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릉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실사 중인 ICOMOS의 왕리준(王力軍) 위원.
1452년 5월 18일, 단종이 즉위한 지 만 1년이 되는 날 수양대군(세조)과 양녕대군은 단종에게 왕비를 맞이할 것을 청하고 이후 효령대군까지 왕비 간택을 권했다. 5개월 뒤 8~16세까지 경외(京外)의 처녀 가운데 이씨를 제외하고는 혼인 금지령이 발표됐다.
1년 4개월 만에 대비로 물러나
단종 2년(1454) 1월 1일 수양대군, 양녕대군, 정인지 등이 본격적인 왕비 간택에 착수했다. 조선시대 최초로 현직 왕의 왕비를 간택하는 행사였다. 최종후보 3명에 풍정창부사 송현수, 예원군사 김사우, 전사정 권완의 딸이 올라 마침내 송현수 딸이 간택됐다. 김사우와 권완의 딸은 잉으로 했다.
혼례는 송현수의 집에서 축생(畜牲·산 기러기 등 사람이 기르는 짐승) 등을 들고 납채(納采·청혼서 보내기) → 납징(納徵·결혼 예물 보내기) → 고기(告期·혼인 날짜 통지) → 책비(冊妃·왕비로 책봉하기) 등의 절차를 거쳐 진행됐다. 가례의식은 경복궁 근정문에서 길복예로 거행했다. 왕실에서는 왕비의 집에 면포 600필, 쌀 300석, 콩 100석을 내렸다. 이때에도 단종은 아버지 문종의 삼년상을 이유로 왕비 간택을 중지시키려 했으나 수양대군의 뜻에 밀려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1월 25일 드디어 14세의 단종과 15세의 정순왕후가 백년가약을 맺었다. 3일 뒤인 1월 28일이 정순왕후 송씨의 생일이어서 종친과 백관이 생일축하 하례를 올렸으나 단종이 이를 중단시켰다. 2월 1일 단종은 최복(상복·검은 옷과 검은 혁대)을 벗고 길복(평상복)을 입었다. 문종의 삼년상을 서둘러 마친 것이다. 이처럼 이미 실권은 수양대군이 장악한 상황에서 단종은 결혼조차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이듬해 윤 6월 단종의 다섯째 삼촌인 금성대군과 김종서 등 고명대신, 의정부의 신하들이 왕권 강화를 도모하다 유배 가게 되자 단종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난다. 정순왕후도 왕비가 된 지 1년 4개월 만에 대비로 물러났다. 7월에 단종은 공의온문상태왕(恭懿溫文上太王), 송씨는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로 진봉됐다.
1456년 단종의 복위를 시도한 사육신 사건이 벌어지자, 이듬해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대비 역시 대군부인으로 강등됐다. 그리고 단종은 영월로 유배를 떠나고, 남편과 생이별한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에 초가를 지어 정업원(淨業院·지금의 청룡사)이라 이름 짓고 평생 단종을 그리워하며 지냈다. 정순왕후는 시녀들이 구해오는 양식으로 생계를 잇다 후에 염색 일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정순왕후가 정업원 뒷산에 올라 영월을 향해 통곡하던 봉우리는 동망봉(東望峰)이라 한다.
왕비의 형편이 어렵다는 소식을 들은 동네 아녀자들이 감시병 몰래 금남(禁男)의 채소시장을 열어 정순왕후를 돌봤다고 한다. 정순왕후는 자신을 왕비로 간택하고 폐비로 만든 시숙부 세조보다 53년을 더 살았다. 세조의 후손이며 시사촌인 덕종과 예종, 시조카 성종, 시손 연산군의 죽음까지 지켜보고 1521년(중종) 6월 4일 82세로 생을 마감했다. 남편과의 생이별 이후 자식도 없이 긴 세월 동안 어떤 마음이었을지 궁금하다. 정순왕후가 영월로 유배 가는 단종과 마지막 이별을 한 자리가 청계천의 영도교(永渡橋)다.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다리라는 뜻에서 이름 붙여진 다리다.
중종은 정순왕후가 승하하자 대군부인의 예로 해주 정씨 사가의 묘역에 조영하도록 했다. 177년 후 숙종 24년(1698)에 단종과 정순왕후를 추숭해 종묘 영녕전에 들이고 능의 이름을 사릉(思陵)으로 했다. 이때 ‘어그러짐이 없고 화합하라’는 의미에서 시호를 정순(定順)이라 하고, 능호는 ‘단종을 밤낮으로 공경함이 바르다’는 뜻의 사릉(思陵)이라 지었다.
해주 정씨 사가의 묘역에 능 조성
사릉은 대군의 예에 따랐으므로 능원도 다른 능에 비해 단출하다. 즉 능침 규모가 작고 병풍석, 난간석도 설치하지 않았다. 문석인과 석마만 있으며 양석과 호석은 한 쌍씩으로 간소화했다. 능원의 좌향은 북북동에서 남남서 방향을 바라보는 계좌정향(癸坐丁向) 형태다. 장명등은 숙종조의 것으로 단종의 장릉 것과 더불어 조선시대 최초의 사각장명등으로 평가된다. 사릉의 정자각은 맞배지붕으로 배위청(정자각은 흉벽을 두른 정청과 기둥만 세운 배위청으로 나눈다)이 짧아서 전체 건물의 모습이 정(丁)자형보다는 정사각형의 느낌을 준다.
