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서삼경 완역’한 이기동 교수 지상 특강
유학은 공자(孔子)가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완성한 바람직한 삶의 길잡이다. 이를 배우는 쪽에서는 유학(儒學), 가르치는 쪽에서는 유교(儒敎), 실천하는 쪽에서는 유도(儒道)라고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흔히 ‘유학은 종교인가’라는 질문을 많이 하지만 유학을 종교의 영역으로 분류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유학이 종교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종교, 철학, 정치학, 교육학 등으로 영역을 나누는 것은 서구 근세에 생긴 분류법이다. 유학은 이런 분류법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한의학을 내과, 외과 등으로 분류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유학은 종교이기도 하고 철학이기도 하며, 윤리학이기도 하고 정치학이기도 하며, 교육학이기도 하고 경영학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유학은 어디서 시작됐을까. 공자일까, 맹자일까. 유학의 원형은 4300여 년 전 지금의 중국 중원을 다스리던 요(堯)라는 임금이 만든 중용(中庸)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는 중국이란 나라도, 한국이라는 나라도 없었다. 다만 중원의 동부지방에 살던 동이족(東夷族)과 서부지방에 살던 서부족이 수많은 부족국가의 형태로 각각 다른 문화를 가지고 살고 있었다.
종교·철학·정치학·교육학 요소 두루 포함
동이족은 종교성이 강하고 몸보다 마음을 중시하며 검은색 도기를 만들어 사용했고, 서부족은 물질적인 요소를 강조하고 마음보다 몸을 중시하며 채색 도기를 사용했다. 이렇듯 다른 두 문화를 요임금은 중용이라는 사상으로 조화시켰다. 요임금의 중용사상은 동이족의 마음을 핵심으로 삼고, 모든 것을 잘 분별하는 서부족의 삶의 방식을 테두리로 삼았다. 중용사상을 이루는 핵심은 동이족의 사상이고, 동이족의 후예 중 대표는 한국인이므로 요임금의 중용사상의 핵심은 한국인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요임금의 중용사상을 동이족인 순(舜)이 계승했고, 다시 서부족인 우(禹)가 계승하며 동이족과 서부족이 번갈아 이어갔다. 우의 후계자는 동이족이 아니라 우의 아들로 이어졌는데, 그것이 서부족의 하(夏)나라다. 하(夏)는 동이족인 탕(湯)이 세운 상(商)나라에 멸망했다. 상은 다시 탕의 아들로 이어오다 서부족이 세운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패망했다. 주나라는 무왕의 아버지인 문왕(文王) 때 크게 부흥했고, 무왕의 동생인 주공(周公)에 의해 제도가 완비됐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문왕과 무왕, 주공을 동시에 존숭했다. 그러다 주나라가 혼란해지기 시작한 춘추시대에 공자가 등장했다. 공자는 요에서 시작해 순, 우, 탕, 문왕, 무왕, 주공으로 이어지는 사상의 흐름을 집대성해 거대한 체계를 세웠다. 그것이 유학이다.
공자가 집대성한 사상체계는 오경(五經)으로 정리된다. 오경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춘추(春秋)’ ‘예기(禮記)’를 일컫는다. 후대인 송(宋)나라 때 주자가 공자 이후에 완성된 ‘논어’ ‘맹자’, 그리고 ‘예기’ 속에 있는 ‘대학’ ‘중용’을 독립시켜 사서(四書)로 정리함으로써, 오늘날 사서오경(四書五經)이 유학의 중심 경전이 됐다. 공자의 유학은 100여 년 뒤 등장한 맹자(孟子)에 의해 선양됐는데, 맹자는 공자의 중용사상 중에서 핵심이 되는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맹자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연결된 한마음임을 증명하고, 모든 사람은 그 한마음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서로 사랑하게 돼 있다는 뜻에서 사람은 본성적으로 착하다는 성선설을 주창했다.
한편 맹자의 뒤를 이어 등장한 순자(荀子)는 한마음을 부정하고, 개체성을 강조해 모든 사람은 독립된 개체로서 본질적으로 서로 다투게 돼 있다고 보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악하다는 성악설을 주창했다.
순자가 주창한 성악설이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을 설명하는 데 효과적이어서 사람들은 순자의 학설을 추종했고, 진(秦)나라와 한(漢)나라는 순자의 학설을 바탕으로 한 정치철학으로 다스려졌다. 한나라 말기에 이르러 순자 철학이 한계를 보이자 중국은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를 수용했고, 수(隋)나라와 당(唐)나라는 불교를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다. 그러다 당나라 말기에 불교의 폐단이 드러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한 유학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유학부흥운동은 맹자의 사상과 순자의 사상을 동시에 부흥시키는 방식이었는데, 이 두 사상의 흐름이 송나라 주자에 의해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유학으로 통합됐다.
