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4일 프로농구 서울 삼성 썬더스의 코치로 선임된 뒤 5월 7일 귀국한 ‘영원한 오빠’ 이상민(40). 구단 지원으로 미국 뉴저지에서 2년간 연수한 그는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한다. 12년간 프로농구 선수로 지내며 가족에게 소홀했다는 그에게 연수기간은 오로지 가족과 함께한 소중한 시간이었던 것. 팀의 코치로 돌아온 그를 5월 22일 경기 용인시에 있는 삼성 트레이닝센터에서 만났다.
▼ 코치로 첫발을 내디뎠는데, 소감은.
“지금은 배우는 단계다. 선수들과 감독 사이의 가교 구실에 충실하려 한다. 선수 중에는 함께 코트에서 뛰었던 동생들도 있어 코치인 나를 특별히 어려워하거나 불편해하진 않는다. 감독이 내게 요구하는 것은 운동 중에 잘못된 점을 바로바로 지적해주는 것이다. 2년 사이에 팀 구성이 많이 바뀌어 현재는 팀 분위기를 파악하는 중이다. 그다음에는 선수 개개인의 장단점을 살펴야 하는데, 한두 달은 걸릴 것 같다.”
▼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가족과 어떻게 시간을 보냈나.
“아침에 버스 타고 뉴욕에 있는 어학원에 가서 영어수업을 들었다. 첫 수업에 들어갈 때 얼마나 떨렸는지 모른다. 초등학생 때부터 선수생활을 해서 학교 수업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미국에서의 학교생활이 정말 재밌었다. 공부하면서 모르는 게 있으면 어린 학생들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즐기면서 하는 농구 추구
어학원 수업을 마치면 오후 2시쯤 된다. 그때부터는 두 아이의 아빠로 돌아갔다. 정신없이 바빠지는 것이다(웃음). 초등학교 5학년 딸과 4학년 아들이 있는데, 학교 끝나는 시간에 데리러 가서 점심을 함께 먹곤 했다. 두 아이를 방과후수업에도 데려다줬다. 아들은 방과후수업으로 운동을 선택했는데, 가끔 아들이 농구나 야구 하는 모습을 보러 갔다. 그러다 보면 하루가 끝나 있더라. 그렇게 2년 동안 아빠로서의 생활을 즐겼다. 현지 동생들도 ‘형, 가족이랑 왔으니 봉사하는 마음으로 지내다 돌아가라’고 하더라. 프로생활 12년간 집에도 자주 못 가고 그랬으니 미국에서만큼은 가족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 아들이 아빠를 닮아 운동을 좋아하나.
“운동신경이 있는 것 같다. 미국에서 야구, 검도 등 여러 운동을 같이 해봤는데, 곧잘 하더라. 그중에서 유독 농구를 하고 싶어 한다. 내가 힘든 과정을 겪어본 만큼 그 길을 잘 알기에 농구를 하겠다면 반대할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본인이 원하는 걸 시켜야 한다’고 찬성한다. 아들도 ‘왜 자꾸 다른 걸 시키느냐. 내가 농구를 하겠다는데’ 한다. 그래서 ‘그래? 그럼 일단 한번 해봐라’고 말했다. 아직은 본인이 하고 싶다는 대로 내버려둔다. 내가 가르쳐주려 해도 말을 너무 안 들어서 못 가르치겠다(웃음). 딸은 운동에 전혀 관심 없는데, 아들은 죽어도 운동을 해야겠다고 해서 어떻게 가르칠지를 알아보는 중이다.”
▼ 미국에서는 농구장에 안 갔다고 들었다.
“농구장 빼곤 다 가봤다. 일부러 농구를 잊으려 했던 게 아니라, 농구가 특별히 생각나지 않았다. 야구장에 가고, 미식축구도 보러 가고, 심지어 축구도 봤는데 농구 생각은 안 났다. ‘내가 은퇴했구나’ 하는 생각보다 ‘잠시 공부하러 왔다’고 여겼고, 미국 생활에 적응하느라 바쁘기도 했다.
