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사업과 관련, 총체적 ‘도덕적 해이’ 상태에 빠졌다는 비난을 받는 대한적십자사.
보도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이날 오후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를 주도한 인터넷 다음의 카페 ‘국민을 협박하지 마라’ 게시판에는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헌혈운동도 같이 하자”는 내용의 게시물이 떠돌아다녔다. 이들의 주장은 수만명이 모이는 집회와 문화 공연장에 이동 헌혈차가 오면 혈액 부족 사태가 한꺼번에 해소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적십자사는 8만명이 모인 광화문에 헌혈차를 단 한 대도 보내지 않았다. 인근 혈액원은 이날 하루 동안 단체 헌혈차를 아예 운영조차 하지 않았다. 토요일 저녁과 평일 저녁 7시가 넘으면 근무를 하지 않는 적십자사 혈액원의 관행 때문이다.
혈액 재고 바닥나도 직원들은 ‘칼퇴근’
네티즌들은 여기에서 포기하지 않고 다음 집회가 있었던 3월20일 다시 헌혈차를 보내오도록 요구했다. 이번에는 ‘탄핵반대를 하면서 헌혈운동도 함께 하자’면서 혈액원측에 ‘광화문 특별 헌혈팀’을 구성할 것도 요청했다. 하지만 13만명(경찰 추산)이 모인 3월20일 광화문 촛불집회에서도 헌혈차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날 관할 중앙혈액원의 이동 헌혈차는 오전 동안 경기 일원 군부대에서 190명의 군인에게서 헌혈을 받은 후 운행을 중단했다. 그나마 그중 120명분은 수혈을 위해 쓰이지 않고 의약품 원료를 만들기 위한 혈장성분만 채혈했다. 당장 병원에서는 수혈용 O형 적혈구 혈액이 없어 환자가 죽어간다는데 의약품 원료로 쓰이는 혈장성분만 채혈한 것이다. 한술 더 떠 인근 남부혈액원은 ‘주5일 근무제를 시범 실시한다’며 이날 하루 완전히 휴무했다. 헌혈의 집도 마찬가지.
상황이 이런데도 적십자사 혈액사업본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혈액 급감의 원인을 ‘수혈부작용 추적조사 발표(2월25일, 수혈로 간염 감염자 10명 발생)’로 인한 국민의 부정적 인식 탓으로 미루며, “혈액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화가 난 네티즌들이 ‘헌혈 인구가 많은 토·일요일, 평일 저녁 시간 모두 쉬면서 혈액이 모자란다고 하는 것은 도덕적 해이가 아니냐”고 항의하자, 적십자사는 게시판을 통해 이렇게 답변했다.
“대한적십자사는 대한민국 법체계(대한적십자사 조직법) 아래에서 설립되어 운영되는 비영리 특수 법인체이므로 당연히 대한민국 노동법을 준수해야만 합니다. 오는 7월부터 실시되는 고용원 3000명 이상의 사업장, 주 40시간 노동제는 선택조항이 아니라 강제조항이므로 저희 대한적십사 혈액원들도 의무적으로 이를 따라야만 합니다. 이 점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과연 적십자사가 구호, 봉사 활동을 목표로 하는 사회단체이자 국가를 대신해 생명이 위독한 환자에게 혈액을 전해주는 ‘비영리’ 특수 법인체일까. 국세청에 확인해보면 이는 동전의 한쪽 면이라는 사실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국세청에 따르면 적십자사는 정식으로 사업자 등록을 낸 제약업체다. 그것도 혈액이라는 ‘완전 의약품’ 시장을 98%나 장악한 독과점 업체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헌혈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혈액이 아무 대가 없이 생명이 위독한 환자에게 전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완전한 오산이다. 헌혈을 통해 적십자사에 들어온 1명분의 혈액(전혈, 400㎖ 기준)은 3만5390원에 각 의료기관에 팔려나간다. 의료기관은 이를 환자에게 공급한 뒤 구입가격에 5000원을 붙인 4만570원을 보험수가 명목으로 받아낸다. 물론 이는 국민이 낸 건강보험료로 지불된다. 만약 이 혈액을 원심분리기에 넣고 돌려 적혈구농축액(2만3380원), 신설동결혈장(2만4910원), 혈소판농축액(2만8230원)으로 분리하면 가격은 2배가 넘는 7만6520원으로 훌쩍 뛴다. 이뿐 아니다. 적십자사는 혈액 중 혈장만을 따로 뽑아 만든 혈액성분 제제의 원료를 제약사에 공급하면서 4만5500원(1명분)을 따로 벌어들인다. 적십자사 혈액사업본부 산하 혈장분획센터에서 만들어진 혈액성분 제제 반(半)제품은 국내 2개 제약사로 공급돼 엄청난 이윤이 붙여져 환자들에게 공급된다. 심지어 외국에서 들여오는 혈장성분 제제의 수입판매 권한도 모두 적십자사에 있다.
적십자사는 자신들이 수혈사고를 일으켰음에도 헌혈 재고 바닥 사태의 원인을 수혈사고를 보도한 언론 탓으로 돌리고 있다.
“적십자사에서 혈장성분 제제를 반제품 상태로 제약사에 공급하면서 손실률을 감안해 10% 정도를 더 얹어주는데 제약사로서는 이를 굳이 장부에 기록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약사가 이를 완제품으로 만들어 팔면 그야말로 ‘합법적인’ 비자금을 조성할 수 있다는 얘기지요. 제약사 사장은 이것을 가지고 골프장을 짓기도 하고, 적십자사에 대한 로비 자금으로도 사용했죠. 적십자사가 단체헌혈에 매달리는 이유를 짐작할 만하지 않습니까.”(D제약 전 대표 김모씨)
지난해 공짜로 피 뽑아 2238억 수입 … 그래도 적자?
