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경렬 전 경기남부지방경찰청장. 지호영 기자
허경렬 전 경기남부지방경찰청장은 박 씨가 수사를 받을 때 인천중부경찰서에서 형사계장으로 근무했다. 1987년 경위로 임관해 33년간 공직에 몸담은 허 전 청장은 기억 속에 30년 전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판교 환풍구 붕괴 사고’ ‘수원 팔달산 토막 살인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의 수사본부장, 경찰청 수사국장을 맡은 바 있는 그는 현재 대학생들에게 강의하면서도 ‘안두희 피살 사건’은 꼭 빼놓지 않고 다루고 있다.
“법을 대신해 내가 김구 살해범 심판했다”
박 씨는 범행 전날까지 시내버스를 운전했다. 사건 당일 아내에게 비번 날이므로 등산을 간다고 말한 뒤 안두희의 집으로 향했다. 안두희의 부인이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 집 안으로 들어가 안두희를 가져간 ‘정의봉’으로 수차례 때려 사망에 이르게 했다. 박 씨는 이후 심곡본동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하고 바로 자수했다. 허 전 청장은 범행 다음 날 마주한 박 씨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한다.“의연했다.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변명도 하지 않았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범행 사실을 이야기했다. 사람이 아닌 반역자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어떠한 판결도 감수하겠다고 했다. 이와 대비되는 건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였다. 아내와 어린 자녀들을 힘들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허 전 청장과의 면담 기록에 따르면 박 씨는 범행 전 초조함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안두희의 집으로 들어가기 전 아파트 계단을 수차례 오르내리며 기도문을 암송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씨는 본인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백범일지’와 권중희의 ‘역사의 재판에는 시효가 없다’를 수차례 읽고 결연한 의지를 다진 뒤였다. 안두희는 1949년 백범을 암살했지만 4년 만에 복권됐다. 이후 군납업자로 안정된 생활을 영위했다. 김구 암살의 배후에 대해서도 오락가락 진술하더니 결국 함구했다. 박 씨는 당시 허 전 청장에게 “(안두희를 비판하는) 기자들의 글이나 말로는 되지 않는 일로, 행동으로 실천하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법을 대신해 내가 심판했다”고 털어놨다.
사건은 명확했다. 피해자는 사망했고 피의자는 자수했다. ‘정의봉’이라고 쓰인 40㎝ 길이 나무 몽둥이, 안두희의 아내를 묶어둘 때 사용했던 나일론 줄 등 범행도구도 확보했다. 박기서는 곧바로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각계각층에서 구명 운동 움직임이 일어 9200명이 작성한 탄원서가 인천지방법원으로 제출됐고, 시민들은 박 씨의 자택에 격려금과 위로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박 씨는 1심과 2심에서 각각 징역 5년과 3년을 선고받았다. 1997년 11월 대법원은 2심을 확정하며 “피고인의 이 사건이 범행동기나 목적이 주관적으로 정당성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우리 법질서 전체의 관점에서는 사회적으로 용인될 만한 정당성을 가진다고 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고(故) 박기서 씨는 1996년 10월 23일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를 ‘정의봉’이라 적힌 나무 몽둥이로 살해했다. 당시 현장 검증을 하는 모습. 동아DB
정의는 올바른 것 모두에게 주려는 노력
허 전 청장 역시 백범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자유와 자유 아님이 구분되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나오느냐에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나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 개인 또는 일 계급에서 나온다”고 썼다. 허 전 청장은 “백범 선생은 그 시대부터 법의 지배(rule of law)를 원했고, 독재 국가에서 발생하는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를 우려했다”며 “자유는 결국 인권과 연관돼 있는데 당시 경찰은 인권에 크게 신경 쓰지 않던 때라 직업과 신념 사이의 괴리 사이에서 고민해 보기도 했다”고 말했다.허 전 청장은 피살 사건 수사 당시 형사들과 함께 안두희의 방을 샅샅이 수색했다. 살인 증거뿐 아니라 혹여라도 안두희가 남겨둔 김구 암살의 배후를 찾아 진실을 규명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진 것이었다. 메모장까지 꼼꼼히 살폈지만 배후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허 전 청장은 “박 씨가 그를 살해함으로써 영원히 진실이 묻히게 됐다는 비판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안두희는 절대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몇 년 전 경찰을 떠났지만 여전히 30년 전 사건을 생각하고 있다. 인하대 행정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학기마다 이 사건을 전한다. 세 가지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다.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는가. 정의는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 법의 집행과 적용은 시대적 소명을 다할 수 있는가. 허 전 청장은 “답은 나도 알지 못한다”며 “다만 학생들이 이 사건을 통해 정의와 법에 대해 생각해 보길 바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허 전 청장은 조심스럽게 인터뷰에 임했다. 경찰에 오래 몸담은 수사 책임자 입장에서 역사적 사건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후대에 이 사건이 어떻게 기록되길 바라냐고 묻자 허 전 청장은 이렇게 답했다.
“박 씨의 살인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법과 개인의 신념이 충돌할 때 그 신념을 우선시했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건 사회가 정의롭지 못했다는 뜻이고,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다. ‘정의는 올바른 것을 모두에게 주려는 부단한 노력’이라고 했던 로마 제국의 법학자 울피아누스의 말이 떠오른다.”
문영훈 기자
yhmoon93@donga.com
안녕하세요. 문영훈 기자입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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