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7일 오후(현지시간) 박근혜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첫 정상회담 후 백악관 기자회견장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5월 7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기자회견장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밝힌 말이다. ‘흔들림 없는 원칙과 기조’를 강조한 이 발언을 두고 국내외 언론은 확고한 대북 정책공조를 재확인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북한이 지금 같은 태도와 행동을 이어간다면 섣부른 보상으로 평양을 달래려는 시도는 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 긋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미국은 ‘원칙과 기조’의 화신이었을까. 오바마 대통령의 말은 충분히 신뢰할 만한 것일까.
현재 시점에서 복기해보면
잠시 시계를 돌려보자. 2012년 4월 7일 새벽 6시 40분,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북한으로 향하는 보잉737 한 대가 한국 측 중앙방공통제소 레이더에 포착됐다. 괌을 출발한 이 미 국방부 소속 특별기는 평양 순안공항이 최종 목적지였고, 조종사는 영공 통과를 승인해달라고 우리 측에 요청했다. 사전통보를 받지 못했던 청와대 위기관리실에는 비상이 걸렸다. 이 특별기가 휴전선을 넘으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주한미국대사관에 확인을 요청했다. 답변은 “우리가 확인해줄 사안이 아니다”라는 것. 오전 8시 평양에 도착한 특별기는 당일 저녁 북한에서 나왔다.
이후 외신을 통해 전해진 바에 따르면, 이 특별기를 타고 평양을 찾은 사람은 시드니 사일러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북한 담당관과 조지프 디트라니 전 국가정보국(DNI) 국가비확산센터소장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중앙정보국(CIA)에서 오랜 기간 북한 문제를 다뤄온 베테랑들이다. 디트라니는 1974년 CIA에 들어간 이래 정보요원으로 일하다 2003년 국무부로 자리를 옮겼고 지난해까지 국가정보국 국가비확산센터를 맡았다. 사일러 역시 30년 이상 정보당국에서 일했으며, 2011년 오마바 행정부 NSC로 자리를 옮겼다. 미국 정보기관이 자랑하는 최고의 북한 전문가 두 사람이 이 특별기에 탑승했던 것이다.
방북은 8월에도 다시 한 번 이뤄졌다. 유사한 경로, 유사한 형식이었고, 디트라니는 불분명하지만 사일러는 이때도 탑승했다는 게 정설이다. 8월 18일부터 20일까지 진행된 체류일정은 4월 방북 때보다 훨씬 길었다. 반면 현재까지 백악관과 국무부, 국방부, CIA와 DNI를 포함한 미국의 어느 기관도 이에 관한 사실 확인을 거부하고 있다. 당사자로 지목된 디트라니는 2월 한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말하기 싫은 것이 있는데 바로 이 문제가 그렇다”며 “내가 언급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4월 방북은 파업 중이던 KBS 새 노조가 만들던 ‘리셋 KBS 뉴스9’이, 8월 방북은 ‘동아일보’가 각각 특종 보도한 바 있다. 4월의 경우 북한의 은하3호 로켓 첫 발사가 임박한 시점이었고, 8월은 추가 발사 여부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던 무렵이다. 당시만 해도 상황 악화를 막으려고 워싱턴이 분주히 움직인다는 신호 정도로 읽을 수 있었던 이들 소식은 ‘흥미로운 뉴스’에 가까웠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이후 최근까지 평양이 이어온 강경 행보를 이에 대입해보면 그림은 완전히 달라진다. 현재 시점에서 재구성한 당시의 사건은 생각보다 훨씬 ‘결정적인 국면’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시드니 사일러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북한 담당관.
현재 시점에서 이를 되돌아볼 때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도대체 왜 갔을까’다. 최근 미국 의회 청문회나 언론 인터뷰를 통해 당시 방북한 관계자들이 내비치는 바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이후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의 의사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정보당국 내부에 외국유학 경험을 가진 김 제1비서가 아버지보다 덜 강경하게 움직이리라는 견해가 있었고, 이를 구체적으로 따져보려고 직접 접촉을 기획한 것이라는 뉘앙스다. 물론 이러한 낙관적 기대는 12월 이후 평양의 초강경 행보가 계속되면서 완전히 뒤집혔다고 이들은 덧붙인다.
평양이 로켓 발사를 미룬 이유
그러나 그게 전부일까. 이런 설명으로 해결되지 않는 첫 번째 퍼즐은 당시 사일러 담당관 신분이 대통령을 직접 보좌하는 NSC 소속이었다는 점이다. 북한 문제에 대해 오바마 대통령에게 가장 직접적인 발언권을 가진 인물이었다. 더욱이 이때는 재선을 노리는 오바마 행정부의 대통령선거 일정이 한창이던 시기. 당시 방북이 대선 전까지의 상황관리를 위한 것 아니었겠느냐는 가설이 힘을 얻는 이유다. 이 경우 선거가 석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뤄진 8월 방북에 더욱 눈길이 간다.
한층 공교로운 것은 이후 평양이 실제로 11월 초 미국 대선 때까지 로켓 발사를 미뤘다는 사실이다. 4월 은하3호의 1차 발사가 실패로 돌아간 뒤 평양이 조만간 추가 발사를 진행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지만, 평양은 미국 대선이 끝나고 일주일이 지난 11월 15일에야 2차 발사를 공식화했고, 12월 12일 이를 감행했다. 미국 국내 정치 일정과 고스란히 맞아떨어지는 행보였다.