아들이 농구 수업을 받는 모습을 몇 번 봤다. 초등학교 수업인데도 ‘제대로 가르치는구나’ 하는 걸 느꼈다. 미국 교육시스템이 괜찮더라. 기본기와 룰을 상당히 중요시한다. 연습시간이 따로 정해진 게 아니라, 룰을 지키면서 될 때까지 시킨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5명이 자유투 10개를 넣어라’라고 하면, 학생들은 10개를 넣을 때까지 연습한다. 안 들어가면 바로 인터벌을 두고 또다시 한다. 초등학생이라고 해서 골대 높이를 낮춰주는 것도 아니다. 일반 농구 골대와 똑같은 높이의 정규 ‘링’을 사용한다. 물론 애들이 힘들어하고, 공 던지기도 버거워한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위압감을 주거나 하는 게 전혀 없었다.”
▼ 코치로서 팀에도 그와 같은 시스템을 적용할 생각인가.
“나중에 내가 감독이 될 수 있다면 그땐 선수들이 스스로 즐기면서 농구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그래야 발전이 빠르고 실력도 월등히 향상된다. 내 꿈 가운데 하나가 낮에 잠시 선수들을 낮잠 재우는 것이다(웃음). 사실 점심 먹고 스트레칭하고 나면 무척 졸리다. 선수생활 오래하다 보면 날씨가 좋은 날엔 운동하기도 싫고….”
▼ 농구 인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많은데, 아무래도 고3 때 첫 대회에서 우승한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정기연고전’(1년에 한 번씩 연세대 농구부와 고려대 농구부가 치르는 대회)을 봤는데, 당시 관중의 함성을 잊지 못한다. 유재학 선배가 대학 3, 4학년쯤 됐을 때인데 농구를 정말 잘했고, 그런 농구를 태어나 처음 봤다. 대학에 들어가 뛴 첫 정기연고전과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땄던 때도 기억에 남는다.”
▼ 초등학생 때부터 쭉 농구를 해왔는데, 다른 삶이 욕심나진 않나.
“당연히 욕심난다. 사실 살면서 농구를 관둔다고 마음먹은 적이 딱 한 번 있다. 대학 때였는데, 워낙 중고교 때부터 소풍이나 졸업여행 한 번 못 가보고, 개인 시간을 갖지 못해 대학에 들어가면 즐기면서 농구할 줄 알았다. TV 보면서 대학생활에 환상을 품게 된 건지도 모르지만, 내가 동경하던 대학생활과는 판이했다. 더 엄격하고 규율도 세서 실망했다. 그래서 부모님의 반대를 예상하면서도 처음으로 ‘운동을 관두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오히려 부모님이 ‘어, 그래 힘들면 관둬’라며 너무 쉽게 대답하시더라(웃음). 그래서 나 스스로 ‘좀 더 해보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도 대학 4년 동안 마치 새장에 갇힌 새처럼 농구만 한 것 같다. 강한 규제 아래서 사생활도 없었다. 엠티도 못 가봤다. 연세대 축제가 그렇게 재미있다던데 한 번도 즐기지 못했다. 만일 삶의 한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대학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요즘 대학생을 보면 그런 마음이 더 커진다. 수강신청도 하고 오전엔 평범한 학생처럼 강의를 다 듣고, 오후엔 운동을 하고 싶다.”
다른 삶 있다면 평범히 살고 싶어
▼ 어떤 팬이 이 코치의 농구엔 삶과 성격이 투영됐다고 하던데.
“전혀 아니다(웃음). 평소의 나와 경기에서 뛸 때의 나는 전혀 다르다. 특히 학교 다닐 땐 선배 얼굴도 잘 못 쳐다보고, 선배 대하는 걸 힘들어했다. 그런데 일단 코트에만 들어가면 선배든 아니든 막 소리 지르고 막 시키고 그랬다. 농구에서 가드는 오케스트라로 치면 지휘자니까, 경기 때 팀 전체를 운영해야 하고 대범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코트 밖으로 나오면 카메라만 봐도 긴장하고 말이 안 떨어지더라. 무슨 카메라 알레르기가 있나 보다.”
▼ 앞으로의 목표는.
