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친구에게
열두 살에 죽은 친구의 글씨체로 편지를 쓴다.
안녕, 친구. 나는 아직도
사람의 모습으로 밥을 먹고
사람의 머리로 생각을 한다.
하지만 오늘은 너에게
나를 빌려주고 싶구나.
냉동실에 삼 년쯤 얼어붙어 있던 웃음으로
웃는 얼굴을 잘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구나.
너만 좋다면
내 목소리로
녹음을 해도 된단다.
내 손이 어색하게 움직여도
너라면 충분히
너의 이야기를 쓸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답장을 써주기를 바란다.
안녕. 친구.
우르르 넘어지는 볼링핀처럼
난 네가 좋다.
― 신해욱, ‘생물성’(문학과지성사, 2009)에서
오늘 나는 너를 다시 떠올리고 싶다
초등학생 때 친구가 죽었다. 이름 모를 병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의 나는 그 병이 무엇인지 안다. 그 병은 이름 모를 병일 때 약간이라도 더 희망적인 병. 십여 년 후, 그 병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병인지 알게 된 나는 또 한 차례 눈물을 펑펑 쏟아야 했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것도, 친구를 죽음으로 이끈 병이라는 것도 그 당시 나에게는 무척이나 아득한 무엇이었다. 감히 입 밖으로 내선 안 되는 어떤 것, 나와는 동떨어진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 같은 것. 알아도 모르는 것, 아니 몰라야 하는 것. 평생 떨어져 있을수록 좋은 것.
짝꿍 없이 남은 학기를 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업시간에 빤히 선생님을 쳐다보고 있어도 나는 옆자리가 허전해 견딜 수 없었다. “아직도/ 사람의 머리로 생각”해야 하는 나 자신이 참을 수 없어서 수업 도중 마렵지도 않은 오줌을 누러 화장실로 향하곤 했다. 수돗물을 콸콸 틀어놓고 거울을 바라보면 그 속에는 도통 나 같지 않은 내가 있었다. 어릴 적 TV에서 보았던, 팔이 하나밖에 없는 악사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구슬프기 짝이 없는 어떤 음들이 귀를 맴돌았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네가 없지만 “사람의 모습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시간이, 오늘도 찾아온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친구는 나에게서 점점 희미해져갔다. 그 친구와 함께 나눴던 대화는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말이 잗다랗게 조각나 허공에 흩뿌려지는 것 같았다. 어느새 내 몸에는 과거 언젠가 그런 친구가 있었다는 어렴풋한 느낌만이 남게 됐다. 그러나 가끔 그 친구의 흔적이 발견될 때면 나는 또다시 우울해졌다. 이상하게도 그 흔적은 즐거운 일이 있을 때마다 거짓말처럼 고개를 들었다. 나는 “삼 년쯤 얼어붙어 있던 웃음”을 해동하려고 아득바득 애를 썼다. 억지로 웃고 나면 어김없이 뒷맛이 썼다. 나는 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악다구니로 버텼다. 그렇게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다섯 번의 졸업을 했다.
오늘 나는 너를 다시 떠올리고 싶다. 그게 ‘문득’이라, ‘오랜만’이라 미안하다. 그 일이 있고 “삼 년”이 여섯 번이나 더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저세상에 가 있는 열다섯 살 소녀의 마음을 읽고 싶다. 너를 마주하고 “우르르 넘어지는 볼링핀처럼” 웃고 싶은 것이다. 벤치에 앉아 낙엽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마냥 웃음이 쏟아지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네가 항상 내 옆에 있어 주던 시절로. 네가 하는 다정한 말이 토씨 하나까지도 가슴에 촘촘히 박히던 시절로. 서로의 “글씨체”를 흉내 내며 깔깔거리던, 연두와 연분홍과 연주황의 시절로. 지금은 모든 게 너무 진하고 탁하고 어두워졌다. 네가 죽고 나서 나를 둘러싼 세계는 이만큼이나 침울해졌다. 네가 없어서, 너 없이 나만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우리’라는 대명사 하나를 잃어버려서.
