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이 5월 11일 서울 부암동 하림각에서 기자회견을 한 후 입을 굳게 다문 채 회견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그러나 ‘윤창중 사태’는 예고된 참사라는 지적이 많다. 성추행 사건의 1차 책임은 윤 전 대변인 개인에게 있지만, 그동안 청와대 인사시스템 문제와 위계질서 문란 등으로 여러 차례 ‘경고음’이 켜졌다는 것이다.
먼저 윤창중 사태의 주원인은 윤 전 대변인의 평소 자질과 인성 문제로 보인다. 박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그를 ‘1호 인사’로 당선인 대변인에 임명했을 때 그를 아는 많은 인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 대변인으로 바뀐 이후 인수위 주요 인선을 발표할 때마다 밀봉된 봉투를 직접 뜯는 장면을 연출해 ‘밀봉인사’ ‘불통인사’ 논란의 주역이 됐다. 공식 브리핑 외에는 어떤 취재도 허용하지 않아 ‘불통 인수위’ 이미지를 만들었고, “낙종도 특종도 없는 인수위를 만들겠다” “언론이 특종을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면 결국은 오보로 끝난다” 같은 ‘갑(甲) 행세’를 했다는 게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한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윤 전 대변인의 기행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평소 자질과 人性에 문제점
“좋게 말해 자신감이지만, 윤 전 대변인은 자신이 ‘1호 인사’인 만큼 평소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많았다. 여기에 대변인으로서 대통령 주재 회의에 배석하고 행사를 수행하다 보니 당과 정부 인사들이 그에게 박 대통령의 의중을 묻기도 했다. 일종의 ‘문고리 권력’을 향유하다 보니 ‘핵심 인사’가 된 줄 착각한 것 같다. 여기에 홍보수석실의 위계질서 문란도 한몫했다고 본다. 이른바 ‘실세’에게는 깍듯했지만 이남기 홍보수석과는 썩 사이가 좋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홍보수석의 조직 장악력도 문제였다. 이런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사고’를 친 것 같다.”
그의 말처럼 대통령홍보수석실은 그동안 윤 전 대변인과 김행 대변인이 대통령 수행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등 잦은 불협화음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 경우 상관인 이 홍보수석이 나서야 했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게 청와대 관계자의 증언이다.
윤 전 대변인과 이 홍보수석이 성추문 사건으로 볼썽사나운 진실공방을 벌이는 것을 두고 청와대 출입기자 사이에서 애초부터 “이남기-윤창중 조합은 손발이 안 맞는 ‘물과 기름의 조합’”이라는 말이 나온 까닭도 이 때문이다. 직급으로 따지면 홍보수석은 차관급, 대변인은 1급으로 홍보수석의 지휘를 받는다. 홍보수석은 홍보기획비서관, 대변인, 국정홍보비서관, 춘추관장을 지휘한다.
하지만 이 홍보수석은 방송인(SBS) 출신이고 윤 전 대변인은 주로 신문사에서 일한 데다, 이 홍보수석은 역대 홍보수석과 달리 기자들과 스킨십이 거의 없는 온화한 가톨릭 신자인 데 반해, 윤 전 대변인은 급한 성격의 극우 논객인 만큼 처음부터 ‘코드’가 맞지 않았다는 분석이다. 이에 대해 또 다른 청와대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실 남녀 투톱 대변인 체제는 마찰을 빚게 마련이다. 이 홍보수석은 두 대변인이 다투거나 신경전을 벌이면 ‘화해하라’며 손을 맞잡게 하는 정도지, 잘잘못을 따져 일벌백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위계질서가 생기겠나. 이 홍보수석은 PD 출신이고 보도보다 제작과 기획업무를 주로 해서인지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기자들과 스킨십도 떨어져 ‘홍보수석이 전화가 안 된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기자들도 있었다. 이번 방미 기간에도 프레스센터 현장 점검 때 딱 3번 봤다. 나머지는 대통령 일정을 수행하거나 혼자 시간을 보낸 걸로 안다. 그러니 윤 전 대변인이 야간에 단독 행동을 한 것 아니겠나. 보통 해외 순방 중 술을 마실 때는 대통령이 ‘나는 다음 날 쉴 테니 청와대 직원들도 쉬어라’고 할 때나 가능하다. 대통령이나 홍보수석이 언제 부를지 모르는 상황인데 그렇게 만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것은 정말 ‘통뼈’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다.”
성격과 코드가 맞지 않은 두 인사를 섞어놓다 보니 ‘사고’가 났다는 지적. 여기에 홍보수석실은 안이한 현실 인식과 대응으로 문제를 더 키웠다는 비판을 받는다. 전광삼 청와대 선임행정관은 5월 8일 오전 여성 인턴 직원의 신고 사실을 전해 듣고 윤 전 대변인에게 “귀국 여부를 스스로 판단하라”고 했고, 이 홍보수석은 자신이 보고받은 지 25시간 뒤에야 박 대통령에게 사안을 보고했다. 이 과정에서 윤 전 대변인은 “이 홍보수석이 ‘성희롱은 변명해봐야 납득이 안 되니 워싱턴을 떠나라’고 지시해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귀국 종용과 사법 방해 논란을 점화했다. 불을 꺼야 할 홍보라인이 오히려 불을 지핀 것이다.
이 홍보수석의 ‘국민과 대통령께 사과드린다’는 내용의 사과 발표 과정도 석연치 않다. 5월 10일 오후 방미단이 귀국하고 청와대에선 허태열 비서실장 주재로 긴급 대책회의가 열렸으며, 토론 끝에 “비서실장이 사과문을 발표하자”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이 홍보수석은 기자실에서 ‘국민과 박 대통령에게 사과한다’는 사과문을 발표하고 있었다. 이어지는 청와대 관계자의 설명.
대통령 위한 ‘셀프 사과’에 급급
박근혜 대통령은 5월 15일 언론사 정치부장단 만찬에서 “인사 시스템을 더 강화해 상시 검증 체제로 바꿔나가겠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국가적 관심 사안에 대해 비서실장과 상의 없이 발표한 것도 문제이지만, 사과 수위와 문구를 조율해놓고 ‘대통령께 사과’ 발언이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일자 발뺌한다는 해석도 나온다. 어쨌든 청와대 고위공직자의 성추행 의혹에 분노한 국민과 재외동포 앞에 내놓은 첫 조치가 대통령 심기를 살피는 ‘셀프 사과’였다는 것은 국민보다 대통령을 바라보는 공직자라는 인상을 줬다.
이에 대해 박 대통령 역시 5월 15일 언론사 정치부장단 만찬에서 “전문성을 보고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인물이 한 번 맡아보면 어떻겠느냐 해서 절차를 밟았는데도 엉뚱한 결과가 나왔다. 그럴 때는 참, 나 자신도 굉장히 실망스럽고 ‘그런 인물이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토로했다. 인사문제에 대해 사실상 사과한 것인데, 그동안 ‘수첩인사’ ‘밀봉인사’로 대변되는 폐쇄적 인사스타일로 인한 책임은 박 대통령 몫이다. 이미 국가 품격이 땅에 떨어지고 국민에게 깊은 허탈감을 안겨준 점을 감안한다면 박 대통령의 인사철학과 스타일을 확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