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진한 설윤석 대한전선 사장
설 사장은 직원들에게 보낸 공지문에서 “선대부터 일궈온 회사를 포기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며 “제가 떠나도 임직원 여러분이 마음을 다잡고 지금까지 보여준 역량과 능력을 다시 한 번 발휘해달라”고 당부했다.
하나은행 등 채권단이 사의를 반려하지 않아 설 사장의 퇴임은 번복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설 사장 어머니인 양귀애 여사는 그룹 명예회장 자리에서 물러나 인송문화재단과 2대 회장의 이름을 따서 세운 설원량문화재단의 이사장만 맡고 있다. 설 사장의 동생 윤성 씨는 그룹에 직책이 없다. 설 사장 등 오너일가는 지분을 여전히 갖고 있지만 대부분 채권단에 담보로 잡힌 상황이어서 소유권이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이로써 대한전선을 3대(代)째 경영해온 창업자 가문은 완전히 대한전선을 떠나게 됐다.
1955년 국내 최초 전선업체로 설립된 대한전선은 50년대까지만 해도 재계 4위의 한국 대표기업이었다. 70년대까지도 재계 10위에 들었다. LG전자, 삼성전자와 가전시장을 다퉜던 대한전선은 비록 재계 서열은 점점 내려갔지만 몇 년 전까지도 소문난 알짜기업으로 인정받았다.
전선에서 번 돈 전자사업에 투자
B2B(Business to Business·기업과 기업 간 거래) 기업이라 굳이 일반인에게 이름을 알릴 필요가 없다며 서울 회현동 본사 건물에 간판도 달지 않을 만큼 보수적인 경영 DNA를 가진 기업, 설립 후 53년간 단 한 해도 적자를 내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기업, 풍부한 현금을 바탕으로 1998년 외환위기 때도 흔들리지 않은 알짜 기업. 그런 대한전선이 2000년대 후반 왜 갑자기 무너졌을까.
대한전선 임직원들은 이 질문에 “설 사장의 아버지인 설원량 전 회장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이후 전권을 쥔 전문경영인의 부실경영 탓”이라고 답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대한전선의 핵심 사업인 전선사업은 꾸준한 현금 창출원이다. 회사 설립 후 지금까지 LG전선(현 LS전선)과 시장을 양분하는 구도를 지켜왔다. 대한전선의 시장점유율은 약 25%로 LS그룹 계열 전선 기업군(LS전선, JS전선 등)에 이어 2위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전선사업은 성장 속도가 느렸다.
대한전선은 전선에서 번 돈으로 1968년 가전과 반도체, 전화교환기 등 전자사업에 과감히 투자한다. 하지만 삼성과 LG에 밀리자 83년 사업을 대우그룹에 매각하고 과감하게 철수 결정을 내렸다. 이 사업은 이후 대우전자(현 동부대우전자)의 모체가 된다.
1990년대 초엔 알루미늄 열연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기술개발에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자 99년 캐나다 회사와 합작법인을 만드는 방식으로 알루미늄사업부를 떼어냈다.
신(新)사업을 찾아 헤맨 끝에 대한전선은 2000년대 들어 과감하게 방향을 전환한다. 미국의 전설적인 투자자인 워런 버핏이 이끄는 투자회사 버크셔해서웨이를 벤치마킹한 것. 설원량 전 회장은 “투자는 하지만 경영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투자철학을 내세우며 사업 지주회사를 중심으로 뭉쳐 브랜드를 공유하는 ‘한국판 버크셔해서웨이’를 그룹의 새로운 모델로 내세웠다. 이후 국내 대기업에서 보기 어려웠던 사업 다각화 전략을 공격적으로 추진한다. 2002년 무주리조트를 인수한 뒤 속옷회사 쌍방울을 접수했다. 법정관리 중이던 소주회사 진로 인수전에도 뛰어들었다.
과감한 방향 전환이 본격화되는 시점에 대한전선은 뜻밖의 사태를 맞는다. 공격적인 경영전략을 진두지휘하던 62세의 설원량 회장이 수영을 하다 뇌출혈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것.
설 전 회장의 사망으로 부인인 양귀애 여사가 고문 자리를 맡으며 회사를 경영했다. 한국 신발 수출의 신화인 국제그룹 양태진 창업주의 막내딸로, 서울대 음대를 피아노 전공으로 졸업한 뒤 35년간 주부로만 살던 그였다.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던 설윤석 사장도 유학을 포기한 채 과장으로 입사해 경영에 참여했다.
