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초여름의 끝자락에서 차 한 잔을 마시고 있을 때였다. 불현듯 창밖으로 흰 그림자가 휙 지나갔다. 분명 상담소로 들어오는 모습이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갑작스럽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마치 유령을 본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리고 여인이 한 명 들어왔다.
창백한 얼굴에 하얀 드레스가 아까 본 유령이 맞았다. 아무 표정 없이 들어온 여인은 고개를 까딱하고는 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어떤 일로 오셨나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말을 꺼냈다. 그녀는 아무 상관없다는 얼굴로 지갑을 열더니, 명함을 한 장 꺼내 책상 위로 내밀었다. 그 명함에는 내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선생님이 맞으신가요?”
저승에서 울려오는 듯 그녀의 목소리엔 섬뜩한 한기가 서려 있었다. 나도 모르게 등허리로 소름이 쭉 끼쳤다. 그녀는 내 답변은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더니 우아한 손동작으로 불을 붙였다. 상담실은 금연이었으나 난 그녀의 행동을 관찰하려고 그냥 뒀다. 일회용 종이컵을 재떨이로 내밀자 그녀의 하얗고 가는 손가락이 컵을 잡아당겼는데, 같은 여자인 내가 봐도 소름끼치도록 매혹적인 동작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의 집인 양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난 눈을 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누구 소개로 오셨습니까?”
허공에 담배연기를 아무렇지 않게 내뿜은 그녀가 고개를 살짝 틀어 나를 보고는 방긋 미소 지었다. 세상에나, 저런 미소를 날리다니. 저 미소에 얼마나 많은 남자가 녹아 쓰러졌을까. 나도 모르게 머리를 털며 눈동자에 힘을 줬다. 꼭 홀린 것 같았다. 여자인 내가 봐도 저런데 남자는 백이면 백 모두 홀리리라.
매혹적 모습에서 나온 충격적인 말
“소개가 아닙니다. 제 발로 찾아왔어요.”
그녀는 길게 남은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종이컵 바닥에 비벼 껐다. 그런데 그 모습조차 매력적이었다. 난 그녀에게 쏠리는 흥미를 막을 길이 없어 그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했다.
“네, 말씀하세요. 편하게.”
말을 하는데 목에서 쉰소리가 났다. 젠장이라는 욕이 나올 만큼 당황스러웠다는 것은 나도 모르게 이 여인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이 커서였다. 젠장!
“저는 남자를 싫어합니다. 정말로 싫어요. 그런데 남자들이 자꾸만 귀찮게 굴어요.”
“그게 이유인가요?”
난 그녀의 말이 시답지 않았음에도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짜증과 화를 느끼며 깊이 공감했다.
“네, 그게 이유예요.”
한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흘러갔다. 그녀가 떠난 후 난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를 곰곰 되씹어봤다. 자신은 남자를 혐오하는데 남자들은 그녀를 한 번 보면 미친 듯이 좋아한다. 그녀는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남녀간 연애를 경멸한다. 사랑을 모르는 지구인이 무슨 사랑을 입에 올리느냐며 경멸 어린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얼음나라의 여왕처럼 차가우면서도 태양의 심장을 가진 듯 열정적이라 저항할 수 없이 매혹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매혹적인 줄 알고나 하는 말일까. 같은 여자로서 질투가 나야 마땅한데 나도 모르게 이 땅의, 아니 더 정확히 이 지구상의 남자를 같이 경멸하는 나를 보며 깜짝 놀랐다. 그녀는 상대의 마음을 자기 맘대로 주물렀다 폈다 하는 능력이 있는 듯했다. 왜? 그녀는 “남자를 왜 혐오하느냐”는 내 질문에 “남자들의 시답지 않은 연애놀음에 염증을 느낀다”고 했다. 다음 상담시간이 올 때까지 머릿속에서 그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다음 시간 그녀는 하늘색 잠자리날개 같은 중세풍의 풍성한 원피스를 입고 들어섰다. 그 당당하고 우아한 모습이라니. 난 입이 쩍 벌어졌다. 그녀는 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빼물었고 난 당연한 듯 종이컵을 밀어줬다. 그녀의 말엔 일관성이 없었다. 남자를 혐오한다고 했다가 그래도 정말 사랑을 하고 싶다고 했다가…. 당최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몰랐다.
