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의 은퇴 준비를 돕기 위한 퇴직연금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가 도입 1년을 넘었다. 이 제도는 2022년 7월 도입돼 1년간 시범운용을 거쳐 지난해 7월 본격 시행됐다. 미국과 영국, 호주 등 주요 연금 선진국에서 운용하는 디폴트옵션 제도를 모델로 하며, 이들 국가의 퇴직연금처럼 연평균 6~8%의 안정적인 수익률이 목표다.
과거 퇴직연금 수익률이 낮았던 이유는 자금이 대부분 예금 같은 원리금보장형 상품으로 운용됐기 때문이다. 원인은 크게 3가지였다. 먼저 퇴직연금 가입자(근로자) 스스로 적극적으로 운용하려는 의지가 없거나 금융투자 지식이 부족한 것이 첫 번째였다. 또 퇴직연금 계좌를 관리하는 퇴직연금 사업자(금융회사)가 계좌 수익률을 높일 수 있도록 유도할 인센티브가 없다는 것이 두 번째였으며, 제도를 관장하는 정부의 무관심이 마지막 원인으로 꼽혔다.
사전지정운용제도 도입 후에도 가입자의 자금이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집중되는 문제점이 전혀 개선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먼저 제도 자체의 기형적 모습이 지적된다. 연금 선진국의 디폴트옵션은 원리금보장형 상품 가입이 제한적이다. 연금은 장기간 투자를 통해 수익률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기에 원리금보장형이 아닌 원리금비보장형 상품에 투자돼야 한다. 그런데 한국 제도는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100% 선택할 수 있게 돼 있다. 앞서 언급한 연금 선진국과는 다른 모습이다.
또한 한국은 가입자 상당수가 금융회사의 홍보성 독려 때문에 사전지정운용제도에 가입해 있다. 문제는 근로자가 금융회사가 제시하는 6~7개 디폴트옵션 상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데 있다. 금융투자 지식이 부족한 근로자 입장에서 제시된 상품 설명서만 보고 고르기가 어려우니 그냥 원리금보장형이라고 적힌 초저위험 상품을 선택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도입한 사전지정운용제도는 엄밀하게 말하면 선진국형 디폴트옵션이 아니다. 디폴트옵션의 핵심은 근로자(가입자)가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아도 기본(디폴트)으로 선택(옵션)된 자산배분형 포트폴리오로 투자하도록 만들어놓은 것이다. 즉 퇴직연금 사업자가 근로자 특성에 맞춰 디폴트옵션을 정해놓으면 그 옵션대로 투자가 진행된다. 다만 이 디폴트옵션에서 선택적 탈퇴(옵트 아웃: opt out)는 가능하다. 근로자가 일부러 해당 옵션을 해지하거나 탈퇴하겠다고 했을 때만 다른 방식으로 변경되게끔 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선택적 탈퇴가 아닌, 선택적 가입(옵트인: opt in)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사전지정운용제도에 가입한 근로자가 어떤 상품을 선택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원리금보장형 상품으로 선택이 집중된다. 제도가 이렇게 설계된 데는 투자 손실이 발생할 경우 퇴직연금 사업자의 부담이 크다는 점이 작용했을 수 있다. 퇴직연금 사업자 입장에서 손실이 발생했을 때는 가입자의 불만에 응대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는 반면, 수익이 났을 때는 특별한 보상이 없기 때문이다.
퇴직연금 운용 수익률 개선이라는 근본 목적을 달성하려면 제도 개선이 필수적이다. 정부는 선택적 가입 방식이 아닌, 선택적 탈퇴 방식으로 제도를 변경해야 한다. 근로자에게 처음부터 선택하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 먼저 제시한 상품에 자동 가입되게 한 후 근로자로 하여금 선택적으로 탈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가입자의 퇴직연금 수익률 개선을 위해 퇴직연금 사업자의 경쟁이 촉발되는 장치를 갖춰야 한다. 즉 퇴직연금 계좌를 관리하는 금융회사를 자유롭게 옮길 수 있어야 한다. 현 제도에서 DC형의 경우 사용자(회사 대표)가 정하는 퇴직연금 사업자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퇴직연금 사업자는 근로자가 아닌 사용자에게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근로자의 퇴직연금 계좌 수익률에 관심을 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제도는 만들어지기도 어렵고, 개선되기도 어렵다. 상충되는 이해관계자가 많기 때문이다. 사전지정운용제도에서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제외하면 은행권이 불만을 가질 것이다. 은행 예금으로 운용되고 있는 엄청난 규모의 퇴직연금 자금이 빠져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수익률이 높은 퇴직연금에 인센티브를 주고 금융회사 이동을 자유롭게 한다면 금융회사는 경쟁이 치열해져 싫어할 것이 뻔하다. 그러나 정부가 근로자의 노후를 위해 퇴직연금 수익률을 개선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챙겨야 하는 일이다. 인구구조 등 문제로 국민연금 개혁을 피할 수 없는 과제라고 생각하듯이, 퇴직연금 제도 역시 개혁 수준으로 개선해야 할 중요 과제로 인식해야 한다.