설 전 회장의 비서실장 출신으로 회사 경영을 이어받은 임종욱 부회장이 사실상 그룹 경영을 도맡다시피 했다. 임 부회장은 입사 후 재무 분야에서 오래 일해 회사 안살림을 꿰차고 있었다. 임 부회장은 2002년 대한전선 대표를 맡은 뒤 서울 남부터미널 땅, 대경기계, 남광토건, 온세텔레콤을 인수하는 등 수조 원대 인수합병(M·A)을 거침없이 결정했다.
하지만 무리한 투자로 곳간이 비기 시작했다. 급기야 여기저기서 ‘빚잔치’를 벌여 차입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2005년 7700억 원이던 부채는 2008년 2조5100억 원으로 늘어났다. 이 과정에서 무모한 투자를 이끌었던 임 부회장은 회사 돈을 몰래 빼돌렸다. 자신의 지인이 빌린 돈을 대한전선 지주사인 삼양금속이 지급보증하도록 하는 것은 물론, 그룹 자금을 이용해 지인에게 돈을 대출했다. 이런 식으로 회사에 149억 원의 손해를 끼쳤다. 임 부회장은 회사 고발로 구속됐고, 지난해 11월 1심과 올해 5월 2심에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배임 혐의로 각각 징역 4년과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임 부회장이 상고해 재판이 진행 중이다.
설 전 회장이 가장 믿었던 전문경영인이 믿음을 저버린 데 대해 대한전선 직원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재판부는 “회사의 신임을 저버리고 회사의 이익보다 자신이나 사업 파트너의 이익을 앞세워 회사자금을 운영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룹 전체를 운영하는 임무의 중대함을 고려할 때 실형 선고가 타당하다”고 밝혔다.
설씨 가문 품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자 대한전선이 가지고 있던 부동산과 증권의 가치가 급락하면서 유동성 위기가 찾아왔다. 이듬해인 2009년 대한전선은 설립 후 첫 적자를 기록한다. 2799억 원의 순손실. 회사는 이때부터 주채권 은행인 하나은행과 재무구조 개선 약정을 맺고 3조 원 가까운 자산을 매각하며 구조조정을 진행해왔다.
양귀애 명예회장은 설윤석 사장을 입사 7년 만에 부회장으로 승진시키며 경영 전권을 쥐어줬다. 29세, 재계 최연소 부회장이었다. 젊은 나이에 무거운 짐을 진 설 사장은 말 그대로 팔 수 있는 자산은 모조리 팔며 회생에 나섰다. 무주리조트, 온세텔레콤, 노벨리스코리아, 시흥 공장토지 등 계열사와 자산을 매각했다.
2011년엔 그룹의 새 비전을 선포하고 충남 당진에 전선공장을 세우는 등 재도약을 다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룹을 살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설 사장은 부회장에서 스스로 사장으로 내려앉았다. 대한전선의 부채는 여전히 1조4000억 원가량 남았다.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내는 상황에서 자본 완전잠식 위기가 다가오자 스스로 퇴임을 결심한 것이다.
대한전선은 다시 설씨 가문 품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대한전선은 설윤석, 윤성 형제→대청기업→큐씨피6호 사모펀드→대한광통신→대한전선의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설윤석, 윤성 형제는 대청기업 지분을 각각 50%씩 소유하고 있다. 이 회사는 큐씨피6호의 지분 34.9%를 갖고 있으며, 큐씨피6호는 다시 대한광통신 지분 38.4%를 갖고 있다. 대한광통신은 대한전선의 지분 11.4%를 가진 최대주주다.
설씨 가족이 직접 소유한 대한전선과 대한광통신 등의 지분은 모두 담보로 잡혔지만 대청기업과 사모펀드 지분은 여전히 남아 있다. 설 사장과 대청기업은 큐씨피6호의 대한광통신 지분 절반을 되살 수 있는 콜옵션도 지녔다. 이에 따라 지분을 다시 사들여 재기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그러나 설 사장이 대한전선 지분 외에 가진 자산이 많지 않고 대청기업의 현금창출 능력이 떨어지는 점도 걸림돌이다. 설 사장과 대청기업이 가진 큐씨피6호의 지분도 후순위이기 때문에 펀드가 손실이 나면 빈손이 된다. 또 대한전선 회생 과정에서 주채권 은행이 채권을 주식으로 전환하는 출자전환과 감자를 단행하면 사모펀드의 지분이 희석되기 때문에 이 같은 회생 시나리오는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대한전선 충남 당진공장. 멀리 보이는 유리 건물이 초고압 타워다. 전력케이블 완제품을 감는 드럼 1000여 개가 공터에 늘어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