“지금은 미국에서 처음 영어수업을 들었을 때 떨리던 마음 그대로다. 아직 막내 코치이기 때문에 배워가면서 나만의 색깔을 만들어가려 한다. 우리 팀이 2011~2012시즌 최하위다. 하지만 목표는 우승이다. 지금까지 나는 농구하면서 꼴등을 해본 적이 없다. 이제는 코치로서 팀을 이끄는 데 한몫해 실추된 팀의 명예를 재건하고 싶다.”
▼ 코치로 첫발을 내디뎠는데, 소감은.
“지금은 배우는 단계다. 선수들과 감독 사이의 가교 구실에 충실하려 한다. 선수 중에는 함께 코트에서 뛰었던 동생들도 있어 코치인 나를 특별히 어려워하거나 불편해하진 않는다. 감독이 내게 요구하는 것은 운동 중에 잘못된 점을 바로바로 지적해주는 것이다. 2년 사이에 팀 구성이 많이 바뀌어 현재는 팀 분위기를 파악하는 중이다. 그다음에는 선수 개개인의 장단점을 살펴야 하는데, 한두 달은 걸릴 것 같다.”
▼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가족과 어떻게 시간을 보냈나.
“아침에 버스 타고 뉴욕에 있는 어학원에 가서 영어수업을 들었다. 첫 수업에 들어갈 때 얼마나 떨렸는지 모른다. 초등학생 때부터 선수생활을 해서 학교 수업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미국에서의 학교생활이 정말 재밌었다. 공부하면서 모르는 게 있으면 어린 학생들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즐기면서 하는 농구 추구
어학원 수업을 마치면 오후 2시쯤 된다. 그때부터는 두 아이의 아빠로 돌아갔다. 정신없이 바빠지는 것이다(웃음). 초등학교 5학년 딸과 4학년 아들이 있는데, 학교 끝나는 시간에 데리러 가서 점심을 함께 먹곤 했다. 두 아이를 방과후수업에도 데려다줬다. 아들은 방과후수업으로 운동을 선택했는데, 가끔 아들이 농구나 야구 하는 모습을 보러 갔다. 그러다 보면 하루가 끝나 있더라. 그렇게 2년 동안 아빠로서의 생활을 즐겼다. 현지 동생들도 ‘형, 가족이랑 왔으니 봉사하는 마음으로 지내다 돌아가라’고 하더라. 프로생활 12년간 집에도 자주 못 가고 그랬으니 미국에서만큼은 가족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 아들이 아빠를 닮아 운동을 좋아하나.
“운동신경이 있는 것 같다. 미국에서 야구, 검도 등 여러 운동을 같이 해봤는데, 곧잘 하더라. 그중에서 유독 농구를 하고 싶어 한다. 내가 힘든 과정을 겪어본 만큼 그 길을 잘 알기에 농구를 하겠다면 반대할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본인이 원하는 걸 시켜야 한다’고 찬성한다. 아들도 ‘왜 자꾸 다른 걸 시키느냐. 내가 농구를 하겠다는데’ 한다. 그래서 ‘그래? 그럼 일단 한번 해봐라’고 말했다. 아직은 본인이 하고 싶다는 대로 내버려둔다. 내가 가르쳐주려 해도 말을 너무 안 들어서 못 가르치겠다(웃음). 딸은 운동에 전혀 관심 없는데, 아들은 죽어도 운동을 해야겠다고 해서 어떻게 가르칠지를 알아보는 중이다.”
▼ 미국에서는 농구장에 안 갔다고 들었다.
“농구장 빼곤 다 가봤다. 일부러 농구를 잊으려 했던 게 아니라, 농구가 특별히 생각나지 않았다. 야구장에 가고, 미식축구도 보러 가고, 심지어 축구도 봤는데 농구 생각은 안 났다. ‘내가 은퇴했구나’ 하는 생각보다 ‘잠시 공부하러 왔다’고 여겼고, 미국 생활에 적응하느라 바쁘기도 했다.
아들이 농구 수업을 받는 모습을 몇 번 봤다. 초등학교 수업인데도 ‘제대로 가르치는구나’ 하는 걸 느꼈다. 미국 교육시스템이 괜찮더라. 기본기와 룰을 상당히 중요시한다. 연습시간이 따로 정해진 게 아니라, 룰을 지키면서 될 때까지 시킨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5명이 자유투 10개를 넣어라’라고 하면, 학생들은 10개를 넣을 때까지 연습한다. 안 들어가면 바로 인터벌을 두고 또다시 한다. 초등학생이라고 해서 골대 높이를 낮춰주는 것도 아니다. 일반 농구 골대와 똑같은 높이의 정규 ‘링’을 사용한다. 물론 애들이 힘들어하고, 공 던지기도 버거워한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위압감을 주거나 하는 게 전혀 없었다.”
