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철의 매력은 눈과 추위다. 추워서 겨울철이 싫다는 사람도 있지만, 날씨가 너무 따뜻하거나 눈이 없는 겨울은 그야말로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다. 그래서 옷섶을 파고드는 칼바람과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혹한 속에서도 겨울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을씨년스럽고도 삭막한 겨울산에 순백의 눈꽃이 만발하면 이 세상 어떤 풍경보다도 순수하고 화사하며 고결해 보인다. 사람들 마음까지 푸근하게 만드는 설경의 명소 4곳을 소개한다.
영실기암 부근의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는 등산객들.
한라산 1600m대에 위치한 구상나무숲. 눈 덮인 구상나무가 전설 속의 설인(雪人)을 닮았다.
영실 쪽의 해발 1600m대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구상나무 군락지가 있다. 구상나무 특유의 진한 향기가 머릿속까지 맑게 해준다. 한겨울에는 1~2m가량의 눈에 뒤덮여 동화의 한 장면 같은 눈꽃터널로 변신하는 구간이기도 하다. 이내 고산평원인 ‘선작지왓’에 들어선다. 선작지왓을 가로지르는 등산로 옆에는 물맛 좋기로 소문난 노루샘이 있다. 하지만 겨울철에는 꽁꽁 얼어붙어 있을 때가 많아서 물맛을 보기란 쉽지 않다. 대신 노루샘 근처 윗세오름대피소에서 따끈한 사발면이나 커피 한잔을 마시며 쉬어갈 수 있다.
어리목 쪽으로 하산하는 길에서도 구상나무숲을 지나게 된다. 하지만 영실 코스의 구상나무숲처럼 감동적이지는 않다. 그보다는 아래쪽의 활엽수림이 더 장관이다. 나뭇가지마다 온통 눈으로 덮여 눈꽃터널을 이룬다. 등산로에도 눈이 두텁게 쌓여 있어서 가끔 ‘엉덩이썰매’를 타는 재미도 있다.
한라산의 서쪽 중턱을 관통하는 제2횡단도로(99번 국도=1100도로)에서 가장 높은 1100고지 휴게소 부근의 눈꽃도 볼 만하다. 영실·어리목 코스의 눈꽃터널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산행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나마도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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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양떼목장의 한가로운 겨울 풍경. 양들의 눈망울이 맑고 선량해 보인다.
평창군에서도 적설량이 가장 풍부한 곳은 대관령을 끼고 있는 도암면이다. 면소재 횡계리에는 외지인들의 발길이 겨우내 끊이질 않는다. 국내 최대의 스키장과 가깝고, 빼어난 설경을 보여주는 명소가 여럿 있기 때문이다. 횡계리와 인근 주민들에게는 풍성한 눈이 생업의 가장 큰 밑천이다. 해마다 대관령눈꽃축제가 열리고, 송천 주변에 여러 개의 황태덕장이 들어서는 것도 모두 눈 덕택이다.
횡계리에서 용평리조트로 가다 보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도로 양쪽에 빼곡이 들어찬 황태덕장들이다. 수천 수만 마리의 명태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황태덕장 풍경은 겨울날의 스산함과 매운 추위를 잊을 만큼 서정적이다. 칼바람 속에서 얼어붙은 심신을 녹이는 데에는 역시 황태국이 제격이다. 따끈한 황탯국과 담백한 황태구이로 속을 채운 뒤 횡계리보다 더 많은 눈이 내린다는 대관령을 찾는다.
옛 대관령휴게소(상행선) 뒤편에는 대관령양떼목장(033-335-1966)이 있다. 우리나라 유일의 양떼목장으로 약 6만 평의 드넓은 초원에서 수백 마리의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진풍경은 이곳 아니면 보기가 어렵다. 하지만 풀밭이 눈밭으로 변한 겨울철에는 방목된 양떼를 구경할 수는 없다. 그 대신 ‘천연눈썰매장’에서 온 가족이 썰매타기를 즐길 수 있다. 겨울철에 양들은 축사와 그 옆의 울타리 친 마당에 모여 있다. 사람들이 내미는 건초를 받아먹는 양들의 맑은 눈망울을 보면 “양처럼 순하다”고 말하는 까닭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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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 향적봉대피소 일대의 아름다운 설경.
1975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덕유산은 정상인 향적봉(1614m)을 중심으로 두문산, 거칠봉, 칠봉, 중봉, 삿갓봉, 무룡산, 남덕유산 등의 해발 1000m가 넘는 고봉들이 산맥을 이루고 있다. 일명 ‘덕유산맥’으로 불린다. 그래서 설악산이나 지리산처럼 종주산행이 가능하다.
덕유산 산행의 기점인 삼공리 상가지구에서 향적봉까지의 등산코스는 의외로 짧은 편이다. 삼공리매표소에서 산책로 같은 계곡 길을 1시간30분쯤 걸으면 백련사에 닿고, 백련사에서 제법 가파른 비탈길을 다시 1시간 30분가량 올라가면 향적봉에 이른다. 그러나 무주리조트(063-322-9000) 곤돌라를 이용하면 힘겨운 산행을 않고서도 덕유산 정상 일대의 눈부신 설화(雪花)를 구경할 수 있다. 무주리조트에서 곤돌라를 타면 약 20분 만에 설천봉(1530m)에 닿는다. 여기서 다시 20여분 동안 눈꽃터널과 계단길을 걸으면 향적봉 정상이다.
사방으로 탁 트인 향적봉에서는 다채로운 톤의 실루엣으로 첩첩 고봉과 산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향적봉에서 중봉, 삿갓봉, 무룡산 등을 거쳐 남덕유산까지 기운차게 뻗은 백두대간도 손금처럼 훤히 보인다. 뿐만 아니라 멀리 동남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지리산, 가야산, 황매산, 기백산, 적상산 등의 명산과 준봉들이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마치 히말라야산맥 어느 산정에서의 조망처럼 장대하고 호방하다. 사방팔방으로 뻗은 산맥 위로 해가 뜨고 지는 광경 또한 장려(壯麗)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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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물이 흐르는 선운산계곡에 가로놓인 나무다리.
선운산 초입에는 천년고찰 선운사가 자리잡고 있다.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검단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오는데 눈 내린 날이면 산사다운 소박함과 고졸한 멋이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끈다. 선운사를 지나면 조붓한 숲길에 들어선다.
길 왼편에는 맑은 개울물이 흘러내리고, 오른쪽에는 흰눈 속에서 더욱 짙푸른 야생 차밭이 제법 넓게 펼쳐져 있다. 아름드리 나무들로 울창한 선운산에는 곤줄박이, 박새, 동고비, 직박구리 등의 산새도 많다. 그래서 선운산 오솔길은 산새소리, 개울물 소리, 바람소리 등 자연의 소리가 길동무나 다름없다.
산세가 험하지 않은 선운산은 눈 쌓인 겨울철에도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 대체로 선운사에서 도솔암과 용문굴을 거쳐 낙조대에 올랐다가 선운사로 되돌아오는 코스가 무난하다. 산행시간은 서너 시간이면 충분하고, 선운산 일대의 대표적인 역사유적과 자연풍광을 모두 둘러볼 수 있다. 눈 구경이 목적이라면 선운사에서 왕복 2시간쯤 걸리는 도솔암까지만 올라도 마음이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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