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 ‘이스트사이드 갤러리’의 벽화 ‘형제의 키스’. [gettyimages]
10월 19일 오전 11시, 독일 베를린 글렘 거리에 위치한 장벽기념공원 인근 전시시설. 한 사람은 자신을 옛 동독 작센주 출신의 직장인이라고 밝혔다. 다른 사람은 출신지는 밝히지 않고 “학생”이라고만 소개했다. 서로 몇 마디 나누고 금세 친해진 이들은 도자기용 찰흙을 가운데 두고 악수했다. 두 사람의 손자국이 그대로 찍혀 나왔다. 전시시설의 한 직원이 말한다.
“꼭 30년 전인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을 넘으려고 동서 베를린 시민이 서로 손을 잡은 채 벽 위로 끌어올려줬답니다. 당시를 기억하고 서로 협력하자는 의미에서 이런 참여형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됐어요. 앞으로 총 1만957개(장벽 붕괴 후 30년간의 날짜 수)의 악수 조형을 모으는 게 목표입니다.”
전시시설 한쪽 벽에는 이렇게 만들어진 핸드 프린팅 조각 수백 개가 매달려 있었다. 현재 독일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11월 9일은 동서 냉전의 상징물인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년 되는 날이다.
독일 베를린 검문소였던 ‘체크포인트 찰리’ 인근 전시관 ‘The Wall’에서 베를린 장벽 사진을 유심히 보고 있는 여인(왼쪽). 독일 베를린 훔볼트포룸 박물관 외벽에 표현된 옛 동독 깃발. [김윤종 기자, 뉴시스]
독일 베를린 브란덴브루크 문 앞에 설치된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기념 예술작품(왼쪽). 독일 베를린 외곽의 장벽 붕괴 기념 조형물. [뉴시스, 김윤종 기자]
“바로 지금부터입니다”
1989년 11월 15일 브란덴브루크 문 앞에 모인 사람들. [뉴시스]
TV로 이 소식을 접한 동베를린 시민들은 곧바로 장벽으로 달려갔고, 동서베를린을 가르는 43km의 장벽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기자가 방문했을 때까지도 베를린 도심 곳곳에 3.6m 높이의 장벽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장벽 윗부분은 갈고리 줄을 던져 뭔가를 걸리게 한 다음 타고 넘어가지 못하게 하려고 둥근 모양이었다. 군데군데 뜯겨져 나가 철골구조물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구멍이 뚫린 곳도 많았다. 장벽이 붕괴된 후 베를린 시민들이 콘크리트를 떼어간 탓이다.
당시 상황을 좀 더 정확히 듣고 싶은 마음에 독일 통일 당시 동독의 마지막 인민의회(국회)에서 사회민주당(SPD) 원내총무로 활동한 리하르트 슈뢰더(76) 훔볼트대 명예교수의 자택을 방문했다. 그는 독일 통일조약 협상에 동독 측 대표로 참석해 독일 통일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베를린시 외곽에 위치한 슈뢰더 명예교수의 서재는 당시 기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당시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 통일 과정을 한반도 상황과 비교해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노트북컴퓨터를 꺼내 1989년부터 1990년 사이 자신이 활동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통일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강조했다.
“서독 주민들은 동독에 자주 갔습니다. 동독 사람들도 제한적이긴 해도 서독을 방문할 수 있었어요. 편지나 소포는 비교적 어렵지 않게 서로에게 보낼 수 있었고, 전화통화도 가능했죠. 무엇보다 상대 지역의 TV 프로그램도 볼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동독 주민의 80%가 전파를 잡아 서독 TV 프로그램을 시청했다고 한다. 장벽 붕괴 전인 1989년 초 동독 내 전체 TV 시청률이 약 35%였는데, 동독 주민의 서독 TV 시청률도 20%가 넘은 것으로 추정될 정도다.
슈뢰더 교수는 “더구나 장벽 붕괴 전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개혁정책으로 동구권 공산국가들이 붕괴되고 있었다”며 “여기에 동독 경제가 파산에 이를 만큼 최악이 되면서 통일 외에는 돌파구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독일과 한국의 가장 큰 차이로 ‘내전(內戰)’을 꼽았다.
