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전통 명문고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 어느 교사의 한마디다. 한 해 200~300명의 학생을 서울대에 보내던 전통 명문고의 명성은 사라진 지 오래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일명 SKY대 진학률에서도 경기고, 경복고, 서울고, 부산고, 경북고, 광주고, 전주고 등 전통 명문고는 힘을 잃었다.
각 언론사가 발표한 자료를 종합해보면, 2011학년 SKY대 합격률은 경기고 6.4%, 경복고 3%였다. 서울고는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다. 반면, 신흥 강호로 떠오른 외국어고등학교(이하 외고)가 거둔 성적은 눈부시다. 서울 지역 6개 외고의 평균 SKY대 진학률은 28.2%에 달한다. 외고 가운데 1위인 대원외고는 절반 이상이다. 서울대만 놓고 봐도 대원외고는 70명을 합격시킨 데 비해 경기고 11명, 서울고 9명, 경복고 7명을 기록했다. 한때 서울대 입학생 절반 이상을 전통 명문고가 차지하던 시절에 비하면 상전벽해다. 부산 명문인 부산고는 단 1명의 합격자도 내지 못했고, 전주고도 2명만 합격시켰다. 이렇듯 명문고는 특수목적고등학교(이하 특목고), 자율형 사립고등학교(이하 자사고)에 밀리고 중산층 거주 지역의 신흥 명문고에 치이는 신세로 전락했다.
한국 사회 주류에 균열 현상
전통 명문고 졸업생은 분야를 막론하고 한국 사회의 주류였다. 그래서 전통 명문고의 독점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특히 고교평준화 정책 시행 전까지 전통 명문고에 입학한 사람은 일생의 영달을 보장받은 듯한 대우를 받았다. 경기고-서울대를 뜻하는 ‘KS’는 한국의 초엘리트를 뜻했다. 2011년 현재 고등법원 부장판사 이상 고위 법관을 배출한 학교는 총 60개인데 그중 경북고가 15명으로 1등이며 경기고 14명, 전주고 9명, 서울고 6명, 광주일고 5명 순이다. 역사가 짧은 특목고 출신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코스닥 기업 최고경영자(CEO) 1226명의 출신 고교도 경복고, 경기고, 서울고, 경남고 순이다.
하지만 비평준화 세대로 76학번까지 이끈 이들의 영광에도 균열이 생기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외국어고-서울대 출신을 뜻하는 FS라인이 강세다. 전체 판사 수에서는 이미 대원외고가 79명으로 경기고 39명을 제쳤다. 3, 4등도 한영외고, 명덕외고가 차지했다. 검찰도 마찬가지. 검사의 출신 고교 1위는 대원외고다. 법조계 인력 산실은 이제 더는 경기고나 경북고가 아닌 대원외고인 셈. 전통 명문고 졸업생은 “과거의 명성을 영영 잃는 것이 아닌가”라는 불안감과 “새롭게 전통을 다지자”는 결의에 찬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전통 명문고의 힘은 여전히 막강한 동창회에서 나온다. 동창회는 학교를 사서라도 과거의 명성을 되찾고 싶다고 말할 만큼 열정적이다. 각 학교와 동창회는 졸업생과 재학생 간 멘토-멘티 제도로 재학생에게 힘을 불어넣고 있다. 개교 90주년을 맞은 경복고는 이정민 교장이 부임한 뒤 멘토-멘티 제도를 활성화했다. 49회 졸업생인 이 교장은 직접 졸업생을 찾아다니며 호소하고 때론 윽박도 질러가며 재능기부, 시간기부를 받아냈다. 70세 넘은 원로 졸업생과 대학에 다니는 졸업생, 그리고 재학생을 묶어 52개 조로 만들었으며 총 16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경복고 동창회 박돈우 사무차장은 “입시 공부가 아닌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선배들이 도와준다고 나서니 재학생들의 반응도 폭발적”이라고 말했다. 분야도 의예, 건축, 연기, 영화, 호텔경영까지 다양하다. 인기 배우인 62회 졸업생 공형진 씨도 참여했다. 입학사정관제가 확대되는 가운데 창의성, 다양성을 키울 수 있는 멘토-멘티 제도를 2~3년 안에 전 학생이 참여할 수 있도록 확대할 계획이다.
경복고 3학년 학생들이 서울 종로구 청운동 교정을 걷고 있다.
공부만 잘하는? 다 잘하는 아이로!
또 전통 명문고는 자기 학교만의 색깔과 자부심을 재학생에게 심어주면서 자연스럽게 공부와 인성계발도 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서울고는 호국정신을 내세운다. 이 학교는 2010년 6·25전쟁 참전 기념비를 교정에 세웠다. 참전 기념비에는 서울고 출신 6·25전쟁 학도병의 이름을 빼곡히 새겼다.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삼일탑도 학생들에게 호국정신을 일깨운다. 서울고 병영캠프는 지원하는 학생이 넘칠 정도로 인기가 많다. 송두록 연구부장은 “과거 국가에서 일하며 대의를 추구하던 선배들도 서울고의 인성교육을 거친 분들이다. 좋은 대학에 보내서 명문고가 아니라, 나라의 바탕이 되는 지지대를 키워서 명문고”라고 설명했다. 서울고의 여름 교복은 군복을 상징하는 카키색이다.
전통 명문고의 상징인 경기고도 과거 전통을 잇기에 열심이다. 경기고인이면 누구나 잊지 못하는 것이 바로 생활관 합숙이다. 매년 1학년은 방과후 활동으로 2박 3일간 ‘화동랑의 집’에서 합숙을 한다. 여양구 연구부장은 “학생 누구나 입학하면 경기고라는 이름의 무게를 양어깨에 느낀다. 합숙을 마치면 경기고의 전통에 자부심을 가지고 올바른 인성과 공동체 의식도 함양한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학생들이 직접 밥을 지어 부모에게 대접하고, 선배들이 생활관을 찾아와 강연을 하기도 했다.