한편 조선시대 모든 능역에는 사가의 무덤을 두지 않는 것이 원칙이나 유일하게 사릉에는 사가의 무덤이 몇 기 남아 있다. 세계문화유산위원회 실사자도 이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들 무덤은 정순왕후의 유일한 시누이인 경혜공주의 해주 정씨 시가 것이라 숙종 때 추숭하면서 어쩔 수 없이 사가의 무덤을 이전하지 않고 능역을 조성했다. 다행히 이곳 사릉은 도성으로부터 100리 안에 조성돼 왕실에서 친히 제향을 받들 수 있었다. 반면 영월의 단종 장릉은 수백 리 떨어진 곳에 조영된 까닭에 왕이 친행하거나 조정(삼정승 또는 관찰사)에서 제례 지내기가 어려워 영월의 현감이 대행케 했다. 지금도 단종제의 초헌관은 영월 군수가 한다. 이후 단종제는 영월 최대의 축제로 자리 잡았다.
사릉은 비록 규모는 아담하지만 능원을 둘러싼 솔밭이 아름다워 사진작가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이곳에는 문화재청이 관할하는 궁과 능에 필요한 나무를 기르는 양묘사업소 묘포장이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시 묘포장에 있는 종자은행과 소나무 등 각종 유전자원은 궁·능의 생태문화자원의 보존적 의미가 있다 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이곳의 소나무 묘목은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묘소인 강원 삼척 태백산맥 능선에 있는 영경묘의 낙락장송 후손들이다. 이 소나무는 이번 숭례문 복원에도 사용될 정도로 대표적인 한국의 소나무로 평가받고 있다.
1 봄꽃으로 가득한 사릉. 2 정순왕후 능역이 만들어지기 전에 조성한 해주 정씨 묘역의 문석인.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사가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3 사릉의 소나무 숲길. 4 이태조 5대조 준경묘의 소나무. 5 이성계의 5대조 묘소인 강원 삼척 태백산맥 능선에 있는 영경묘의 낙락장송 후손들로 이루어진 소나무 묘목들. 6 사릉의 송림과 야생화 관찰원.
양지바른 언덕에 조영된 조선 왕릉의 능침은 도래솔(송림)이 둘러싸여 있다. 소나무는 나무 중 유일한 십장생으로 왕조의 영원성을 상징한다. 소나무는 대표적인 장수식물이며 나무 자체가 그윽한 자태를 지녀 능역 주변에 심었다. 또한 소나무의 분포는 용맥(풍수지리에서 산의 정기가 흐르는 산줄기)의 흐름을 나타내며 척박한 능선에서도 잘 자라 특별히 용맥을 잇는 나무로 관리돼왔다.
봉분 뒤편의 소나무는 사신사(四神砂)의 현무를 나타낸다. 현무는 거북 형태로 소나무의 수피가 오래되면 검은색으로 변하고 두껍게 갈라져 거북의 등 같은 모습이 되는 것에서 연유한다. 소나무 송(松)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나무 목(木)에 공적 공(公)이 아닌가. 임금이 되면 사적인 일 대신 공적인 백성정치를 펴라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현대 정치인들이 새겨볼 만하다. 지금도 봉분을 중심으로 한 능침의 공간에는 소나무가 절대적 우세를 나타내며 잘 보존되고 있다. 처음 능역에 소나무를 식재한 때는 1409년과 1411년 1월로 태종이 건원릉에 소나무 심을 것을 명해 박자청이 감독하고 심었다고 전한다.
이후 조선 왕실에서는 매년 능원에 소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를 심었다. 조선시대에는 왕릉 소나무가 벼락을 맞으면 해괴제와 안신제를 지낼 정도로 중히 여겼다. 이렇게 조영한 600년 된 소나무와 그 후손들은 지금도 능원에서 푸른 기상을 뽐내고 있다. 이곳 사릉의 소나무는 능역 전체를 감싸 특히 아름답다.
조선시대 임금의 용상 뒤에는 왕실의 위엄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가 있다. 그 그림 속에도 푸른 소나무를 양옆에 그려넣었다. 이는 왕권의 위엄을 나타내는 동시에 균형과 평정 정치에 대한 바람을 담은 것이다. 홍릉과 유릉의 침전 용상 뒤 일월오봉도에서도 소나무 그림 흔적이 보인다. 지금도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뒤 그림에는 거목의 소나무를 볼 수 있다. 애국가에도 서울 도성의 안산인 남산의 소나무가 나온다. 올봄에는 선산 언덕에 소나무를 심는 것이 어떨까. 저탄소 녹색 산업시대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