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외교통상부에서 론 커크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와 대화 중인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왼쪽).
사석에선 형 동생처럼 지내는 이 대리가 방 과장에게 푸념을 늘어놓으며 소주잔을 들이켠다.
“왜, 와이프랑 싸웠어? 무슨 일인데 그래?”
신혼여행에 다녀온 지 일주일 만에 신혼 단꿈이 산산조각 난 모양이다.
다그치는 방 과장에게 하소연을 시작하는 이 대리.
“지난주에 제가 야근이 많았잖아요? 그래서 주말에 좀 쉬려고 누웠는데, 와이프가 ‘설거지 좀 하라’고 깨우는 거예요. 그러면서 앞으로 설거지는 무조건 저보고 하라고….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그래서, 뭐라고 그랬어?”
“무조건 싫다 그랬죠. 제가 자취하면서 죽기만큼 싫었던 게 설거지였는데! 친구들이 ‘초반 기 싸움’에서 밀리면 안 된다고도 하고. 근데 영 찜찜해서….”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렇게 서로 맞춰가면서 사는 거지.”
부부 관계에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느냐며 술친구나 해주고 집으로 돌아온 방 과장. 현관 앞엔 다음 날 아침 내다버려야 할 쓰레기 봉투가 고이 놓여 있다. 언제부터인가 방 과장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 돼버린 그 봉투.
많은 협상가가 실수하는 게 있다. 한 번에 하나의 문제만 처리하려는 것. 가격협상이 끝나야 지불방법을 얘기하고, 그게 마무리돼야 물량을 협상하는 식이다. 이건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다. 긴 협상 과정에서 하나의 어젠다에 묶여 시간을 끄는 것은 낭비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동료와 점심메뉴를 놓고 협상을 한다. 당신은 오랜만에 햄버거가 당긴다. 그런데 동료는 설렁탕이 먹고 싶다고 한다. ‘점심 메뉴’라는 하나의 어젠다로 맞선 상황. 만약 이때 “돈은 누가 낼래?”라는 어젠다를 추가하면 어떨까. 혹은 “내일은 뭘 먹을까”라는 어젠다를 더하면? 이렇게 어젠다를 추가해 협상하면 문제는 쉽게 풀린다.
앞에서 본 이 대리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설거지 문제로 부딪친 부부. 이 대리에게 설거지는 죽기만큼 싫은 일이다. 이 대리가 설거지 말고 다른 어젠다를 붙인다면 어떨까. 청소, 빨래, 밥하기 등 집안일은 많다. 만약 이 대리가 “청소는 내가 할 테니 설거지는 당신이 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면 협상은 전혀 다르게 진행됐을지 모른다.
비즈니스 협상도 원리는 같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4년 있었던 중국 정부와 폭스바겐의 협상. 당시 많은 글로벌 기업이 중국 진출에 눈독을 들였지만 중국 정부가 요구하는 기술 이전 조건에 발목이 잡혀 녹록지 않았다. 하지만 폭스바겐은 중국 정부와 합작 기업을 설립하고 2000년대 초반 중국 자동차 시장의 절반 이상(54%)을 점유하는 성과를 냈다.
비결은 뭘까. 폭스바겐은 중국 정부가 요구하는 기술 이전을 해줬다. 그 대신 ‘중국 정부와 국영 기업의 폭스바겐 자동차 우선적 구입, 다른 외국 자동차 생산업체의 투자 제한, 해외 완성차 수입 시 높은 관세 부과’라는 세 가지 조건을 붙였다. 이 조건만 충족되면 중국 자동차 시장에서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게 폭스바겐의 판단이었다. 중국 정부로선 기술 이전만 된다면 큰 손해가 없었다. 결국 중국 정부와 폭스바겐 모두 만족할 만한 협상 결과가 나왔다.
프로 협상가는 하나의 어젠다에 집착하지 않는다. 새로운 어젠다를 붙여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방식을 찾는다. 창의적 협상의 첫걸음, 바로 어젠다를 늘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