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 등 각종 위원회의 권고는 ‘쇠귀에 경 읽기’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삼성전기 사회봉사단 이은의 씨는 2003년부터 2년간 직장상사 박모 씨에게 성희롱을 당했다. 2005년 6월 이를 알렸으나 회사는 진상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이씨에게 대기발령을 낸 채 8개월간 일을 주지 않았다. 이후 부서에 배치받았지만 동료들은 그를 피했고, 인사고과에서도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아 진급조차 하지 못했다. 고심 끝에 2007년 5월 이씨는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에 성희롱 피해 관련 진정서를 제출했다. 1년여의 조사기간을 거친 뒤 인권위는 “회사 측의 사후관리가 부적절했으므로 철저한 조사와 피해자 보호조치 등을 신속히 하라”는 권고를 내렸다. 실질적으로 이씨의 성희롱 피해와 그로 인한 불이익을 인정한 것.
하지만 삼성전기는 권고를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2008년 11월 인권위를 상대로 행정 소송, 이씨에게는 민·형사 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2년여의 지루한 법정싸움 끝에 4월 15일 법원은 이씨의 손을 들어줬다.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제1민사부(재판장 황현찬)는 “직장 내 성희롱을 한 박모 씨와, 피해자 이씨를 방치하며 인사상 불이익을 준 삼성전기는 공동 불법행위자로 이씨에게 각각 200만 원, 3200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린 것. 4월 27일 이씨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회사가 인권위의 권고를 받아들였으면 쉽게 해결됐을 문제인데 너무 복잡해졌다. 결국 인권위의 결정대로 됐지만, 그간 소비한 내 돈과 시간은 어떻게 보상받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인권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이하 민주화보상심의위) 등은 사법권의 힘을 빌리기 전 저비용으로 인권을 보장하고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들은 진정을 받거나 접수한 사건에 대해 ‘권고’ 조치를 내린다. 권고란 ‘상대방이 어떤 조치를 취하도록 권유하는 일’로 법률상 구속력은 없다. 인권위 윤설아 사무관은 “인권위는 실정법보다 국제인권법, 유엔(UN) 선언 등을 참고해 결정을 내려 법적 구속력이 없지만, 그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이씨 사례처럼 각종 위원회의 권고는 ‘쇠귀에 경 읽기’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인권위 권고 수용 절반에 불과
인권위가 제공한 ‘인권위 권고 수용 현황’에 따르면, 2001년 설립 이후 2356건의 권고 중 피진정기관이 수용 의사를 밝힌 것은 1373건(58.3%)에 불과하다. 그중 법원, 경찰 등 정부기관이 권고를 수용해 정책이나 법률을 개선한 경우는 466건 중 129건(27.7%)에 그친다. 다른 위원회도 마찬가지다. 민주화보상심의위의 경우 복직 권고를 받은 447명 중 30명만 복직했다. 폐업했거나 기한 내 복직 의사를 밝히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복직을 희망했는데 사업장에서 거부한 경우가 214명(47.8%)이나 된다.
법적 구속력이 없는데도 많은 국민이 이런 기관을 찾는 이유는 부담이 덜하기 때문. 변호사를 수임하거나 소송을 하는 것은 엄두가 안 나지만, 인권위에서는 상대적으로 간단한 절차를 거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일부 행정기관은 ‘권고를 무시한다’는 비난을 피하려고 ‘권고 일부 수용’이란 꼼수를 쓰기도 한다. 예산이 필요하거나 사항이 민감한 권고는 수용하지 않은 채 이행이 쉬운 것만 받아들이는 것. 이는 진실화해위의 권고사항을 처리하는 행정안전부(이하 행안부) 소속 ‘권고사항 관련과 거사처리 기획단’이 제공한 자료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적대세력 관련 사건 51개의 경우 위령사업, 역사기록 등재, 역사자료화, 관련 기록 정정, 평화교육 강화 등 주요 권고사항이 있으나 행안부는 △사건 관할 시·군청에 진실화해위 보고서를 비치하거나 △규명된 내용을 가르치겠다 △홈페이지에 결정문 요지를 공고하겠다 정도만 수용해놓고 일부 권고 수용으로 분류했다. 권고에 따라 호적이 정정되거나 의료생계비가 지원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이에 대해 민주당 강창일 의원이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호적부나 가족관계등록부 내용을 정정할 수 있다”는 법률 개정안을 냈지만 국회에 계류 중이다.
경찰 역시 권고사항을 잘 이행하지 않는 대표적인 국가기관이다. 인권위는 2008년 5월 초부터 진행된 촛불집회와 관련해 2009년 10월 행안부 장관에겐 당시 경찰청장에게 경고를, 경찰청장에겐 집회 현장에서 방어 위주의 경비 원칙 엄수, 과도한 진압작전을 지휘한 기동본부장 등 징계 조치, 시위진압용 살수차의 구체적인 사용기준에 대한 법적 근거 마련을 권고했다. 하지만 행안부 장관은 이미 살수차 등은 안전하게 사용하고 있고, 방어 위주의 경비 원칙을 엄수해 법적 근거를 마련할 이유가 없다며 수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또한 당시 경찰청장은 2009년 1월 사퇴한 이후라는 핑계로 ‘경찰청장 경고’ 권고에 불이행 의사를 밝혔고, 사건 당시 기동단장에게 서면경고를 하는 데 그쳤다. 인권위는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따라 이를 언론 및 국민에게 공표했을 뿐, 강제 시행을 요구하지는 못했다.
이처럼 권고가 수용되지 않다 보니 소송으로까지 이어져 막대한 시간과 돈이 낭비되기도 한다. 청각장애를 이유로 2007년 2월 해직된 청강문화산업대 애니메이션학과 안태성 전 교수는 2007년 6월 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 ‘학교는 관련 보직교수에게 장애인 차별 관련 특별 인권교육을 받으라’는 권고를 받아냈다. 하지만 지시는 지켜지지 않았다. 2년간의 법정투쟁 결과 2009년 10월 29일 서울대법원 특별3부(주심 안대희 대법관)는 안씨의 해직처분 무효 확인청구 각하결정을 취소해달라는 교육인적자원부 교원소청심사위원회의 상고를 기각해 안씨의 복직 가능성을 열어줬다.
“일단 거부하고 보자”는 분위기
안씨의 아내 이재순 씨는 “이미 학교 측의 잘못은 2008년 인권위 결정에서 드러났다. 만약 학교가 그를 받아들이고 잘못을 스스로 시정했다면 서로 소모전을 하지 않았을 텐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윤설아 사무관은 “장애인, 성희롱 건과 관련해서 특히 인권위 권고 이후 법적 분쟁이 많이 일어난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행정기관의 권고 수용률이 낮은 것은 행정기관이 보수화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한양대 법학과 박찬운 교수는 “행정기관들이 이번 정권 들어서 인권위 등 단체의 권고에 ‘일단 거부하고 보자’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비판했다. 일각에선 위원회의 특성상 정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보수적인 MB정권이 들어서면서 정권의 눈치를 보는 결정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잘 모르고 힘없는 사람이 위원회의 문을 두드리지만, 힘겹게 ‘권고’를 받아도 시행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