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3월 23일(현지 시간) “이란과 생산적 대화를 했다”며 이란 에너지 기반시설 공격을 닷새간 연기했다. 뉴시스
이 섬은 사실상 이란 경제의 심장부로 평가된다. ‘보물섬’으로 불리는 하르그섬은 3000만 배럴의 저장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 섬이 원유 수출 허브가 된 것은 지형 때문이다. 이란 해안은 대부분 진흙이고 수심이 너무 얕아 초대형 유조선이 접근하기 어렵지만, 이 섬 인근 해역은 수심이 깊다. 미국 석유회사 아모코가 1960년대 팔레비 국왕 재임 시절 이 섬에 원유 터미널을 건설했다. 이 터미널은 하루 700만 배럴 원유를 처리할 수 있다. 이란은 올해 하루 평균 170만 배럴 원유를 수출했고 그중 155만 배럴이 이 섬을 거쳤다. 이처럼 이란은 원유 수출에서 이 섬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이다. 미국과의 전쟁 직전 이란의 원유 하루 수출량은 217만 배럴에 이르렀고, 2월 16일엔 역대 최고치인 하루 379만 배럴을 수출하기도 했다.
석유 시설 파괴 또는 협상 카드 목적
미군은 3월 14일(이하 현지 시간) 하르그섬에 있는 해군 기뢰 저장 시설, 미사일 발사용 벙커 등 이란의 90여 개 군사 목표물을 정밀 타격했다. 당시 미군은 이 섬의 석유 관련 시설을 공격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 이유는 이 섬의 석유 시설을 파괴할 경우 국제유가 폭등 등 경제적 파장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 섬의 모든 군사 목표물을 완전히 파괴했지만 석유 인프라를 파괴하지 않기로 했다”면서 “하지만 그냥 재미로 몇 번 더 공격할 수도 있다”며 추가 공격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최후통첩 48시간 종료를 앞두고 에너지 시설 공격을 닷새간 전격 유예한 트럼프 대통령이 3월 23일 이란과의 합의 가능성을 언급한 가운데 미국 언론들은 미군이 해병대를 상륙시켜 하르그섬 전체를 장악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은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하던 제31해병원정대(MEU) 소속 병력 2200~2500명이 강습상륙함 트리폴리호와 2척의 상륙수송함을 타고 중동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면서 이 부대는 3월 27일 전에 이란 인근 해역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해병원정대는 해상·공중에서 기습 상륙작전을 수행하는 전문 부대로, 함정을 이동식 기지로 활용하면서 작전을 수행한다. 제31해병원정대는 한반도 유사시 가장 먼저 투입되는 부대 가운데 하나다.
미국 언론들은 또 제11해병원정대 소속 병력 2200~2500명이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서 강습상륙함 복서호와 2척의 상륙수송함에 탑승해 중동 지역으로 향하고 있다고 전했다. 서방 군사 전문가들은 미군이 2개 해병 부대를 투입해 하르그섬을 점령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실제로 백악관 한 고위 관리는 미국 매체 액시오스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은 호르무즈해협 개방을 원한다”면서 “하르그섬 점령이 필요하다면 그렇게 할 것이지만, 아직 최종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서방 군사 전문가들은 미국이 해병대 상륙작전으로 하르그섬을 점령할 경우 이란 경제의 목줄을 죌 뿐 아니라, 협상을 통해 호르무즈해협 통제권도 확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프랭크 매켄지 전 미군 중부사령관은 “미국에는 사실상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며 “하르그섬의 석유 시설을 파괴해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히거나, 아니면 섬을 장악해 협상 카드로 활용하는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마크 칸시안 연구원은 “미군이 하르그섬 점령에 성공하면 미국은 이란과의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미군이 해병대를 이란 본토가 아닌 하르그섬 장악에 투입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지상군 투입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피하는 우회로가 될 수 있다.
