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면허 법규시험 이전 도로교통공단으로부터 교육을 받는 교육생들.
행정안전부(경찰청) 산하 운전면허시험관리단(이하 관리단)의 각 지방 운전면허 학과시험장에서는 가끔 이런 해프닝이 벌어진다. 운전면허 취득과정의 1차 관문인 학과시험은 요즘 젊은이들에겐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학과시험의 문항은 40개, 합격선은 1종 70점, 2종 60점. 시험 전날 시중의 서점에서 예상문제집을 구입해 질문과 답만 외우면 합격의 최하 마지노선인 60점을 쉽게 넘길 수 있다.
각 문제집에 실린 예상문제는 150~400개에 그치는데, 마치 족집게처럼 운전면허 학과시험 문제와 유사하다. 그래서 관리단과 출판사의 유착관계 의혹마저 제기되곤 하지만 근거 없는 소문일 뿐 현재까지 밝혀진 바는 없다. 한편 운전면허 학과시험이 48년간 계속되면서 더 이상 새로운 문제가 나올 게 없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부기관이 ‘시험문제 판다’ 소문 솔솔
또 각 출판사가 만든 예상문제집을 보면 ‘운전면허 학과시험 문제’라는 제목을 붙이고 저자는 연구소 또는 연구원이라고 소개해, 마치 정부가 운영하는 관리단에서 발행하는 책처럼 보인다. ‘운전면허시험관리단 시행 출제 예상문제’라고 광고하는 문제집도 있다. 이 문구의 실제 의미는 관리단에서 실시하는 운전면허 학과시험에 나올 만한 문제지만, 일반인에게는 ‘관리단이 만든 학과시험 예상문제’로 읽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반인들은 예상문제집을 정부에서 발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관행이 수십 년 계속돼오면서 그동안 운전면허 예상문제집을 낸 출판사들은 쉽게 돈을 벌었다. 매년 학과시험 응시자는 평균 100만 명(복수 응시자 제외). 이들은 예상문제집을 한두 권씩 산다. 운전면허 전문학원에서도 학과교육 때는 자체 제작한 교재보다 시중의 예상문제집을 쓴다. 문제집이 권당 1만 원이라면 연간 예상문제집 매출은 100억 원이 된다. 단행본 가운데 한 해에 10만 권 이상 팔리는 책이 드문 현실에서 운전면허 예상문제집의 매출은 경이로운 수준일 뿐 아니라, 매년 비슷한 매출이 확보되는 ‘땅 짚고 헤엄치기 장사’다. “국내 최고, 부동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는 운전면허 예상문제집”이라는 말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정부가 운전면허시험에 학과시험을 치르는 취지는 시험을 대비하는 과정에서 응시자가 자동차 구조, 운전상식, 도로교통 관련 안전수칙과 법규를 숙지하도록 하자는 것. 그러나 현실은 문제집에 나온 질문과 답을 달달 외워 학과시험만 통과하면 된다는 인식 때문에 학과시험 본연의 취지는 사라지고 출판사의 배만 불리고 있다. 녹색자동차문화교실 정강 대표는 “예상문제집을 구입해 문답을 외우고 응시하는 체제에선 학과시험을 통과해도 무엇을 배웠는지, 어떤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 출판되는 문제집들을 보면 국가고시 출제문항의 거래 의혹을 지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다행히 경찰청은 지난해 11월 운전면허 학과시험의 관행에 문제점이 있다고 판단해 “2010년 5월까지 2000문항의 학과시험 문제은행을 만들어 7월부터 일반인에게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학과시험 문제은행 시스템이란 관리단이 시험문제를 만들어 데이터베이스화한 뒤, 컴퓨터를 이용해 문제의 출제·관리 및 시험·평가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내용을 인터넷이나 정부 기관지 등을 통해 일반인에게 공개하겠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응시자들은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학과시험의 취지대로 자동차 구조, 운전상식, 도로교통 관련 안전수칙과 법규를 자연스럽게 공부하게 된다는 것.
시중에 나와 있는 학과시험 문제집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예상문제집으로 매출을 올렸던 출판사들이 큰 타격을 받는다. 공개된 2000문항의 답이 적힌 해설서를 내면 되겠지만, 작업물량이 방대해 예전처럼 족집게 문제집을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자 출판계에는 벌써부터 문제은행의 내용이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고, 문제에 대한 저작권료를 지불하는 몇몇 출판사에 공급된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다. 한 출판계 인사는 “한 해 수십억 원을 벌던 출판사가 배타적 권한이 사라지는데 가만있을 리 있나. 또 수익을 내야 하는 관리단 경영진이 문제를 팔아 장사하려 할 게 분명하다. 이미 몇몇 출판사가 줄을 대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문항 전면 공개 vs 저작권 수익 사업
과연 이 말이 사실일까. 관리단 경영기획팀에 이에 대한 확인을 요청한 결과, 관리단 측이 저작권료를 받고 문항을 파는 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은 사실로 밝혀졌다. 경영기획팀 관계자는 “심의위원회를 통과해야 최종 결정이 나겠지만, 문제은행의 내용을 아무런 대가 없이 일반인에게 공개하기는 어렵다. 문제은행에 대한 저작권은 우리에게 있다. 운전면허시험관리단은 책임운영기관으로 직원의 신분은 비록 공무원이지만, 월급은 국민 세금이 아닌 자체 수익으로 해결한다. 때문에 이런 큰 수익사업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즉 “우리 돈(운전면허시험 응시 수수료)으로 우리가 만든 시험문제를 왜 공짜로 국민에게 공개하느냐”는 논리.
현재 관리단이 출판사들에 제시할 저작권료는 문제집 가격의 8~10%가 될 것으로 본다. 문제와 답, 해설이 모두 담긴 책을 만들 경우 현재의 두루마리 예상문제집보다 값이 2~3배로 뛸 것으로 보이는데, 그럼 관리단은 매년 저작권료로 수십억 원을 챙길 수 있다. 정강 대표는 “운전면허시험장은 국민이 낸 세금으로 산 국가 소유의 땅이고 건물이다. 그곳에서 국가인증시험을 치르면서 받은 수수료가 과연 기관 자체의 수입이라 할 수 있나. 문제은행의 저작권 판매는 법적 문제는 없을지 모르지만 ‘정부기관이 출제문항을 상품화한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문제은행을 만든 본래 취지는 사라진다. 기존 운전면허시험을 둘러싼 악습과 폐해가 고스란히 국가와 국민에게 전가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경찰청 면허계와 관리단 측은 “문제은행을 만드는 취지가 운전자에게 제대로 된 운전 및 도로교통 지식을 전파한다는 것이므로 내부의 토론과 심의과정에서 어떻게든 통일된 안이 도출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가 인증하는 운전면허 자격증을 따기 위해 운전자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과연 어느 만큼일까. 분명한 사실은 세계 어디에도 운전면허 시험문제를 공개하는 대가로 민간으로부터 저작권료를 받는 정부나 정부기관은 없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