문제는 ‘돈벌이용 성분채혈’에 눈이 멀어 수혈용 전혈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수혈용 전혈은 적정 재고량을 확보하지 못할 때가 많을 수밖에 없다. 실제 적십자사 혈액사업본부가 혈액이 부족하다고 발표한 3월13일 이후 나흘 동안 서울 동부혈액원은 6포병여단(말라리아 주위지역)에 헌혈차와 인력을 투입해 450명의 군인에게서 혈장만을 따로 뽑아냈으며, 중앙혈액원은 3월15일부터 21일까지 일주일 동안 군부대와 각 대학, 고등학교에 대한 단체헌혈에 나섰으나 수혈용 전혈은 1530명에게서 받은 반면, 혈장은 2620명에게서 받아냈다. 혈장을 따로 성분채혈하는 시간이 수혈용 혈액을 뽑는 시간에 비해 3배나 걸리는 점을 고려하면 적십자사가 얼마나 혈장채혈에 목을 매는지 잘 알 수 있다.
적십자사가 지난해 이렇게 국민에게 혈액을 ‘공짜’로 뽑아 벌어들인 수입은 무려 2238억원. 하지만 어디에 썼는지, 적십자사는 지난해 혈액사업에서 36억원 정도의 적자를 기록했다. 도대체 적십자사는 이 많은 돈을 어디에다 썼을까. 적십자사가 헌혈자에게 주는 것이라고는 음료수와 빵, 과자 부스러기뿐. 적십자사는 이를 구입하기 위해 헌혈자 1인당 3000원의 헌혈 장려금을 따로 비축하고 있다. 그런데 적십자사의 내부제보자들과 적십자사 출신 의사들은 한결같이 헌혈 장려금이 다른 곳으로 새고 있다고 증언한다.
“제약사로 보낼 혈장을 단체 채혈하기 위해 군부대 장교식당에 에어컨과 냉장고를 사주고, 국민의 피로 벌어들인 돈으로 술접대를 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접대를 받은 군 장교들은 헌혈한 병사들 중에서 에이즈 의심자가 있어 자세한 검사가 필요하다고 하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아요. 할 수 없이 제가 사비를 들여 군부대에 가서 해당 장병의 혈액 샘플을 받아오곤 했죠.”(인천혈액원 의무실장 출신 전문의 김명희씨)
국민의 피를 뽑아 마련한 적십자사의 살림살이가 이렇듯 적자를 면하지 못하는 데는 적십자사의 방만한 경영도 일조를 한다. 적십자사는 국민의 공적부조(혈액과 성금)로 운영되면서도 2002년 4월 적십자사 산하 혈액관리국에 혈액사업본부를 따로 만들고, 이의 운영을 위해 16개 혈액원에서 혈액 수익금의 15%를 갹출하도록 했다. 거기다 재정적 권한도 없는 2년 계약직 혈액사업본부장(의사) 밑에 부본부장을 둔 위인설관(爲人說官)식 조직구조를 만들어 또 하나의 비판 대상이 되고 있다. 실질적으로 일은 행정직인 부본부장이 다 하는데도 본부장에게 판공비와 고급 승용차, 비서까지 제공한다.
적십자사 관계자는 “90년대 혈액원이 전국 16개로 늘어난 것도 모두 혈액원장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한 문어발식 확장이었다”며 “실질적으로 혈액원은 전국에 6~7개면 충분하다”고 입을 모은다. 혈액원장들에게도 영업용 차량이라는 명목으로 자가용을 제공하고 비서도 두게 하고 있다. 심지어 정년퇴직을 앞두고 6개월이나 유급 공로휴가를 주고 있다. 지난 2월에 있었던 혈액 유출사고의 책임을 지고 3월15일 감봉 3개월의 징계를 받은 서울 남부혈액원장은 12월이 정년이지만 징계가 결정된 이후 3개월간 병가를 내고 벌써부터 출근을 하지 않고 있다.
적십자사가 전방 군인들의 혈액 중 혈장만 따로 채혈하는 데 혈안이 된 이유는 뭘까? 내부제보자들은 그 모두가 ‘돈’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더욱이 이미 공직자의 부패행위에 대한 심사기능을 갖고 있는 부패방지위원회도 제보자의 이번 제보가 ‘공익성’이 있다고 확인했는데도 불구하고 적십자사는 제보 직원에 대한 징계 철회는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들의 공익 제보가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혈액안전관리에 일조했음에도, 직원의 이익을 대표하는 적십자사 노조까지 ‘직원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동료 직원인 제보자들의 징계를 촉구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외부인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적십자사는 자신들을 ‘공기업’이라고 부르는 것에 상당한 거부감을 표시한다. 하지만 적십자사가 기업이 아니라 순수한 사회봉사단체라면 어떻게 세무조사를 받을 수 있겠는가. 국세청은 최근 1949년 적십자사 창설 이후 처음으로 적십자사 산하 각 조직에 대한 전면적인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적십자사의 자금 운영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 심지어 국세청은 이번 기회에 ‘혈액세’를 신설하겠다고까지 밝히고 있다.
잘못을 하고도 시인할 줄 모르는 적십자사 혈액사업본부의 ‘도덕적 해이’ 때문에 100년 역사의 적십자사 전체가 총체적으로 흔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