그래도 그녀가 말하는 순간만은 쏙 빠져들어 뭐든지 그녀 말이 맞는다고 느껴졌다. 난 상담가로서 위기감을 느꼈다.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가 신뢰하고 존경하는 상담가를 한 명 동참시키기로 했다. 그녀는 거리낄 게 하나도 없다는 듯, 혹은 누가 와도 어쩔 수 있겠느냐는 듯 순식간에 수락해 내 맥이 빠지기까지 했다. 하긴 외모나 행동, 말투 등을 빼고는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소박하고 순진해 보였다. 참 묘한 여성이었다. 어쩌면 이런 양면성이 그녀를 더욱 신비롭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지도 몰랐다.
그다음 회기 그녀가 상담을 끝내고 돌아간 뒤 상담조력자로 동참했던 닥터 김과 저녁을 함께 했다.
“대단하군.”
닥터 김은 뜬금없는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녀가 여자로서 대단하다는 것인지, 혹은 다른 무엇이 대단하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랑을 알지만 아직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듯해.”
난 닥터 김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가 그녀에게서 본 것은 무엇인가. 닥터 김의 말이 이어졌다.
“사람은 말이야, 자신이 가진 것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그렇지 않나? 자신의 이해를 넘어서는 사람에게선 묘한 매력과 반감을 동시에 가지는 게 인간의 속성이야. 잊었나? 특히 분석가, 과학자, 평론가의 특성이 그렇지. 뭔가 샅샅이 분석해서 이름표를 달고 싶은 것. 그런데 그게 가장 위험하지. 인간을 어떻게 하나로 분석할 수 있겠나. 신에게 도전하고 싶은 건가. 그저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 아니 이해라는 말보다 그녀의 모든 게 자네에게 스며들어 느끼는 것이 가장 중요하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머릿속에서 번쩍하고 느껴지는 게 있을 걸세. 그녀의 이 말 저 말, 이 행동 저 행동을 분석하다 보면 자넨 결코 미로에서 벗어나지 못해. 전체로, 통째로 느끼고 판단을 유보하게. 어쩌면 영원히 판단을 유보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자들이 있지. 나도 경험해봤네. 그땐 그들 스스로 알아갈 때까지 그저 로빈슨 크루소의 식인종 포로 ‘프라이데이’나 배구공 친구가 돼주는 게 최고의 상담일세.”
그의 말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특히 로빈슨 크루소의 배구공 친구가 돼주라는 말은 상담가의 임무를 일정 정도 포기하고 내어놓는 것을 뜻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그렇게 불가해한 존재란 말인가.
닥터 김의 조언에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그녀의 행동과 이야기들을 꼼꼼이 기록해가며 뭔가를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상담 회기가 거듭될수록 미궁으로 빠졌다. 닥터 김의 이야기가 맞았다. 나는 잎사귀를 모두 떨구고 선 가을 나목처럼 그녀를 맞고 있었다. 그녀는 바람이었다. 내 벌거벗은 줄기 사이사이를 샅샅이 훑되 결코 걸리지 않고 사라지는 바람. 어떤 땐 격렬하게, 어떤 땐 상냥하게, 또 어떤 땐 잠시 머물러주는 애교도 발휘했다. 그렇게 상담은 종결로 치달았고 거의 로빈슨 크루소의 프라이데이 모드로 변신하기 직전 그녀에게서 뜻밖의 말을 들었다.
날 분해하는 남자에 염증과 혐오 느껴
“선생님, 고맙습니다. 전 선생님을 이용했어요. 전 온전한 수용을 받고 싶었어요. 남자들은 날 좋아한다, 사랑한다 하면서 저의 일거수일투족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했죠. 어쩌면 그들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닌, 나를 가지고 해부놀이를 했는지도 몰라요. 자르고 부수고 들여다보고 파헤치고, 내장에서 피가 철철 나도록 가르고 또 가르고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 했죠.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는 남자들에게 점점 염증과 혐오를 느꼈어요. 사랑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냥 존재 자체로 수용받는 그런 느낌. 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있는 게 중요한 그런 거요. 아무리 내가 상대를 이해할 수 없어도 상대니까 괜찮은 것, 아니 그저 좋은 것. 분해하는 남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분해를 마치면, 아니 분해가 안 되면 나가떨어졌어요. 전 그런 그들을 보며 경멸의 웃음을 지었죠. 이번엔 조금 오래갔네 하면서요. 이젠 됐어요. 선생님과의 경험은 제게 이 지구에도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줬거든요.”
