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태원동 경리단길 수제맥줏집에서 파는 에일 맥주와 피자. 이곳의 맥주 안주는 피자뿐이다.
음식 문화의 탄생을 이렇게 확연히 볼 수 있는 것은 즐겁고 놀라운 일이다. 한국인은 맥주 하면 노란색이 감돌면서 탄산이 가득한, 청량감 높은 음료수 같은 라거(Lager) 맥주만 떠올리고 또 먹어왔다. 라거는 맥주의 한 종류일 뿐이다.
라거와 가장 큰 축을 이루는 맥주는 에일(Ale)이다. 라거가 하면발효(下面醱酵) 기법으로 오랫동안 발효되면서 당분을 효모군이 거의 먹어치우는 탓에 탄산이 많이 생성되는 것과 달리, 에일 맥주는 상면발효(上面醱酵) 기법으로 2~3일 짧게 발효시킨다. 이렇게 만든 에일 맥주는 라거 맥주의 특징인 탄산이 주는 청량감 대신 깊은 향과 진한 맛을 낸다.
크래프트비어길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크래프트웍스(Craftworks)’의 주인은 캐나다인이다. 2010년 한국의 획일화된 맥주 대신 고향에서 먹던 다양한 맥주를 직접 만들어보고자 시작한 일이다. 이곳에서는 수제맥주 8종류를 판매하는데, 이름이 ‘지리산 반달곰 인디언 페일 에일(IPA)’처럼 다국적이다. 요즘 가장 인기가 좋은 가게 ‘맥파이(Magpie)’에서는 초콜릿 향이 강한 페일 에일(Pale Ale)을 판다. 역시 캐나다인 등이 중심이 돼 창업한 곳이다.
그 가게 옆에 ‘한국 맥주가 북한 대동강맥주보다 맛없다’는 기사를 써 큰 반향을 일으켰던 영국 ‘이코노미스트’ 특파원 다니엘 튜더가 만든 ‘더 부스(THE BOOTH)’가 있다. 강한 에일 맥주인 인디언 페일 에일 맥주가 이 집의 특징이다. 한국인은 치킨을 맥주 안주로 즐기지만 이곳 맥줏집들은 피자를 안주로 내놓는다. 다른 안주는 아예 없다.
에일 맥주는 호프의 쓴맛을 강조한다. 맥주로 유명한 독일에는 ‘맥주순수령’이란 제도가 있다. 맥주는 오직 물과 맥아(몰트), 홉과 효모로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맥주는 쌀과 옥수수는 물론, 너무 많은 것이 섞인다. 맥주의 기본 중 기본인 맥아 양도 이웃 일본은 66.7% 이상으로 돼 있지만 한국은 10%다. 싹이 튼 보리인 맥아를 여러 방법으로 볶고 섞어야 맥주의 다양한 맛과 향이 나오는데, 한국 맥주에는 맥아 자체가 너무 적게 들어간다. 그리고 맥주 특유의 쓴맛을 내는 홉의 양 역시 민망할 정도로 적다.
일률적인 맥주 맛에 대한 소비자의 변화 욕구와 더불어 2010년과 2013년 주세법이 개정되면서 수제맥주가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 마련된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내년부터는 수제맥주의 외부유통이 가능하다. 수제맥주는 물론 중간 규모의 지역 맥주 생산도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강원도에 ‘세븐브로이’라는 에일 맥주 제조공장이 생겼고, 제주에선 ‘제스피’ 맥주가 생산을 시작했다. 하이트맥주도 대형맥주 회사로는 처음으로 ‘퀸즈에일’이라는 에일 맥주를 판매한다. 불과 몇 년 사이 벌어진 일들이고 더 많은 자본과 개인이 속속 참여하고 있다.
맥주에 대한 거대한 변화의 상징 같은 크래프트비어길에서 시작된 수제맥주 실험은 ‘해피엔딩’으로 끝맺을 공산이 매우 높다. 사람들 입맛이 이젠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