미국이 최고 수준의 보안을 유지하던 당시 방북에 대해 평양이 우회적으로 언급하며 압박을 가한 징후도 있다. 대선이 한창이던 10월 9일 ‘조선중앙통신’은 국방위원회 성명을 인용해 “최근 우리와 공식 및 비공식 석상에서 만난 바 있는 미 NSC와 CIA의 중진 정책작성자들도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 정책은 없다고 했다”고 언급한다. 4월 방북과 관련해서도 북측은 5월 들어 “우리는 미국 측에 그들이 제기한 우려사항도 고려하여 (중략) 실지 행동은 자제하고 있다는 것을 수주일 전에 통지했다”는 외교부 대변인 담화를 발표한 바 있다.
평양의 이러한 우회적 언급은 당시 북미 비밀접촉이 단순히 ‘정보파악용’만은 아니었음을 내비친다. ‘당신들이 와서 자제해달라고 하기에 우리가 최대한 배려해주지 않았느냐, 그때 적대시 정책은 없다고까지 말하지 않았느냐’는 은근한 압박이다. 이러한 관측은 당시 미국 측 인사들이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 등 핵심 실세들과 만났다는 최근 워싱턴 소식통들의 전언을 감안하면 개연성이 더 높아진다. ‘대선까지 로켓 발사를 자제해달라, 그러면 재선 이후 훨씬 광범위한 북미 협상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했거나, 최소한 그런 뉘앙스를 비쳤을 것이라는 해석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이 무렵 밋 롬니 공화당 대선후보와의 지지율 격차가 1~2%에 불과하던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았다. 선거가 임박한 시점에 평양이 추가 로켓 발사 등을 감행할 경우 뜻하지 않은 악재가 될 만한 상황이었다. 이런 시기에 대통령의 최측근 북한 전문가와 정보부처 베테랑이 함께 북한의 고위관계자들을 만났다는 사실은 방북 목적과 관련해 다른 해석을 어렵게 만든다. 북측이 8월의 접촉 사실을 은근히 내비쳤던 10월 초순은 공교롭게도 롬니 지지율이 오바마를 추월한 시점이다.
‘미국도 했는데 우리라고…’
현재 시점에서 돌아볼 때 당시 미국 측 행보가 남긴 후과는 가볍지 않다. 먼저 평양은 2월 3차 핵실험과 강도 높은 대남·대미 강경책으로 기선을 제압해나갔다. 평양으로서는 비밀접촉에서 오간 말들을 빌미 삼아 미국이 군사공격 같은 최고수위의 대응에 나설 수 없으리라는 자신감을 가졌을 법하다. ‘우리가 부탁을 들어줬으니, 세게 나가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는 심리적 우위다. 이른바 미국의 ‘레드라인’을 한 발짝 뒤로 밀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고, 최종목표인 핵 보유에 그만큼 가까워진 셈이다.
12월 추가 로켓 발사 이후 워싱턴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논의를 주도한 것에 대해 일종의 배신감을 느낀 것 아니냐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미뤄달라고 해서 미뤄줬더니 이렇게까지 문제를 삼느냐’는 심리적 반발이다. 이어진 3차 핵실험이나 대미 초강경 행보에 이러한 정서가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는 시각도 가능하다. 대선 이전과 이후 극명하게 갈린 미국 측 태도에 대한 평양 나름의 대답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경우든 당시 워싱턴의 대북 비밀접촉은 이후 평양이 ‘마음먹은 길’을 가는 데 상당한 빌미를 줬다는 결론이 나온다. 특히 이러한 상황 악화가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었음을 감안하면, 오바마 행정부는 재선이라는 국내 정치적 이익을 위해 북핵문제 악화를 방조하는 거래를 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진다. 겉으로는 끊임없이 ‘원칙과 기조’를 강조하지만, 무대 뒤에서 이뤄지는 워싱턴의 행보는 이와 사뭇 거리가 있음을 보여준다고 일부 전문가는 비판한다. 이쯤 되면 디트라니가 당시의 접촉을 ‘돌이키기 싫은 기억’이라고 회고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가늠할 만하다.
북한의 태도 역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평양은 앞서 본 것처럼 비밀접촉을 암시하며 압박하면서도, 이를 공개적으로 미국을 비판하는 데 활용하지는 않았다. 수개월간 ‘워싱턴 불바다’ 같은 초강경 발언을 쏟아내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미국과 맺은 ‘비밀 유지 약속’을 그 나름대로 준수해온 셈이다. 겉으로는 연일 충격적인 말들로 미국을 비난하지만, 속으로는 워싱턴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 관리하는 이중적 태도다.
한 전직 안보당국 고위 관계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많은 일이 벌어진다. 미국과 북한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워싱턴 당국자들의 방북은) 보이지 않는 수백 개 조각 가운데 단 두 개가 알려진 것뿐”이라고 말했다. 목숨을 노리는 원수인 척하면서도 뒤편에서는 이익을 위한 거래를 마다 않는 국제정치의 차가운 민낯이다.
다시 시계를 돌려 현재로 돌아와보자. 5월 14일 일본의 이지마 이사오 특명담당 내각관방 참여(총리 자문역)가 평양을 찾았다. 이튿날 그가 김영일 조선노동당 국제비서를 면담하는 동안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김정은과 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지마 참여는 고이즈미 내각 당시 총리 비서관을 담당하며 2002년과 2004년 북·일 정상회담에 관여한 인물이다.
이날 한국 외교부 당국자들은 “잇단 우경화 행보로 고립 위기에 빠진 아베 총리가 이를 타개하려고 대북 정책공조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 아니냐”며 격한 반응을 쏟아냈다. 일본은 오는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고, 아베 총리는 이 선거에서 승리해 개헌 가능 의석 수를 확보하겠다는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국책연구기관 전문가는 “지난해 미국 측이 일본에 알리지 않고 평양을 찾았던 배신감의 발로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도 했는데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 역사의 공교로운 반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