“서독과 동독은 서로 장기간 교류하다 통일했습니다. 그럼에도 동독을 먼저 개혁하고 동서독 교류를 확대한 다음 마지막에 베를린 장벽을 없애는 점진적인 통일이 이뤄졌다면 지금 훨씬 더 좋았으리라는 의견이 많아요. 그런데 한국은 남북이 싸우는 전쟁이 일어났고…. 이후 제대로 된 교류 없이 단절된 상태로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눈물의 궁전’에 눈물은 없었다
1990년 트레넨 팔라스트(눈물의 궁전)(왼쪽). 트레넨 팔라스트 박물관. [독일 연방정부 아카이브, Berlin Tourismus & Kongress GmbH]
짧은 만남 후 긴 이별을 앞둔 가족들은 이곳에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 이곳의 명칭이 ‘눈물의 궁전’이 된 이유다. 안으로 들어가니 관람객 50여 명이 있었다. 한 학부모는 자녀에게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는 동서독 주민의 표정을 담은 사진을 보여주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동서독의 교류는 지금 남북한과 비교하면 천지 차이였다. 1949년 동독과 서독이 분단된 후 동독인의 서독 이동이 급격히 증가하자 동독 정부는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을 세웠다. 하지만 탈출자가 많고 불만이 커지자 양측은 1964년 11월 동서베를린 자유왕래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 따라 이산가족은 상대 지역에서 최대 30일간 지낼 수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전인 1980년대 말 동독은 연평균 100만 명 이상, 서독은 6배인 600만 명 이상이 상대 지역을 방문했다고 한다. 이 같은 교류가 결국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 통일을 이루는 밑바탕이 됐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퍼포먼스로 독일 바이마르 극장의 괴테와 실러 동상 앞에 임시로 설치된 ‘함께 오르는 벽’에 올라간 남녀(아래). 관광객들이 몰리는 ‘체크포인트 찰리’. [뉴시스, 김윤종 기자]
바로 옆에는 맥도날드 매장이 있었다. 햄버거를 사 먹고 주변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젊은이들에게 장벽 붕괴는 부모 세대에 있었던,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거기서 만난 베를린 시민 아나 양에게 장벽 붕괴에 대해 묻자 “나는 지금 15세고, 태어나기도 전 일이라 잘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런 분위기는 베를린을 관통하는 슈프레강을 따라 1.3km 남아 있는 장벽에 화가 100여 명이 그림을 그려 유명해진 ‘이스트사이드 갤러리’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10월 20일 찾은 이곳 역시 젊은이들에겐 ‘문화공간’일 뿐이었다.
에리히 호네커 전 동독 공산당 서기장과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입을 맞댄 모습을 그린 벽화 ‘형제의 키스’ 앞에서 만난 카티야(19) 씨는 “친구들과 함께 바람을 쐬러 왔다”며 “나는 그저 통일 독일에서 살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오시’와 ‘베시’의 갈등은 여전
남아있는 베를린 장벽(왼쪽)과 김상국 베를린자유대 한국학과 교수. [김윤종 기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장벽 붕괴 30주년 전 열린 독일 통일 29주년 기념식(10월 3일)에서 한 말이다. 장기간 동서독 교류를 통해 이룬 통일임에도 이후 수많은 갈등과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는 현재진행형이라는 의미다. 베를린에서 만난 많은 시민도 “여전히 정서적 장벽은 남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게으른 ‘오시’(Ossi·동독놈)와 거만한 ‘베시’(Wessi·서독놈)의 갈등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그 실체를 정확히 알고 싶어 베를린 카이저스베르테르 거리에 위치한 베를린자유대를 방문했다. 독일 국적자로, 독일 통일에 대해 오랜 기간 연구해온 김상국(47) 한국학과 교수를 만나기 위해서다. 조만간 연구차 북한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밝힌 그는 한국이 통일 과정에서 얻어야 할 교훈으로 ‘기대 심리의 관리’를 언급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듬해 3월, 동독 첫 자유선거인 인민의회 선거가 있었다. 당시 선거는 ‘빨리 일해 서독처럼 잘살자’는 공약을 내건 기독교민주연합(기민당)과 ‘빠른 통일은 동독에게 좋지 않으니 점진적으로 이루자’는 사회민주당(사민당) 간 대결구도였다. 동독인의 선택은 전자였다. 이후 1990년 10월 통일이 됐다.