▼ 코치로서 팀에도 그와 같은 시스템을 적용할 생각인가.
“나중에 내가 감독이 될 수 있다면 그땐 선수들이 스스로 즐기면서 농구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그래야 발전이 빠르고 실력도 월등히 향상된다. 내 꿈 가운데 하나가 낮에 잠시 선수들을 낮잠 재우는 것이다(웃음). 사실 점심 먹고 스트레칭하고 나면 무척 졸리다. 선수생활 오래하다 보면 날씨가 좋은 날엔 운동하기도 싫고….”
▼ 농구 인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많은데, 아무래도 고3 때 첫 대회에서 우승한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정기연고전’(1년에 한 번씩 연세대 농구부와 고려대 농구부가 치르는 대회)을 봤는데, 당시 관중의 함성을 잊지 못한다. 유재학 선배가 대학 3, 4학년쯤 됐을 때인데 농구를 정말 잘했고, 그런 농구를 태어나 처음 봤다. 대학에 들어가 뛴 첫 정기연고전과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땄던 때도 기억에 남는다.”
▼ 초등학생 때부터 쭉 농구를 해왔는데, 다른 삶이 욕심나진 않나.
“당연히 욕심난다. 사실 살면서 농구를 관둔다고 마음먹은 적이 딱 한 번 있다. 대학 때였는데, 워낙 중고교 때부터 소풍이나 졸업여행 한 번 못 가보고, 개인 시간을 갖지 못해 대학에 들어가면 즐기면서 농구할 줄 알았다. TV 보면서 대학생활에 환상을 품게 된 건지도 모르지만, 내가 동경하던 대학생활과는 판이했다. 더 엄격하고 규율도 세서 실망했다. 그래서 부모님의 반대를 예상하면서도 처음으로 ‘운동을 관두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오히려 부모님이 ‘어, 그래 힘들면 관둬’라며 너무 쉽게 대답하시더라(웃음). 그래서 나 스스로 ‘좀 더 해보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도 대학 4년 동안 마치 새장에 갇힌 새처럼 농구만 한 것 같다. 강한 규제 아래서 사생활도 없었다. 엠티도 못 가봤다. 연세대 축제가 그렇게 재미있다던데 한 번도 즐기지 못했다. 만일 삶의 한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대학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요즘 대학생을 보면 그런 마음이 더 커진다. 수강신청도 하고 오전엔 평범한 학생처럼 강의를 다 듣고, 오후엔 운동을 하고 싶다.”
다른 삶 있다면 평범히 살고 싶어
▼ 어떤 팬이 이 코치의 농구엔 삶과 성격이 투영됐다고 하던데.
“전혀 아니다(웃음). 평소의 나와 경기에서 뛸 때의 나는 전혀 다르다. 특히 학교 다닐 땐 선배 얼굴도 잘 못 쳐다보고, 선배 대하는 걸 힘들어했다. 그런데 일단 코트에만 들어가면 선배든 아니든 막 소리 지르고 막 시키고 그랬다. 농구에서 가드는 오케스트라로 치면 지휘자니까, 경기 때 팀 전체를 운영해야 하고 대범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코트 밖으로 나오면 카메라만 봐도 긴장하고 말이 안 떨어지더라. 무슨 카메라 알레르기가 있나 보다.”
▼ 앞으로의 목표는.
“지금은 미국에서 처음 영어수업을 들었을 때 떨리던 마음 그대로다. 아직 막내 코치이기 때문에 배워가면서 나만의 색깔을 만들어가려 한다. 우리 팀이 2011~2012시즌 최하위다. 하지만 목표는 우승이다. 지금까지 나는 농구하면서 꼴등을 해본 적이 없다. 이제는 코치로서 팀을 이끄는 데 한몫해 실추된 팀의 명예를 재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