연금 선진국의 디폴트옵션이든, 한국의 사전지정운용제도든 핵심은 자산을 배분해 장기간 투자하는 것이다. 자산배분 포트폴리오는 위험을 낮추면서 수익은 챙길 수 있다. 물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나 2022년 코로나19 사태 같은 시장 상황에서는 단기간의 손실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장기투자는 이런 손실 위험을 극복하게 해준다.
DC형 퇴직연금 계좌는 재직 중에 해지할 수 없으니 장기투자에 더없이 적합하다. 자산배분 포트폴리오는 조금만 공부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투자법이다. 퇴직연금 디폴트옵션을 구성하는 상품 역시 자산배분형 펀드이거나 자산배분에 위험자산 비중 조절 기능이 추가된 TDF(타깃데이트펀드)가 대부분이다. 연금 상담을 하다 보면 투자할 돈이 없다는 분들을 만난다. 그분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준다. “이미 퇴직연금에 충분한 투자 자금을 적립하고 있습니다. 퇴직연금을 잘 챙겨서 굴리면 노후 준비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과거 퇴직연금 수익률이 낮았던 이유는 자금이 대부분 예금 같은 원리금보장형 상품으로 운용됐기 때문이다. 원인은 크게 3가지였다. 먼저 퇴직연금 가입자(근로자) 스스로 적극적으로 운용하려는 의지가 없거나 금융투자 지식이 부족한 것이 첫 번째였다. 또 퇴직연금 계좌를 관리하는 퇴직연금 사업자(금융회사)가 계좌 수익률을 높일 수 있도록 유도할 인센티브가 없다는 것이 두 번째였으며, 제도를 관장하는 정부의 무관심이 마지막 원인으로 꼽혔다.
[GettyImages]
‘선택적 탈퇴’만 가능한 디폴트옵션
하지만 현재로서는 사전지정운용제도가 기존 퇴직연금 수익률이 물가상승률을 쫓아가기도 버거운 수준이라는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도입됐다는 취지가 무색하다. 가입자의 자금 대부분이 여전히 원리금보장형으로 운용되고 있어서다. 금융감독원 사전지정운용방법 비교공시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사전지정운용제도 전체 자금의 89.6%가 은행 예금이나 보험사 이율보증보험계약(GIC) 같은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몰려 있다. 개인이 직접 가입해 관리하는 개인형 퇴직연금(IRP)은 84.1%로 그나마 낫지만, 직장에서 가입된 DC(확정기여)형 퇴직연금의 경우 그 비율이 91.7%나 된다.
사전지정운용제도 도입 후에도 가입자의 자금이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집중되는 문제점이 전혀 개선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먼저 제도 자체의 기형적 모습이 지적된다. 연금 선진국의 디폴트옵션은 원리금보장형 상품 가입이 제한적이다. 연금은 장기간 투자를 통해 수익률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기에 원리금보장형이 아닌 원리금비보장형 상품에 투자돼야 한다. 그런데 한국 제도는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100% 선택할 수 있게 돼 있다. 앞서 언급한 연금 선진국과는 다른 모습이다.
