사’에 따르면, 기혼여성의 인공임신중절 경험률은 13.2%에 달한다. 기혼여성 10명 중 1명이 낙태시술을 받은 셈. 푸른아우성 구성애 대표는 “낙태 찬반 여부를 떠나, 이에 대한 여성의 건강권을 중심에 놓고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도 무조건 낙태를 반대했어요. 임신 5개월째인 여고생이 낙태하려고 하는 것을 말려서 낳게 한 적도 있고요. 그런데 자기가 낳은 아기를 입양 보내놓고 10년째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는 아기 엄마를 보면서 ‘생명만이 중요하다’는 말은 더 이상 못하겠더라고요. 이런 일들을 통해 무엇보다 여성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권을 먼저 생각하게 됐어요. 낙태 여부는 누군가 강압적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산모인 여성이 판단할 문제라고 생각해요. 물론 책임 있는 성관계를 해야 한다는 전제에는 변함이 없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