한국 유학교육 시초는 고구려 태학
성리학은 성(性)과 이(理)를 중심 개념으로 한다는 뜻에서 불린 명칭인데, 이 밖에도 주자가 완성했다는 뜻에서 주자학, 정이(程)와 주자가 중심 인물이라는 뜻에서 정주학, 송나라 때 완성됐다는 뜻에서 송학, 이(理)가 중심 개념이라는 뜻에서 이학, 새로운 유학이라는 뜻에서 신유학 등으로 불린다.
송나라의 뒤를 이은 원나라와 명나라는 성리학의 흐름을 이어받았다. 특히 명나라 때는 다시 인간의 마음을 중시하는 맹자의 요소를 강조한 왕수인이 나타나 양명학을 성립시켰다. 뒤이은 청나라 때 다시 물질적인 요소를 강조하고 인간의 개별성을 중시하는 순자의 사상이 등장했는데, 이것은 청학 또는 실학으로 불렸다. 청학은 청나라 때의 학문이란 뜻이고, 실학은 실질적인 것을 중시한다는 뜻이다. 실학의 선구자는 황종희, 고염무, 대진 등이었다.
유학의 핵심은 고대 동이족의 한마음 사상이었으므로, 중국에서 수입된 유학은 한국인의 사상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가 그곳에서 정리된 뒤 역수입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에 공자의 유학이 수입돼 교육된 것은 기록상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의 태학 설립에서 기원을 잡을 수 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때 수입한 유학은 중국 한나라와 당나라 때의 유학이었으므로 순자의 유학이었다. 마음을 중시하는 한마음을 강조하는 한국인으로서는 당시의 유학에 만족할 수 없었겠지만, 한국인의 철학적·종교적 갈증은 불교를 통해 해소됐으므로 유학에 큰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이 시기 유학은 주로 국가의 통치수단으로 받아들여지는 데 그쳤다.
고려시대 말기에 이르러 불교의 폐단이 극에 달하자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중국의 성리학이 수입됐다. 원나라로부터 처음 성리학을 수입한 이가 안향이다. 고려의 성리학은 목은 이색 선생에 의해 완전히 한국 땅에 정착했다.
목은 선생의 사상은 하늘과 사람이 원래 하나라는 천인무간(天人無間)이 바탕이 됐고, 그의 성리학은 조선조에 이르러 세 흐름으로 전개됐다. 하나는 철저한 수양을 통해 사람의 본래 모습을 되찾음으로써 하늘과 하나 되고자 하는 수양철학의 흐름이다. 이는 양촌 권근, 회재 이언적을 거쳐 퇴계 이황에 이르러 완성됐다.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을 본래의 모습인 천국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정치적 실천철학의 흐름이다. 이는 정암 조광조를 거쳐 율곡 이이에 이르러 완성됐다. 나머지 한 흐름은 인간의 본래 모습인 하늘의 차원에서 세상에 초연하면서 모든 사상을 하나로 통합하는 초탈원융철학의 흐름이다. 이는 매월당 김시습, 화담 서경덕 등을 거쳐 남명 조식에 이르러 완성됐다.
그러나 한국의 성리학이 전성기를 거치면서 정치권력을 획득하자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양명학, 천주학, 실학, 동학 등이 저항세력으로 등장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임란 때 잡혀간 강항 선생으로 日 유학 부흥
일본이 유학을 받아들인 것은 백제의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데서 비롯됐다. 일본의 유학은 그다지 융성하지 못하다가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강항 선생에 의해 본격적으로 출범했다. 일본의 유학을 정착시킨 인물은 강항의 제자인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性窩)다. 후지와라의 유학은 그의 제자인 하야시 라잔(林羅山)에 의해 일본의 관학으로 정착했다. 하야시는 도쿠가와 막부의 선생이 돼 유학을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철학으로 삼았다.
일본에 정착한 유학은 주자학 중에서도 퇴계를 중심으로 하는 퇴계학이었다. 퇴계학은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에 의해 강화됐는데 안사이는 벽에 퇴계 선생의 초상을 걸어놓고 매일 경배를 드렸다고 한다. 안사이는 퇴계학과 일본 신도의 접목을 시도하는 한편, 퇴계의 경(敬)사상을 타인에 대한 공경심으로 변용해 일본의 풍토에 맞게 정착시켰다.
일본의 주자학은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오규 소라이(荻生徠) 등의 고학파(古學派)에 의해 부정되고 일본의 독자적인 유학으로 전개됐다. 고학파의 유학은 순자의 유학이었다. 일본의 유학은 개별성과 경험성을 강조하면서 본초학·천문학 등을 중심으로 하는 실학으로, 실학에서 국학으로 변모했다.