그녀의 눈부신 미소 뒤에 숨은 쓸쓸하고 가슴 아픈 한 편의 일기를 훔쳐본 듯해 나는 눈길을 돌렸다. 그게 내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선물이었다.
창백한 얼굴에 하얀 드레스가 아까 본 유령이 맞았다. 아무 표정 없이 들어온 여인은 고개를 까딱하고는 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어떤 일로 오셨나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말을 꺼냈다. 그녀는 아무 상관없다는 얼굴로 지갑을 열더니, 명함을 한 장 꺼내 책상 위로 내밀었다. 그 명함에는 내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선생님이 맞으신가요?”
저승에서 울려오는 듯 그녀의 목소리엔 섬뜩한 한기가 서려 있었다. 나도 모르게 등허리로 소름이 쭉 끼쳤다. 그녀는 내 답변은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더니 우아한 손동작으로 불을 붙였다. 상담실은 금연이었으나 난 그녀의 행동을 관찰하려고 그냥 뒀다. 일회용 종이컵을 재떨이로 내밀자 그녀의 하얗고 가는 손가락이 컵을 잡아당겼는데, 같은 여자인 내가 봐도 소름끼치도록 매혹적인 동작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의 집인 양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난 눈을 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누구 소개로 오셨습니까?”
허공에 담배연기를 아무렇지 않게 내뿜은 그녀가 고개를 살짝 틀어 나를 보고는 방긋 미소 지었다. 세상에나, 저런 미소를 날리다니. 저 미소에 얼마나 많은 남자가 녹아 쓰러졌을까. 나도 모르게 머리를 털며 눈동자에 힘을 줬다. 꼭 홀린 것 같았다. 여자인 내가 봐도 저런데 남자는 백이면 백 모두 홀리리라.
매혹적 모습에서 나온 충격적인 말
“소개가 아닙니다. 제 발로 찾아왔어요.”
그녀는 길게 남은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종이컵 바닥에 비벼 껐다. 그런데 그 모습조차 매력적이었다. 난 그녀에게 쏠리는 흥미를 막을 길이 없어 그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했다.
“네, 말씀하세요. 편하게.”
말을 하는데 목에서 쉰소리가 났다. 젠장이라는 욕이 나올 만큼 당황스러웠다는 것은 나도 모르게 이 여인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이 커서였다. 젠장!
“저는 남자를 싫어합니다. 정말로 싫어요. 그런데 남자들이 자꾸만 귀찮게 굴어요.”
“그게 이유인가요?”
난 그녀의 말이 시답지 않았음에도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짜증과 화를 느끼며 깊이 공감했다.
“네, 그게 이유예요.”
한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흘러갔다. 그녀가 떠난 후 난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를 곰곰 되씹어봤다. 자신은 남자를 혐오하는데 남자들은 그녀를 한 번 보면 미친 듯이 좋아한다. 그녀는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남녀간 연애를 경멸한다. 사랑을 모르는 지구인이 무슨 사랑을 입에 올리느냐며 경멸 어린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얼음나라의 여왕처럼 차가우면서도 태양의 심장을 가진 듯 열정적이라 저항할 수 없이 매혹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매혹적인 줄 알고나 하는 말일까. 같은 여자로서 질투가 나야 마땅한데 나도 모르게 이 땅의, 아니 더 정확히 이 지구상의 남자를 같이 경멸하는 나를 보며 깜짝 놀랐다. 그녀는 상대의 마음을 자기 맘대로 주물렀다 폈다 하는 능력이 있는 듯했다. 왜? 그녀는 “남자를 왜 혐오하느냐”는 내 질문에 “남자들의 시답지 않은 연애놀음에 염증을 느낀다”고 했다. 다음 상담시간이 올 때까지 머릿속에서 그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다음 시간 그녀는 하늘색 잠자리날개 같은 중세풍의 풍성한 원피스를 입고 들어섰다. 그 당당하고 우아한 모습이라니. 난 입이 쩍 벌어졌다. 그녀는 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빼물었고 난 당연한 듯 종이컵을 밀어줬다. 그녀의 말엔 일관성이 없었다. 남자를 혐오한다고 했다가 그래도 정말 사랑을 하고 싶다고 했다가…. 당최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몰랐다.