하지만 후폭풍이 컸다. 막상 통일이 됐는데도 당장 동독 주민이 서독 주민처럼 잘살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통일 후 동서독 마르크화를 무리하게 통합하는 과정에서 직원 월급을 감당하기 힘들던 동독 기업들은 경쟁력을 잃어 문을 닫고 말았다. 실업률이 급증했고, 동독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서독으로 이동했다. 1989년 장벽 붕괴 당시 1700만 명이 넘던 동독 인구(베를린 제외)는 최근 1905년 수준인 1300만 명대로 감소했다. 독일 전체 인구 8200만 명의 15%에 불과한 수준이다.
“현재 동독지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서독지역의 75%가량입니다. 동독지역 주민이 아주 못살까요? 폴란드, 체코, 헝가리보다 훨씬 잘삽니다. 경제나 인프라는 동독지역이 거의 90%까지 서독지역을 따라 왔고, 각종 복지제도는 서독이나 동독지역이나 다 같아요. 그럼에도 상대적 박탈감이 워낙 크다 보니 동독 출신인 메르켈 총리조차 ‘서독 정치인’으로 생각합니다. 통일 과정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풍요와 경제적 요소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통일 과정에서 상대의 문화와 정서를 존중하고 상대적 박탈감을 줄여가야 ‘정서적 장벽’이 생기지 않습니다.”
“소통과 교류가 먼저, 통일은 그 결과”
실제로 9월 발표된 ‘독일 통일 현황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동독지역 주민의 57%가 “나는 독일의 2등 시민”이라고 답했다. 이런 불만은 독일 내 극우세력이 다시 급성장하는 자양분이 됐다.10월 27일에 있었던 옛 동독지역 튀링겐주 지방선거에서는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집권여당 기민당을 제치고 2위를 차지했다. AfD는 옛 동독지역인 작센주와 브란덴부르크주 선거에서도 각각 2위에 올랐다. 2012년부터 이민정책을 확대하자 “왜 우리보다 이민자나 난민을 우대하느냐”며 극우정당을 지지하는 이들이 늘어난 것이다.
이에 대해 서독지역 주민은 “동독보다 못사는 서독지역도 많은데 왜 동독 출신은 불평만 하느냐”고 반발한다. 독일 정부는 30년간 2조 유로(약 2570조 원)를 동독지역 경제와 인프라에 투입했다. 이는 소득의 5.5%에 달하는 ‘연대세’로 서독지역 주민들 주머니에서 고스란히 나간 돈이다.
그렇다고 서독과 동독 모두 손해를 본 것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통일 이후 독일은 유럽연합(EU)의 맹주가 됐다. 한때 경제적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세계 4위 경제대국이다. 동서 분단 당시 독일은 유럽에 탱크를 굴리는 위험한 국가로 취급받았지만, 통일이 곧 독일산 벤츠가 전 유럽에 굴러다니는 원동력이 됐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김 교수는 인터뷰를 마치고 베를린을 떠나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통일은 엄청난 경제적, 사회적 비용이 투입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이는 한 국가의 미래를 위한 ‘투자’입니다. 독일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한국 사람들 역시 통일을 이루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큰 성취감과 저력을 느끼게 될 겁니다. 단순히 경제적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현재의 독일에서도 볼 수 있듯이 통일보다 먼저 필요한 건 평화적으로 관계를 유지하고 교류를 넓히는 일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과정은 이야기하지 않고 결과인 통일만 생각합니다. 앞뒤가 바뀌었습니다. 통일은 소통과 교류가 증대되고 양측의 교감이 점진적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획득할 수 있는 결과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