트럼프의 일관된 하르그섬 집착
트럼프 대통령은 38년 전 일찍이 하르그섬을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1988년 부동산 사업가였을 때 영국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우리 함정에 총알 한 발이라도 날아온다면 하르그섬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뒤 들어가 그곳을 차지하겠다”고 밝혔다. 저서 ‘거래의 기술’ 출간 직후 이뤄진 이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사업가로서 성공 경험은 물론, 미국이 외교·안보에서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견해까지 상세히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이란에 강경하게 대응할 것”이라면서 “그들은 심리적으로 우리를 타격할 뿐 아니라, 우리를 바보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다”며 하르그섬을 언급했다.트럼프 대통령의 과거 발언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가 대통령으로서 오래된 구상을 정책으로 실현해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트럼프 대통령은 1987년 미국 주요 일간지에 사비로 전면 광고를 게재해 동맹국의 안보 무임승차를 비판한 바 있다. 이런 인식은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하면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유럽 회원국 등 동맹국을 상대로 방위비 증액 압박과 고율 관세 부과로 실현됐다. 이에 미군의 하르그섬 점령 계획은 트럼프 대통령의 일관된 인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군은 해병대 동원으로 하르그섬뿐 아니라 호르무즈해협에 산재된 다른 섬까지 점령해 호르무즈해협 통제권을 장악할 수도 있다. 점령 가능성이 큰 섬들은 군사적으로 상당한 가치가 있는 아부무사, 대툰브, 소툰브 등이다. 아부무사섬은 면적 13㎢로 서해 대청도와 크기가 비슷하다. 이 섬에는 활주로와 군 기지가 있으며 주민은 2000여 명이다. 대툰브섬은 면적 10㎢로 수백 명이 살고 있고, 군 기지와 지하에 미사일 기지, 드론 격납고도 있다. 소툰브섬에도 소형 고속정들이 배치돼 있다.
호르무즈해협을 지나는 선박은 반드시 이 섬들의 인근 해역을 지나야 한다. 페르시아만에서 나가는 배는 아부무사섬과 대·소툰브섬 사이, 들어오는 배는 대·소툰브섬과 이란 해역을 지나야 한다. 아부무사섬과 대·소툰브섬은 역사적으로 볼 때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영토였다. UAE를 식민통치하던 영국이 1971년 철수한 직후 이란이 해군을 동원해 3개 섬을 점령했고 지금까지 실효지배하고 있다. UAE가 이 섬들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반환을 요구하고 있으나 이란은 이를 거부해왔다. 일각에선 미군이 이 섬들을 장악한 뒤 UAE에 넘기는 시나리오까지 거론된다. 이란 본토를 점령하는 것보다 부담이 적은 데다, 이란과 갈등을 겪는 UAE에 보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이클 루빈 미국기업연구소(AEI) 선임연구원은 “이 섬들이 UAE 손에 들어간다면 항해의 자유와 국제 에너지 무역이 더 안전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점령 대상으로 케심섬이 있다. 호르무즈해협에 있는 섬 가운데 최대 규모로, 15만 명이 살고 면적은 1500㎢에 달한다. 이곳에는 대규모 해수 담수화 시설을 비롯해 해군기지와 드론 발사기지가 자리한다. 지하 터널에는 소형 고속정들과 미사일이 배치돼 있다. 미군은 또 공항이 있는 키시섬이나 소형 고속정들이 주둔 중인 호르무즈섬을 점령할 가능성도 있다.

호르무즈해협에서 북서쪽으로 483㎞ 떨어진 곳에 자리한 하르그섬은 원유 수출 허브다. 이란 경제의 심장부로 평가된다. 뉴시스
이란은 결사항전 가능성
미군이 해병대를 동원해 하르그섬 등 호르무즈해협 섬들을 대상으로 점령 작전을 감행할 경우 이란의 결사항전으로 상당한 희생자가 발생할 수 있다. 칸시안 연구원은 해병대가 호르무즈해협으로 진입해 하르그섬에 도착할 때까지 해안가를 따라 자리한 이란의 대함미사일, 드론, 소형 고속정 등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만큼 ‘도전적인 작전’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란 혁명수비대 공군사령관 출신으로 강경파인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이란 국회의장은 “누가 됐든 이란 섬들을 침공하는 자들은 페르시아만을 그들의 피로 채우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혁명수비대는 UAE 측에 미군의 섬 공격 작전을 허용하지 말라면서 아부무사섬과 대·소툰브섬들에 대한 공격이 있을 경우 UAE의 7개 토후국 가운데 라스 알카이마를 공습할 것이라고 위협했다.게다가 미 해병대가 이 섬들을 장악하더라도 기뢰·고속정 같은 비대칭 전력을 활용한 이란의 호르무즈해협 선박 통행에 대한 위협 행위를 원천 차단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서방 군사 전문가들은 또한 미군이 하르그섬을 점령한다고 해서 이란이 호르무즈해협 개방 관련 협상에 응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고 보고 있다. 마크 몽고메리 미 해군 예비역 소장은 “해병대의 불확실한 성공 가능성을 고려하면 이 작전은 미군을 불필요한 위험에 노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미군은 저공비행 공격기인 A-10 ‘워트호그’를 투입해 소형 고속정을 타격하고, 아파치 공격 헬기로 드론을 제거하는 등 해병대 상륙작전을 지원하고 있다. 미국은 앞으로 이란과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라도 군사적 압박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