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 · 제이미 챙]
1982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 변두리 아파트에서 세 살 된 딸을 키우며 살아가는 평범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조만간 영미권에도 소개될 예정이다. 내년 2월 영국 사이먼앤슈스터 출판사에서, 4월 미국 노턴 출판사에서 ‘Kim Jiyoung, Born 1982’가 출간된다. 사이먼앤슈스터는 예약 판매를 위해 영국 아마존(amazon.co.uk)에 미리 올린 책 소개에서 ‘독창적이면서 타협하지 않는 이 책은 한강의 ‘채식주의자’ 이후 가장 중요한 한국 소설’이라고 평가했다.
열심히 사는데, ‘벌레’로 비치는 삶
‘82년생 김지영’ 미국판(왼쪽)과 영국판 표지.
김지영과 동갑내기인 한국인이지만 동시에 어려서부터 해외 생활을 오래한 외부인이고, 김지영과 같은 여성이지만 이성결혼을 하지 않은 번역가가 읽은 ‘82년생 김지영’은 어떤 소설일까. 그리고 한국 사회보다 가부장제가 옅은 ‘1세계’ 영미권에서 김지영은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제이미 챙과 서면으로 대화를 나눴다.
번역을 맡기 전까지는 ‘너무 친숙한 이야기일 것 같아’ 이 소설을 일부러 읽지 않았다고 했는데.
“번역을 위해 책을 읽은 후 내가 모르는, 내 주변 여성들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내 삶은 일 중심으로 돌아간다. 자녀가 없는 2인 가정이라 가사노동이 많진 않다. 남들이 보기에 ‘쉬운 삶’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나로서는 매우 고단한 삶이다. 그래도 최선을 다하면서 크고 작은 기쁨과 만족감을 누리고 있다. 김지영 또한 매우 고단한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에게 ‘맘충’ 소리를 듣는다. 정말 열심히 살아왔고, 계속 열심히 살고 있는데 타인의 눈에 벌레로 보이는 삶은 어떤 것일까. 이 책을 계기로 처음 생각해보게 됐다.”
짧고 간명한 문장으로 채워졌기에 번역하기가 난망한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맘충’이라는 단어는 사전에는 없는 말. ‘엄마’와 ‘벌레(蟲)’가 결합된 이 단어를 그는 고심 끝에 ‘엄마(Mum)’와 ‘바퀴벌레(Cockroach)’를 합친 ‘Mum-roach’로 번역했다. 제이미 챙은 “영미권 독자들이 Mum-roach에서 혐오의 뉘앙스를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지영은 한국 사회에서 소외된 여성으로 나오지만, 성(性)소수자가 느끼는 소외감은 그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렇더라도 여성과 성소수자의 닮은 점을 찾는다면?
“6세 때 이민을 가 11세에 돌아왔고, 16세 때 또다시 한국을 떠났다. 한국, 싱가포르, 미국에서 자랐다. 처음 외국으로 나간 6세 이후 나는 내가 주류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다시 이민을 가서도 계속 겉도는 느낌을 받았다. ‘피부색이 달라서, 언어가 서툴러서, 적응하는 과정이라서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소설을 통해 김지영을 만난 이후 ‘당신은 비교적 덜 중요한 사람이다’는 메시지를 집, 학교, 직장에서 지속적으로 전달받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내가 받아왔던, ‘당신은 우리와 다르다’와는 또 다른 메시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실현을 위해 애쓰는 고단한 삶, 그 노력이 주는 울림이 꽤 오래 지속됐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포스터. [사진 제공 · 롯데엔터테인먼트]
소설의 어느 대목에서 영미권 독자들이 반응할 것으로 예상하나.
“두 구절을 꼽을 수 있겠다. 우선 국민학생인 김지영이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는 엄마의 얘기를 들은 대목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김지영 씨의 어머니가 된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치맛자락 끝을 꾹 밟고 선 작지만 묵직하고 굳건한 돌덩이. 김지영 씨는 그런 돌덩이가 된 기분이었고 왠지 슬펐다.’ 그리고 직장인이 된 김지영에게 여성 팀장이 하는 말. ‘앞으로 내 커피는 타주지 않아도 돼요. 식당에서 내 숟가락 챙겨주지 말고, 내가 먹은 그릇도 치워주지 말아요. (중략) 여자 막내들은 누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귀찮고 자잘한 일들을 다 하더라고. (중략) 왜 여자들은 알아서 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서구 사회 여성들도 조직에서 ‘귀찮고 자잘한 일들을 알아서 하는 사람’인가.
“서구 사회에서 조직생활을 해본 적 없어 잘 모르지만, 대체로 세계 어디를 가나 남성보다 여성이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미리 감지해 챙기는 일을 더 능숙하게 잘하는 것 같다.”
친정엄마와 죽은 대학 동창 등 가끔씩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말하는 김지영에 대해 정신과 전문의는 ‘산후우울증에서 육아우울증으로 이어진 매우 전형적 사례’라고 진단한다. 소설 속 김지영은 일을 그만두고 ‘집에 갇혀’ 맘충 소리를 듣는 자신을 비관하고, 영화 속 김지영은 다시 일하고자 시도하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한다. 전형적인 ‘한국형 경력단절 여성’ 김지영에 대해 제이미 챙은 “영미권 여성도 충분히 이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상 많은 엄마가 ‘아이는 사랑스럽지만, 엄마로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여긴다. 그런데 그런 생각 때문에 죄책감도 느낀다. 여성들은 ‘자아실현’과 ‘엄마 되기’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기에 내적·외적 갈등을 느낀다. 김지영도 그렇고, 세계 다른 여성들도 그렇다.”
다양한 삶에 대한 이해의 폭 넓혔으면
최근 한국 문단에는 동성애를 다양한 방식으로 다룬 소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김혜진의 ‘딸에 대하여’는 동성 파트너와 함께 집으로 들어온 딸을 둔 엄마의 이야기고,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은 남성 동성애자의 연애담을 유쾌한 톤으로 풀어낸 연작 소설집이다. 김세희의 ‘항구의 사랑’은 10대 소녀들의 ‘동성 사랑’을, 김희진의 ‘두 방문객’은 죽은 아들의 성 정체성을 뒤늦게 알게 되는 엄마의 이야기를 다룬다.제이미 챙은 “소수자 서사가 전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내가 ‘82년생 김지영’을 계기로 나와 다른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듯, 이러한 책들이 많은 독자를 만나 다양한 삶의 방식에 대한 이해를 넓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성 정체성 문제로 힘들어하는 10, 20대 청년에게 조언한다면?
“내가 누구고,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찾아가는 과정은 가족과 사회의 지지가 있더라도 어려운 일이다. 가족·사회의 반대와 부정적인 시선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켜내고자 애쓰는 것은 정말 큰일을 해내고 있는 거다. 스스로를 많이 칭찬하고 격려하길 바란다. 자조 모임이나 독서 모임을 찾아다니며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