국학에 이어 일본의 지식인들은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의 학문을 받아들임으로써 난학(蘭學)을 성립시켰다. 난학은 화란(和蘭)에서 따온 말이다. 난학은 서양의 과학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을 줄였을 뿐 아니라, 한편으로 서양의 과학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가 됐다. 이후 일본은 급격히 서구문물을 받아들였고, 이에 힘입어 명치유신이라는 새 정치체제를 완비하고 오늘날의 형태로 만드는 기틀을 잡았다.
유학은 공자(孔子)가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완성한 바람직한 삶의 길잡이다. 이를 배우는 쪽에서는 유학(儒學), 가르치는 쪽에서는 유교(儒敎), 실천하는 쪽에서는 유도(儒道)라고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흔히 ‘유학은 종교인가’라는 질문을 많이 하지만 유학을 종교의 영역으로 분류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유학이 종교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종교, 철학, 정치학, 교육학 등으로 영역을 나누는 것은 서구 근세에 생긴 분류법이다. 유학은 이런 분류법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한의학을 내과, 외과 등으로 분류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유학은 종교이기도 하고 철학이기도 하며, 윤리학이기도 하고 정치학이기도 하며, 교육학이기도 하고 경영학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유학은 어디서 시작됐을까. 공자일까, 맹자일까. 유학의 원형은 4300여 년 전 지금의 중국 중원을 다스리던 요(堯)라는 임금이 만든 중용(中庸)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는 중국이란 나라도, 한국이라는 나라도 없었다. 다만 중원의 동부지방에 살던 동이족(東夷族)과 서부지방에 살던 서부족이 수많은 부족국가의 형태로 각각 다른 문화를 가지고 살고 있었다.
종교·철학·정치학·교육학 요소 두루 포함
동이족은 종교성이 강하고 몸보다 마음을 중시하며 검은색 도기를 만들어 사용했고, 서부족은 물질적인 요소를 강조하고 마음보다 몸을 중시하며 채색 도기를 사용했다. 이렇듯 다른 두 문화를 요임금은 중용이라는 사상으로 조화시켰다. 요임금의 중용사상은 동이족의 마음을 핵심으로 삼고, 모든 것을 잘 분별하는 서부족의 삶의 방식을 테두리로 삼았다. 중용사상을 이루는 핵심은 동이족의 사상이고, 동이족의 후예 중 대표는 한국인이므로 요임금의 중용사상의 핵심은 한국인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요임금의 중용사상을 동이족인 순(舜)이 계승했고, 다시 서부족인 우(禹)가 계승하며 동이족과 서부족이 번갈아 이어갔다. 우의 후계자는 동이족이 아니라 우의 아들로 이어졌는데, 그것이 서부족의 하(夏)나라다. 하(夏)는 동이족인 탕(湯)이 세운 상(商)나라에 멸망했다. 상은 다시 탕의 아들로 이어오다 서부족이 세운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패망했다. 주나라는 무왕의 아버지인 문왕(文王) 때 크게 부흥했고, 무왕의 동생인 주공(周公)에 의해 제도가 완비됐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문왕과 무왕, 주공을 동시에 존숭했다. 그러다 주나라가 혼란해지기 시작한 춘추시대에 공자가 등장했다. 공자는 요에서 시작해 순, 우, 탕, 문왕, 무왕, 주공으로 이어지는 사상의 흐름을 집대성해 거대한 체계를 세웠다. 그것이 유학이다.
공자, 이이, 이색(왼쪽부터).
한편 맹자의 뒤를 이어 등장한 순자(荀子)는 한마음을 부정하고, 개체성을 강조해 모든 사람은 독립된 개체로서 본질적으로 서로 다투게 돼 있다고 보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악하다는 성악설을 주창했다.
순자가 주창한 성악설이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을 설명하는 데 효과적이어서 사람들은 순자의 학설을 추종했고, 진(秦)나라와 한(漢)나라는 순자의 학설을 바탕으로 한 정치철학으로 다스려졌다. 한나라 말기에 이르러 순자 철학이 한계를 보이자 중국은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를 수용했고, 수(隋)나라와 당(唐)나라는 불교를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다. 그러다 당나라 말기에 불교의 폐단이 드러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한 유학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유학부흥운동은 맹자의 사상과 순자의 사상을 동시에 부흥시키는 방식이었는데, 이 두 사상의 흐름이 송나라 주자에 의해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유학으로 통합됐다.
한국 유학교육 시초는 고구려 태학
성리학은 성(性)과 이(理)를 중심 개념으로 한다는 뜻에서 불린 명칭인데, 이 밖에도 주자가 완성했다는 뜻에서 주자학, 정이(程)와 주자가 중심 인물이라는 뜻에서 정주학, 송나라 때 완성됐다는 뜻에서 송학, 이(理)가 중심 개념이라는 뜻에서 이학, 새로운 유학이라는 뜻에서 신유학 등으로 불린다.
