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데뷔 4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열창하는 가수 조용필과 열광하는 팬들.
공연이 어떻습니까.
“한마디로 즐거웠습니다. 잘 놀았습니다.”
‘잘 놀았다’는 느낌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예~, 과거에 파바로티나 도밍고의 공연을 봤을 땐 ‘아 참 노래를 잘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조용필의 공연은 ‘나도 함께 노래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느낌의 차이가 성악과 대중음악이라는 장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서양음악과 한국음악의 차이에서 온 것일까. 왜 우리는 술 한잔 하고 거나해지면 ‘말아’(폭탄주), ‘원샷’을 외치는 것일까. 자연스레 이어지는 노래방에서는 누구의 신청곡인지와 상관없이 합창한다. 여기서 우리의 정서를 훑어보고 한민족은 예부터 음악을 어떻게 이해해왔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홀로 즐기기보다 모두 함께 즐기기
한민족은 오랫동안 공맹(孔孟)을 받들어왔다. 시대가 변해 서양문화와 생활양식이 급속히 고유의 삶의 방식을 대체하고 있지만, 정서 자체는 거의 바뀌지 않았거나 아주 느린 속도로 바뀐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공맹과 유학은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유학의 음악 교과서 격인 ‘예기(禮記)’의 ‘악기(樂記)’편을 보자. ‘악기’는 “음악이란 기본적으로 즐기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음악의 악(樂)과 즐거움의 락(樂)은 글자가 같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노래방에서, 콘서트 현장에서 무엇을 즐기는 것일까. ‘곡이 좋구나’ ‘가사가 아름답구나’ ‘노래를 완벽하게 부르는구나’…. 본질적으로 이런 것을 즐기는 것일까. 그렇다면 ‘가창력’은 모자라도 인기가수가 되고 그 노래를 흥겹게 따라 부르며 함께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좋은 음악을 듣고 “사흘간 고기 맛을 잊었다”고 할 정도로 음악에 빠졌던 공자의 말씀과 ‘예기’의 구절을 새겨보자.
“음악이다, 음악이다 하는 말이 무슨 종이나 북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아느냐.”(‘논어’)
“음악의 최고 목적은 음의 극치를 아는 것이 아니다.”(‘악기’)
음악의 최고 경지가 음의 극치를 아는 게 아니고, 악기를 잘 다루어 기술적으로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면? 즉 기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에 뜻을 두고, 덕을 굳게 지키고, 인에 의지해, 예술에서 노닐었다.”(공자)
공자는 예술(음악)에서 노닐면서 즐겼으니 그것을 최고의 경지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를 통해 학문과 예술이 별개가 아니라 학문의 정점에 예술이 있다고 생각했음이 드러난다. 유학에서 학문이란 ‘사람이 되는 공부’를 의미한다. 이것이 대학(大學)이다. 위의 말을 살펴보면 학문, 즉 수양을 통해 자연히 이르는 경지가 다름 아닌 ‘노니는’ 예술의 경지인 것이다.
맹자는 음악의 실질은 인의(仁義)를 즐기는 것이라고 했다. 맹자는 “즐기면 인의가 생겨난다. 즐거움이 생기면 어찌 그치겠느냐. 그런 상태가 되면 자신도 모르게 발로 뛰고 손으로 춤을 추게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이 무용이다. 맹자는 수양은 ‘갓난아이 같은 마음’을 지니는 것이라고 했으므로 갓난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즐기는 것이 음악이고 예술인 것이다.
공맹은 음악 또는 예술이 현실을 ‘초월해서’ 현실 너머에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에서 읊으면 그것이 음악이고, 욕심을 줄여 불만이 없는 상태에서 신이 나서 저절로 손발이 움직이면 무용이라고 본 것이다. 별도로 ‘실현’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이 점에서 서양의 ‘근대예술’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노래방 동호회 ‘놀방파’ 회원들이 서울 홍대앞 한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
맹자“홀로 음악을 즐기는 것과 남과 함께 즐기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즐겁겠습니까?”
왕“함께 하는 것이 더 즐겁습니다.”
맹자“몇몇 사람과 음악을 즐기는 것과 여럿이 함께 즐기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즐겁습니까?”
왕“많은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낫습니다.”
홀로 즐기는 것은 고립된 개체로서 즐기는 것이다. 둘이 함께 즐길 때 더 즐거워지는 이유는 적어도 두 마음의 공통적 요소가 있어 둘이 한마음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 즉 대중과 함께 즐길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한마음으로 통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우리 정서의 핵심이다.
이러한 모습은 음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확인된 한마음 상태다. ‘너와 나는 같아야 한다’는 정서의 밑바탕인 ‘만물일체(萬物一體)’의 본래 모습이며 욕심과 이해타산이 작용하지 않는 모습이다. 정치적 행사에 마지못해 ‘동원’된 군중도 과연 한마음으로 즐거울까.
맹자는 ‘함께 즐기기’를 통해 정치철학인 ‘왕도(王道)’를 역설한다. 왕이 음악을 즐기는데 백성이 고통스럽게 느끼는 것은 ‘왕이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하지 않기 때문’이고 반대로 왕의 연주를 들은 백성들이 왕의 건강을 확인하면서 함께 좋아하는 것은 ‘왕이 백성과 함께 즐기기’(與民同樂)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군인 세종이 음악을 만들어 ‘여민락(與民樂)’이라고 한 데서도 왕도의 꿈은 명확히 드러난다.
이러한 정서를 지닌 우리는 현실이 고달프더라도 늘 ‘한마음’(仁)의 여민동락을 꿈꾼다. 이것이 살아나는 마당이 바로 우리의 콘서트 현장이고 노래방이라고 할 수 있다. 왕도의 현장인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통하는 곳에서는 계층이 달라도 한마음으로 합창하는 것이다.
‘하나’였으므로 ‘분단’, 그래서 마음 아파
조용필은 2005년 8월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북한주민을 상대로 콘서트를 열었다. 조용필은 당초 주최 측이 옛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으나 거절하고 1980년대 이후 ‘신곡’을 불렀다. 당시 북한 사람들은 잘 모르는 노래였다. 그런데 처음에는 굳어 있던 관객들이 ‘꿈’을 부르자 표정이 풀어지고 따라 부르는 등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조용필은 공연 뒤 “언제부터 관객과 통한다고 생각했느냐”는 질문에 “처음부터 통한다고 생각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북한에서 내 노래가 히트하지 못한 점이 약점이라 하더라도, 말이 통하는 북한에서 내 음악이 통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느냐”고 덧붙였다.
남북한은 체제로 보면 판이하다. 양극단이라고 할 수 있다. 양극단은 태극(太極)이다. 그런데 유학에서는 ‘극이 없으면서 극단’이라고 한다. 주돈이가 말한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다. 우리는 ‘하나’였으므로 ‘분단’된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아픈’ 것이다. 당초 둘이었다면 ‘분단’은 성립하지 않는다. 무극은 한마음 상태이며 음악의 ‘무(無)장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조용필과 북한주민은 ‘처음부터 통한 것’이다. 한마음 상태에서는 이질적인 체제를 넘어 함께 즐길 수 있다. 음악은 ‘덕의 아름다운 발현’이고 ‘교양이나 배경이 다른 사람도 함께 사랑하게 하는 것’이며 ‘천지간의 화합’(이상 ‘악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