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7일 아침 중국 단둥의 북한 영사사무소 건물 앞.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2주기를 추모하려는 사람들과 취재진으로 북적인다.
추모 마친 뒤 일과 시작
그런데 한 중년 북한 남성이 인터뷰에 응하자 취재진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이 남성은 “김정일 원수님의 유훈을 끝까지 관철해 역사적 주체혁명의 대업을 이어 끝까지 완성하겠다는 것을 결의한다”고 말했다. 장성택 처형에 대한 견해를 묻자 “우리 조국에서는 한갓 쥐새끼 무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추모를 마친 뒤 하루 일과를 시작하려는 사람이 몰리면서 북한 영사사무소 건물 주변은 혼잡했다. 이날 단둥의 북한 식당들도 커튼을 내린 채 영업을 중단했다. 추모식장 내부 취재가 가능할까. 2011년 12월 김정일 위원장 사망 당시에는 잠입 취재가 가능했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때만 해도 북한이나 중국 모두 처음 겪는 일이다 보니 보도통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현지 언론이라고 적당히 둘러대면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당장 건물 앞에 모여든 취재진이 너무 많아 눈에 띄었다.
방법은 몸으로 부딪치는 것뿐. 추모객 행렬에 파묻혀 영사사무소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앞뒤 좌우로 모두 김일성, 김정일 배지를 단 북한 주민으로 가득했다. 그들이 들고 온 조화 냄새가 진동했다. 남한 말투가 행여 이들을 자극할까 싶어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휴대전화도 잽싸게 껐다. 추모식장이 있는 층에 당도해 사람이 쏟아지듯 내리자마자 우려했던 일이 발생했다.
복도에 중국 보안요원 몇 명이 지키고 있다 취재원은 추모식장에 들어올 수 없다며 모두 내려가라고 외쳤다. 상부로부터 접근 차단 지시가 떨어졌던 것이다. 일본 취재진과 우리 취재팀은 복도에서 최대한 버텼지만, 보안요원들은 용케도 색출해 빨리 나가라고 종용했다. 결국 내부 취재에 실패하고 모두 내려와야 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보안도 한결 느슨해졌다. 이후 일본 방송 등 일부 언론이 조문 행렬이 한가해진 틈을 타 추모식장 내부 촬영에 성공했다. 필자는 오전에 방송 제작물을 본사로 송출한 뒤 곧바로 투먼으로 향했다.
단둥에서 투먼으로 가는 여정은 짧지 않다. 먼저 선양까지 승용차로 4시간을 달려 비행기를 탄 뒤 옌지에서 내린다. 거기서 투먼까지는 다시 차로 이동해야 한다. 12월 17일 오후 운전기사가 딸린 승용차를 예약해 단둥을 출발했다. 선양 타오셴 공항까지 가는 동안 눈을 붙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험상궂게 생긴 기사가 기이한 행동을 연발했기 때문이다. 대머리에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난 그는 첫인상부터 흡사 범죄용의자 같았다.
기사는 운전 중 계속 휴대전화 두 대로 번갈아가며 통화를 해댔다. 고속도로 과속탐지기가 나올 때마다 운전석 햇빛가리개를 내렸다. 가리개에는 CD가 여러 장 꽂혀 있었다. CD에 반사된 빛으로 과속탐지기 촬영을 막으려는 것이었을까. 계속 과속으로 달리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특정 승용차와 보조를 맞춰 그 뒤를 따라 규정 속도로 달렸다. 요금소를 통과할 때마다 이 선도 차량 뒤에 바짝 붙었고, 요금도 앞차가 계산했다. 이렇게 통과하니 요금소의 차량 인식 카메라에 번호판이 촬영될 리 없었다. 기사는 모자까지 푹 눌러썼다. 운전자 모습 역시 카메라에 잡힐 수 없었다. 선양 요금소를 통과하자 선도 차량은 사라졌고 예정된 시각에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폭설 때문에 비행기 일정이 연기된 것이다. 이륙이 많이 늦어져 자정 무렵에야 옌지 공항에 도착했다. 그곳에도 눈이 많이 내렸고 날씨까지 추워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다. 예약한 렌터카를 타고 조심조심 투먼으로 향했다. 새벽 1시쯤 투먼 요금소를 나서자마자 늘 묵던 여관으로 향했다. 낯익은 주인이 부스스 잠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반겼다. 다른 숙박시설과 달리 여권이나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는 곳이어서 잠입 취재에 안성맞춤이었다. 물론 시설은 그다지 추천할 만하진 않지만 말이다.
장성택 처형 소식에도 북한 남양과 연결된 중국 투먼 세관 주변에서는 물건을 싣고 내리는 인부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북한 측 트럭의 ‘함북’ 번호판이 뚜렷하다(왼쪽). 그 인근에는 무장한 중국 군인들의 경비 태세가 한층 강화됐다.