그래도 그녀가 말하는 순간만은 쏙 빠져들어 뭐든지 그녀 말이 맞는다고 느껴졌다. 난 상담가로서 위기감을 느꼈다.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가 신뢰하고 존경하는 상담가를 한 명 동참시키기로 했다. 그녀는 거리낄 게 하나도 없다는 듯, 혹은 누가 와도 어쩔 수 있겠느냐는 듯 순식간에 수락해 내 맥이 빠지기까지 했다. 하긴 외모나 행동, 말투 등을 빼고는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소박하고 순진해 보였다. 참 묘한 여성이었다. 어쩌면 이런 양면성이 그녀를 더욱 신비롭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지도 몰랐다.
그다음 회기 그녀가 상담을 끝내고 돌아간 뒤 상담조력자로 동참했던 닥터 김과 저녁을 함께 했다.
“대단하군.”
닥터 김은 뜬금없는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녀가 여자로서 대단하다는 것인지, 혹은 다른 무엇이 대단하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랑을 알지만 아직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듯해.”
난 닥터 김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가 그녀에게서 본 것은 무엇인가. 닥터 김의 말이 이어졌다.
“사람은 말이야, 자신이 가진 것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그렇지 않나? 자신의 이해를 넘어서는 사람에게선 묘한 매력과 반감을 동시에 가지는 게 인간의 속성이야. 잊었나? 특히 분석가, 과학자, 평론가의 특성이 그렇지. 뭔가 샅샅이 분석해서 이름표를 달고 싶은 것. 그런데 그게 가장 위험하지. 인간을 어떻게 하나로 분석할 수 있겠나. 신에게 도전하고 싶은 건가. 그저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 아니 이해라는 말보다 그녀의 모든 게 자네에게 스며들어 느끼는 것이 가장 중요하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머릿속에서 번쩍하고 느껴지는 게 있을 걸세. 그녀의 이 말 저 말, 이 행동 저 행동을 분석하다 보면 자넨 결코 미로에서 벗어나지 못해. 전체로, 통째로 느끼고 판단을 유보하게. 어쩌면 영원히 판단을 유보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자들이 있지. 나도 경험해봤네. 그땐 그들 스스로 알아갈 때까지 그저 로빈슨 크루소의 식인종 포로 ‘프라이데이’나 배구공 친구가 돼주는 게 최고의 상담일세.”
그의 말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특히 로빈슨 크루소의 배구공 친구가 돼주라는 말은 상담가의 임무를 일정 정도 포기하고 내어놓는 것을 뜻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그렇게 불가해한 존재란 말인가.
닥터 김의 조언에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그녀의 행동과 이야기들을 꼼꼼이 기록해가며 뭔가를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상담 회기가 거듭될수록 미궁으로 빠졌다. 닥터 김의 이야기가 맞았다. 나는 잎사귀를 모두 떨구고 선 가을 나목처럼 그녀를 맞고 있었다. 그녀는 바람이었다. 내 벌거벗은 줄기 사이사이를 샅샅이 훑되 결코 걸리지 않고 사라지는 바람. 어떤 땐 격렬하게, 어떤 땐 상냥하게, 또 어떤 땐 잠시 머물러주는 애교도 발휘했다. 그렇게 상담은 종결로 치달았고 거의 로빈슨 크루소의 프라이데이 모드로 변신하기 직전 그녀에게서 뜻밖의 말을 들었다.
날 분해하는 남자에 염증과 혐오 느껴
“선생님, 고맙습니다. 전 선생님을 이용했어요. 전 온전한 수용을 받고 싶었어요. 남자들은 날 좋아한다, 사랑한다 하면서 저의 일거수일투족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했죠. 어쩌면 그들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닌, 나를 가지고 해부놀이를 했는지도 몰라요. 자르고 부수고 들여다보고 파헤치고, 내장에서 피가 철철 나도록 가르고 또 가르고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 했죠.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는 남자들에게 점점 염증과 혐오를 느꼈어요. 사랑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냥 존재 자체로 수용받는 그런 느낌. 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있는 게 중요한 그런 거요. 아무리 내가 상대를 이해할 수 없어도 상대니까 괜찮은 것, 아니 그저 좋은 것. 분해하는 남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분해를 마치면, 아니 분해가 안 되면 나가떨어졌어요. 전 그런 그들을 보며 경멸의 웃음을 지었죠. 이번엔 조금 오래갔네 하면서요. 이젠 됐어요. 선생님과의 경험은 제게 이 지구에도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줬거든요.”
그녀의 눈부신 미소 뒤에 숨은 쓸쓸하고 가슴 아픈 한 편의 일기를 훔쳐본 듯해 나는 눈길을 돌렸다. 그게 내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