한 74회 졸업생은 “군대 훈련소에서 처음 교육받은 내용이 머릿속에 오래 남아 있듯이 시조와 창을 배웠던 생활관 합숙 기억은 아직 생생하다. 처음에는 동기 앞에서 창을 하기 쑥스러웠는데, 합숙을 마치니 불알친구가 돼 있었다. 경기고인이라는 자부심이 공부도 열심히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라고 말했다.
전통 명문고 동창회에서 지원하는 풍부한 장학금은 다른 학교가 따라올 수 없다. 서울고는 올해 신입생 가운데 학력우수자 34명에게 2500만 원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대구지역 명문인 경북고 동창회도 올해 처음으로 학력우수자 20명에게 3년간 등록금 전액을 지원한다. 이 학교는 장학회관도 만들어 여기에서 나온 임대수익으로 학생들을 후원할 계획이다. 경북고 동창회 이준복 사무처장은 “선배들이 현역에서 물어나기 전에 후배들에 대한 지원을 확대할 수 있도록 서두르는 중”이라고 말했다. 전북지역 명문인 전주고 동창회도 서울대 진학 학생에게 특별장학금을 주는 한편 매년 장학기금을 마련하고 있으며, 경남지역 명문인 부산고 동창회도 100억 원 기금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동창회의 아낌없는 지원에도 전통 명문고는 우수 학생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전통 명문고 교사들은 “좋은 대학에 보내는 데만 몰두하는 학부모들이 전통 명문고의 이름만 보고 아이를 보내지는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인근에 자사고인 상산고가 들어선 전주고는 우수 학생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전주고의 한 교사는 “가뜩이나 전북지역에 인재가 줄어드는데 자사고, 특목고로 모조리 빠져버렸다. 도리어 성적이 중간 이하인 학생이 전주고 간판이라도 따자는 생각으로 오니 더 힘들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는 법. 각 학교는 우수 학생을 확보하고, 중상위권 학생에게 도약하는 기회를 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특히 중상위권 학생을 상위권으로 올리는 교육력만큼은 입증된 상태라고 자신한다.
서울고 장천 교장은 “중상위권 학생이 기를 펴고 다닐 수 있는 학교”라며 학교 자랑을 했다. 과거 서울대 진학에 목숨 걸던 시대와는 다른 분위기다. 서울고에는 38개 상설 동아리가 있고 이들 동아리를 중심으로 매년 이틀간 경희예술제가 열린다. 장 교장은 “다른 학교에서는 공부 못하는 학생이 고개를 숙인 채 다니지만, 여기에서는 뭐든지 하나면 잘하면 또래 사이에서 우상이 된다. 교사도 학생 표정만으로는 성적을 알 수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성적이 부진한 학생을 위해서는 학습 부진아 교육과정도 열었다. 서울고 동창회 관계자도 “공부 잘해서 서울고에 온 후배나 운이 좋아서 들어온 후배나 다 같은 내 자식이다. 통학버스, 축제, 교직원 연수 등을 지원하고 있다”며 힘을 실어주었다.
과거와 달리 전통 명문고는 홍보에 열을 올린다. 경복고 이정민 교장은 우수 학생을 기다리기보다 직접 인근 중학교를 찾아다니며 홍보한다. 부산고는 먼 거리에 사는 우수 학생을 유치하려고 2010년 4월 기숙사를 만들었다. 광주일고는 선지원 학생 선발로 우수 학생을 확보하기 위해 자율형 공립고등학교(이하 자공고)로 새롭게 출발했다. 광주일고 동창회 관계자는 “자공고로 뽑히는 데 동창회가 노력을 많이 했다. 학업 성적이 우수한 신입생이 많이 들어왔다”며 만족스러워했다.
서울고 교정에 세워진 6·25전쟁 참전 기념비는 서울고 호국정신의 상징이다.
대원외고를 바라보는 시선
과거에는 전통 명문고가 우수 인재 공급 풀로 기능하기도 했지만, 몇몇 명문고 출신이 권력을 독점해왔다는 비판도 받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특정 지역 명문고 출신이 정·관계와 금융계의 상층부로 진출했다. 하지만 마지막 비평준화 세대인 76학번마저 은퇴하고 나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그 자리를 이제 대원외고를 필두로 한 외고가 급속히 대체해나가고 있다. 한 전통 명문고 관계자는 “우수 학생을 독점하는 외고의 행태는 분명 문제다. 외고는 인성 교육 없이 오로지 입시교육에만 매달린다”고 말했다.
과거 KS라인은 이제 FS, 특히 DS(대원외고-서울대)라인으로 급속히 바뀌고 있다. 혹자는 앞으로 5년 안에 법조계를 비롯한 관계, 언론계, 금융계, 정치권에까지 DS라인이 대거 포진할 것으로 내다본다. 과거 전통 명문고가 고만고만하게 서로 경쟁하던 것과 달리, 대원외고 출신의 독주는 외고 사이에서도 두드러진다. 반면 전통 명문고를 비롯한 공립고교의 ‘슬럼화’는 눈에 띌 정도.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김성천 부소장은 “(특정 학교의 엘리트 배출은) 우리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저해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5~10년 안에 대원외고 등이 우리 사회의 주도권을 쥘 것이다. 과거에는 명문고에 돈이 없는 학생도 들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막대한 사교육비를 지불해야 외고 진입이 가능하다. 계층 간 쏠림현상이 심해져 특정 계층의 엘리트 집권이 심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