12월 18일 이른 아침 필자는 일어나자마자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전 취재원들은 한결같이 필자를 피했다. 장성택 처형 이후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기자를 만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워진 것이다. 별수 없이 다시 ‘현장 박치기’. 먼저 투먼 일대를 돌아다녔다. 공안당국 감시를 피해 촬영은 대부분 렌터카 안에서 비밀리에 진행했다. 시내에서는 이렇다 할 특이 동향이 눈에 띄지 않았다. 북한 남양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있는 지역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투먼 세관이 있다.
세관 주변 도로에는 ‘함북’(함경북도) 번호판을 단 북한 트럭이 즐비했다. 트럭이 싣고 온 흰 상자에 담긴 물건을 옮기느라 인부들이 분주했다. 옮겨 싣는 곳은 ‘중국해운그룹(China Shipping Company)’ 마크가 선명한 거대한 트럭. 투먼과 남양을 잇는 다리 위로는 붉은색 북한 트럭도 수시로 오갔다. 장성택 처형 정국에도 북·중 간 교역은 꽤 활발한 듯 보였다.
그러나 평상시와 다른 모습도 있었다. 중국 군인들의 움직임이 유달리 눈에 띄었다. 다리 아래 길에서 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조를 이뤄 순찰을 도는 모습이 자주 포착됐다. 출발 전 압록강의 북·중 접경 도시 단둥에 중국군이 증강 배치됐다는 소식을 접한 바 있었는데, 두만강의 투먼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북한 급변사태에 대비하는 조치로 보였다.
투먼 경제개발구는 북한 인력을 처음으로 공식 수입한 곳이다. 1년여 만에 다시 찾으니 달라진 점이 많았다. 먼저 중국의 첫 북한 공업단지라는 점을 대외적으로 홍보하고 있었다. 한글과 한자로 ‘중국(도문)조선공업원’이라고 병기한 큰 입간판이 세워져 있어 고속도로에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투먼 경제개발구 도로마다 즐비한 대형 안내 간판.
투먼 경제개발구 내부에도 변화가 있었다. 공업단지 땅으로 들어가자 입이 딱 벌어졌다. 1년여 전만 해도 허허벌판이던 땅 곳곳에 개발 흔적이 뚜렷했다. 뼈대를 갖춘 건물이 한창 올라가고 있었고, 길게 늘어선 개발계획도도 인상적이었다. 매 구획 도로변마다 해당 구획에 어떤 시설이 들어설지 소개하는 안내 간판을 마련해둔 것이다. 안내간판이 어찌나 많던지 차가 한참을 달려도 계속 이어졌다. 과연 중국답다는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왔다. 세탁기와 냉장고 등 각종 전자제품 생산 공장, 5성급 호텔, 대규모 체육시설, 관광 프로젝트 시설 등 개발계획도 다양했다.
그러나 이렇듯 무수한 계획이 과연 실현 가능할까. 당장 이 많은 생산시설에서 일할 사람을 공급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중국 측 인력 공급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미 중국 전역이 제조업 분야에서 심각한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투먼 당국이나 입주업체들이 기대를 거는 건 당연히 북한 인력이다. 투먼시 정부는 2011년 8월 중국 최초로 ‘조선(북한)공업단지’ 허가를 따냈고, 두 달 뒤에는 북한 측 인력 2만 명을 고용한다는 계약을 북한 합영투자위원회와 체결했다. 구두로는 3만 명까지 고용하기로 합의했다고 했다. 투먼에서 북한공업단지가 방대한 규모로 추진되는 배경에는 이처럼 북한 인력을 수급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투먼 경제개발구에는 그사이 북한 인력이 많이 늘었다. 새로운 건물과 업체도 속속 들어왔다.
그렇다고 무조건 낙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듯했다. 북한 측 인력 공급이 투먼 당국의 요구만큼 충분히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지에서도 이미 회의적인 시각이 나오고 있었다. 한 대북사업가는 필자에게 “나선특구(나진·선봉 경제특구)도 벌써 인력난이 한창”이라고 말했다. 경제개발 광풍이 일면서 나선에서도 인력 구하기가 흡사 전쟁처럼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김정은 체제가 북한 여러 지역의 경제개발 계획을 한꺼번에 천명했음을 감안하면 이러한 인력난이 다른 지역으로도 확산될 공산이 컸다.
인력난이 심각한 경제문제로 대두한 지 오래인 중국은 투먼뿐 아니라 곳곳에서 북한 인력을 달라고 아우성이다. 북한이나 중국이 추구하는 경제개발사업의 주체는 결국 노동자다. 개발 성공 여부는 인력이 충분히 확보되느냐와 직결된다. 북한 스스로도 인력 활용이 시급한 마당에 물 먹는 하마처럼 노동력을 끌어들이려는 중국 측 요구에 부응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중국 일각에서 북한 인력의 수입에 ‘과도한’ 기대를 걸어선 안 된다는 견해가 나오는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