또한 한국은 가입자 상당수가 금융회사의 홍보성 독려 때문에 사전지정운용제도에 가입해 있다. 문제는 근로자가 금융회사가 제시하는 6~7개 디폴트옵션 상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데 있다. 금융투자 지식이 부족한 근로자 입장에서 제시된 상품 설명서만 보고 고르기가 어려우니 그냥 원리금보장형이라고 적힌 초저위험 상품을 선택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도입한 사전지정운용제도는 엄밀하게 말하면 선진국형 디폴트옵션이 아니다. 디폴트옵션의 핵심은 근로자(가입자)가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아도 기본(디폴트)으로 선택(옵션)된 자산배분형 포트폴리오로 투자하도록 만들어놓은 것이다. 즉 퇴직연금 사업자가 근로자 특성에 맞춰 디폴트옵션을 정해놓으면 그 옵션대로 투자가 진행된다. 다만 이 디폴트옵션에서 선택적 탈퇴(옵트 아웃: opt out)는 가능하다. 근로자가 일부러 해당 옵션을 해지하거나 탈퇴하겠다고 했을 때만 다른 방식으로 변경되게끔 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선택적 탈퇴가 아닌, 선택적 가입(옵트인: opt in)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사전지정운용제도에 가입한 근로자가 어떤 상품을 선택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원리금보장형 상품으로 선택이 집중된다. 제도가 이렇게 설계된 데는 투자 손실이 발생할 경우 퇴직연금 사업자의 부담이 크다는 점이 작용했을 수 있다. 퇴직연금 사업자 입장에서 손실이 발생했을 때는 가입자의 불만에 응대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는 반면, 수익이 났을 때는 특별한 보상이 없기 때문이다.
퇴직연금 운용 수익률 개선이라는 근본 목적을 달성하려면 제도 개선이 필수적이다. 정부는 선택적 가입 방식이 아닌, 선택적 탈퇴 방식으로 제도를 변경해야 한다. 근로자에게 처음부터 선택하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 먼저 제시한 상품에 자동 가입되게 한 후 근로자로 하여금 선택적으로 탈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가입자의 퇴직연금 수익률 개선을 위해 퇴직연금 사업자의 경쟁이 촉발되는 장치를 갖춰야 한다. 즉 퇴직연금 계좌를 관리하는 금융회사를 자유롭게 옮길 수 있어야 한다. 현 제도에서 DC형의 경우 사용자(회사 대표)가 정하는 퇴직연금 사업자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퇴직연금 사업자는 근로자가 아닌 사용자에게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근로자의 퇴직연금 계좌 수익률에 관심을 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제도는 만들어지기도 어렵고, 개선되기도 어렵다. 상충되는 이해관계자가 많기 때문이다. 사전지정운용제도에서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제외하면 은행권이 불만을 가질 것이다. 은행 예금으로 운용되고 있는 엄청난 규모의 퇴직연금 자금이 빠져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수익률이 높은 퇴직연금에 인센티브를 주고 금융회사 이동을 자유롭게 한다면 금융회사는 경쟁이 치열해져 싫어할 것이 뻔하다. 그러나 정부가 근로자의 노후를 위해 퇴직연금 수익률을 개선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챙겨야 하는 일이다. 인구구조 등 문제로 국민연금 개혁을 피할 수 없는 과제라고 생각하듯이, 퇴직연금 제도 역시 개혁 수준으로 개선해야 할 중요 과제로 인식해야 한다.
해지할 수 없어 장기투자에 적합한 퇴직연금
개인 입장에서 제도가 근로자에게 유리하게 바뀌고, 그 덕분에 자신의 퇴직연금 계좌 수익률이 좋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감나무 아래 누워 홍시가 떨어지길 바라는 것”과 같다.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를 제도에 기대지 말고 근로자 스스로 본인의 퇴직연금 계좌를 잘 관리해나가야 한다.
연금 선진국의 디폴트옵션이든, 한국의 사전지정운용제도든 핵심은 자산을 배분해 장기간 투자하는 것이다. 자산배분 포트폴리오는 위험을 낮추면서 수익은 챙길 수 있다. 물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나 2022년 코로나19 사태 같은 시장 상황에서는 단기간의 손실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장기투자는 이런 손실 위험을 극복하게 해준다.
DC형 퇴직연금 계좌는 재직 중에 해지할 수 없으니 장기투자에 더없이 적합하다. 자산배분 포트폴리오는 조금만 공부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투자법이다. 퇴직연금 디폴트옵션을 구성하는 상품 역시 자산배분형 펀드이거나 자산배분에 위험자산 비중 조절 기능이 추가된 TDF(타깃데이트펀드)가 대부분이다. 연금 상담을 하다 보면 투자할 돈이 없다는 분들을 만난다. 그분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준다. “이미 퇴직연금에 충분한 투자 자금을 적립하고 있습니다. 퇴직연금을 잘 챙겨서 굴리면 노후 준비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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