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당시 의료 수준으로는 치료가 힘들었던 병(늑막염, 급성 폐렴 동반)을 앓고 계셨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상당한 자산가이고, 대학병원에서도 “힘들지만 여기서 돌아가시게 돕겠다”고 했으며, 또 아들들도 반대했지만 할아버지는 굳이 “집에 가서 죽겠다”며 고집하셨다고 한다. 그러고는 하나씩 하나씩 주변을 정리해나가셨다. 과수원, 문집들, 문중의 일들, 자식과 손자에게 하고 싶은 말, 자신의 삶을 정리한 일기까지 남기셨다. 나는 불혹의 나이에 이를 때까지 할아버지가 왜 그토록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셨는지 납득하지 못했다.
![“집에 가서 죽겠다”](https://dimg.donga.com/egc/CDB/WEEKLY/Article/20/09/05/29/200905290500026_1.jpg)
삶의 시작은 부모의 뜻에 따라 결정됐지만, 적어도 죽어가는 과정과 죽음의 순간만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법원은 오늘날의 인권이 거기에 도달했다는 데 동의했다. 프랑스에는 ‘생명의 마지막에 관한 법률’이라는, 그 이름도 아름다운 존엄사 관련 법률이 있다. 이제 우리도 87.5%의 국민 동의(서울대 병원 조사)에 따라 존엄사 법을 따로 준비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