송나라의 뒤를 이은 원나라와 명나라는 성리학의 흐름을 이어받았다. 특히 명나라 때는 다시 인간의 마음을 중시하는 맹자의 요소를 강조한 왕수인이 나타나 양명학을 성립시켰다. 뒤이은 청나라 때 다시 물질적인 요소를 강조하고 인간의 개별성을 중시하는 순자의 사상이 등장했는데, 이것은 청학 또는 실학으로 불렸다. 청학은 청나라 때의 학문이란 뜻이고, 실학은 실질적인 것을 중시한다는 뜻이다. 실학의 선구자는 황종희, 고염무, 대진 등이었다.
유학의 핵심은 고대 동이족의 한마음 사상이었으므로, 중국에서 수입된 유학은 한국인의 사상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가 그곳에서 정리된 뒤 역수입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에 공자의 유학이 수입돼 교육된 것은 기록상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의 태학 설립에서 기원을 잡을 수 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때 수입한 유학은 중국 한나라와 당나라 때의 유학이었으므로 순자의 유학이었다. 마음을 중시하는 한마음을 강조하는 한국인으로서는 당시의 유학에 만족할 수 없었겠지만, 한국인의 철학적·종교적 갈증은 불교를 통해 해소됐으므로 유학에 큰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이 시기 유학은 주로 국가의 통치수단으로 받아들여지는 데 그쳤다.
고려시대 말기에 이르러 불교의 폐단이 극에 달하자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중국의 성리학이 수입됐다. 원나라로부터 처음 성리학을 수입한 이가 안향이다. 고려의 성리학은 목은 이색 선생에 의해 완전히 한국 땅에 정착했다.
목은 선생의 사상은 하늘과 사람이 원래 하나라는 천인무간(天人無間)이 바탕이 됐고, 그의 성리학은 조선조에 이르러 세 흐름으로 전개됐다. 하나는 철저한 수양을 통해 사람의 본래 모습을 되찾음으로써 하늘과 하나 되고자 하는 수양철학의 흐름이다. 이는 양촌 권근, 회재 이언적을 거쳐 퇴계 이황에 이르러 완성됐다.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을 본래의 모습인 천국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정치적 실천철학의 흐름이다. 이는 정암 조광조를 거쳐 율곡 이이에 이르러 완성됐다. 나머지 한 흐름은 인간의 본래 모습인 하늘의 차원에서 세상에 초연하면서 모든 사상을 하나로 통합하는 초탈원융철학의 흐름이다. 이는 매월당 김시습, 화담 서경덕 등을 거쳐 남명 조식에 이르러 완성됐다.
그러나 한국의 성리학이 전성기를 거치면서 정치권력을 획득하자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양명학, 천주학, 실학, 동학 등이 저항세력으로 등장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임란 때 잡혀간 강항 선생으로 日 유학 부흥
일본이 유학을 받아들인 것은 백제의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데서 비롯됐다. 일본의 유학은 그다지 융성하지 못하다가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강항 선생에 의해 본격적으로 출범했다. 일본의 유학을 정착시킨 인물은 강항의 제자인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性窩)다. 후지와라의 유학은 그의 제자인 하야시 라잔(林羅山)에 의해 일본의 관학으로 정착했다. 하야시는 도쿠가와 막부의 선생이 돼 유학을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철학으로 삼았다.
일본에 정착한 유학은 주자학 중에서도 퇴계를 중심으로 하는 퇴계학이었다. 퇴계학은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에 의해 강화됐는데 안사이는 벽에 퇴계 선생의 초상을 걸어놓고 매일 경배를 드렸다고 한다. 안사이는 퇴계학과 일본 신도의 접목을 시도하는 한편, 퇴계의 경(敬)사상을 타인에 대한 공경심으로 변용해 일본의 풍토에 맞게 정착시켰다.
일본의 주자학은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오규 소라이(荻生徠) 등의 고학파(古學派)에 의해 부정되고 일본의 독자적인 유학으로 전개됐다. 고학파의 유학은 순자의 유학이었다. 일본의 유학은 개별성과 경험성을 강조하면서 본초학·천문학 등을 중심으로 하는 실학으로, 실학에서 국학으로 변모했다.
국학에 이어 일본의 지식인들은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의 학문을 받아들임으로써 난학(蘭學)을 성립시켰다. 난학은 화란(和蘭)에서 따온 말이다. 난학은 서양의 과학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을 줄였을 뿐 아니라, 한편으로 서양의 과학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가 됐다. 이후 일본은 급격히 서구문물을 받아들였고, 이에 힘입어 명치유신이라는 새 정치체제를 완비하고 오늘날의 형태로 만드는 기틀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