시인 오은
*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열두 살에 죽은 친구의 글씨체로 편지를 쓴다.
안녕, 친구. 나는 아직도
사람의 모습으로 밥을 먹고
사람의 머리로 생각을 한다.
하지만 오늘은 너에게
나를 빌려주고 싶구나.
냉동실에 삼 년쯤 얼어붙어 있던 웃음으로
웃는 얼굴을 잘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구나.
너만 좋다면
내 목소리로
녹음을 해도 된단다.
내 손이 어색하게 움직여도
너라면 충분히
너의 이야기를 쓸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답장을 써주기를 바란다.
안녕. 친구.
우르르 넘어지는 볼링핀처럼
난 네가 좋다.
― 신해욱, ‘생물성’(문학과지성사, 2009)에서
오늘 나는 너를 다시 떠올리고 싶다
초등학생 때 친구가 죽었다. 이름 모를 병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의 나는 그 병이 무엇인지 안다. 그 병은 이름 모를 병일 때 약간이라도 더 희망적인 병. 십여 년 후, 그 병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병인지 알게 된 나는 또 한 차례 눈물을 펑펑 쏟아야 했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것도, 친구를 죽음으로 이끈 병이라는 것도 그 당시 나에게는 무척이나 아득한 무엇이었다. 감히 입 밖으로 내선 안 되는 어떤 것, 나와는 동떨어진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 같은 것. 알아도 모르는 것, 아니 몰라야 하는 것. 평생 떨어져 있을수록 좋은 것.
짝꿍 없이 남은 학기를 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업시간에 빤히 선생님을 쳐다보고 있어도 나는 옆자리가 허전해 견딜 수 없었다. “아직도/ 사람의 머리로 생각”해야 하는 나 자신이 참을 수 없어서 수업 도중 마렵지도 않은 오줌을 누러 화장실로 향하곤 했다. 수돗물을 콸콸 틀어놓고 거울을 바라보면 그 속에는 도통 나 같지 않은 내가 있었다. 어릴 적 TV에서 보았던, 팔이 하나밖에 없는 악사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구슬프기 짝이 없는 어떤 음들이 귀를 맴돌았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네가 없지만 “사람의 모습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시간이, 오늘도 찾아온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친구는 나에게서 점점 희미해져갔다. 그 친구와 함께 나눴던 대화는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말이 잗다랗게 조각나 허공에 흩뿌려지는 것 같았다. 어느새 내 몸에는 과거 언젠가 그런 친구가 있었다는 어렴풋한 느낌만이 남게 됐다. 그러나 가끔 그 친구의 흔적이 발견될 때면 나는 또다시 우울해졌다. 이상하게도 그 흔적은 즐거운 일이 있을 때마다 거짓말처럼 고개를 들었다. 나는 “삼 년쯤 얼어붙어 있던 웃음”을 해동하려고 아득바득 애를 썼다. 억지로 웃고 나면 어김없이 뒷맛이 썼다. 나는 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악다구니로 버텼다. 그렇게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다섯 번의 졸업을 했다.
오늘 나는 너를 다시 떠올리고 싶다. 그게 ‘문득’이라, ‘오랜만’이라 미안하다. 그 일이 있고 “삼 년”이 여섯 번이나 더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저세상에 가 있는 열다섯 살 소녀의 마음을 읽고 싶다. 너를 마주하고 “우르르 넘어지는 볼링핀처럼” 웃고 싶은 것이다. 벤치에 앉아 낙엽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마냥 웃음이 쏟아지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네가 항상 내 옆에 있어 주던 시절로. 네가 하는 다정한 말이 토씨 하나까지도 가슴에 촘촘히 박히던 시절로. 서로의 “글씨체”를 흉내 내며 깔깔거리던, 연두와 연분홍과 연주황의 시절로. 지금은 모든 게 너무 진하고 탁하고 어두워졌다. 네가 죽고 나서 나를 둘러싼 세계는 이만큼이나 침울해졌다. 네가 없어서, 너 없이 나만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우리’라는 대명사 하나를 잃어버려서.
시인 오은
*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