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위한 32대의 자동차’를 작업했던 비디오아트의 창시자 고(故) 백남준 작가가 생전에 남긴 말이다. 그는 1997년 독일 뮌스터의 조각 프로젝트에 출품했던 이 작품을 통해 20세기 문명의 종말을 선언했다. 이 작품에는 1924년형 윌리 자동차부터 1959년형 뷰익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자동차의 발전사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자동차 32대가 전시돼 있다. 2006년 고인이 된 백 작가가 만약 전기차를 타보았다면 그는 ‘21세기를 위한 또 다른 자동차’를 만들었을지 모른다.
에코운전 친환경 표방 Blue~On!
인류 문명은 교통수단의 발달과 궤를 같이했다. 많은 물자와 인구를 이동케 하는 교통수단을 통해 사람들은 점점 한군데 모여 살게 됐고 도시화가 이뤄졌다. 인류는 기원전 3200년경 바퀴를 발명했고 그 후 바퀴는 수레로, 수레는 자동차로 발전하면서 인간의 발을 대신하며 문명을 일궈왔다. 특히 자동차는 백 작가의 말처럼 인류 문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하지만 화석연료인 휘발유(가솔린) 또는 경유(디젤)를 사용하는 내연기관 자동차는 그 연료에서 나오는 배기가스가 필연적으로 대기오염을 유발한다. 더구나 이들 화석연료는 매장량이 무한정하지 않다.
이런 고민은 자동차 회사들로 하여금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으면서도 무한한 동력원을 사용하는 새로운 개념의 자동차 개발에 뛰어들게 했다. 국내 제1의 자동차 회사인 현대자동차(이하 현대차)는 최근 신개념 고속형 전기차 ‘블루온(BlueOn)’을 야심차게 선보이며 고민 해결에 한 발짝 다가섰다. 블루온은 유럽 전략형 소형 해치백인 ‘i10’을 기반으로 만든 모델. ‘친환경적인, 새로운, 창조적인’ 이미지를 나타내는 현대차의 친환경 브랜드 ‘블루(Blue)’에 전기차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Start On)’ 및 전기 ‘스위치를 켜다(Switch On)’라는 의미의 ‘온(On)’을 조합해 이름 붙였다.
9월 14일 블루온을 시승하기 위해 경기 화성시에 자리한 현대차의 남양연구소를 찾았다. 비행기 활주로처럼 아득하게 펼쳐진 주행시험장 한편으로 블루온 5대가 나란히 줄을 서 있었다. 이날 시승 코스는 왕복 2.2km의 고속직선 구간을 포함, 코너링과 등반을 시험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블루온은 중대형차를 위주로 생산해온 지금까지의 현대차 모델과는 겉모습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블루온의 차체 크기는 전장 3585mm, 전폭 1595mm, 전고 1540mm로 가솔린 경차 ‘모닝’(3550mm, 1595mm, 1480mm)과 흡사하다. 시승에 앞서 현대차 홍존희 전기개발차실장(이사)의 설명에 따라 블루온의 충전 시현을 가졌다. 홍 실장은 “급속 충전은 교류를 직류로 바꿔서 충전하고, 완속 충전은 일반 가정용 전기와 동일하게 교류를 그대로 충전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블루온에 장착된 리튬이온 폴리머 배터리의 충전 시간은 380V 전류를 이용한 급속 충전 시 배터리 80%까지 충전하는 데 25분, 220V를 완속 충전 시 90%까지 충전하는 데 6시간이 소요된다. 1회 충전거리가 최대 140km 정도로 도심 주행에 적합하다. 전면부 엠블럼을 열면 완속 충전을 위한 충전구가 있으며 연료 주유구는 급속 충전구로 사용된다.
“일반 차량이랑 똑같네요.”
블루온 내부 모습은 여느 일반 차량과 다를 바가 없다. 블루온의 운전석 계기판은 4.2인치 TFT LCD 슈퍼비전 클러스터로 제작, 운전 중 필요한 정보만 간략하게 입력돼 있다. 전기차라는 특성상 일반 휘발유차 RPM 영역은 파워 영역이, 휘발유 표시는 배터리 충전칸이 대신한다. 겉에선 실내 공간이 좁아 보였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보니 운전자 포함 4명이 타기엔 큰 무리가 없었다. 엔진을 걸 때 시동 소음은 가솔린차와 비교해 거의 들리지 않았다. 기어를 드라이브에 놓고 가속페달을 밟으며 서서히 차량을 움직였다. 가속페달을 세게 밟고 직선구간을 달려보니 일반 경차와 동일하게 계기판 속도계가 올라갔다.
“70… 80… 110… 130.”
현대차는 블루온의 공식 최고속도가 130km/h라고 밝혔으나 직접 가속페달을 밟아보니 131km/h까지 속도계가 올라갔다. 정지 상태부터 100km/h까지 도달 시간은 13.1초로, 일반 소형차와 큰 차이는 없었다. 풀가속을 해 마구 달리자 계기판 속 북극곰이 얼음이 녹아내려 어쩔 줄 몰라했다. 현대차는 배터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블루온에 에코운전(eco-Driver) 시스템을 적용했다. 에코운전은 중저속 운행을 통해 배기가스 감축과 에너지 절약을 실천하는 신개념의 운전행동을 말한다. 블루온 운전자가 에코운전을 하면, 운전석 앞 초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에 그려지는 북극곰이 조금씩 자란다.
(왼쪽) 현대차가 선보인 고속전기차 블루온은 유럽 전략형 해치백인 ‘i10'을 기반으로 만든 경차 모델이다. (오른쪽) 겉모습과 달리 실내 공간은 넓고 여느 소형차 이상의 안락함을 제공한다.
직선코스 주행 후 탄젠트 25도 경사구간에 진입했다. 경사로에서 잠시 정지한 후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면 전자제어 조향장치(EPS)가 장착돼 있어 차체가 후방으로 밀리지 않는다. 또한 블루온은 가솔린 엔진 없이 모터만으로 주행하는 전기차량에 최적화된 브레이크 시스템이 적용됐다. 현대차 남양연구소 관계자는 “블루온의 제동 장치는 전자식 회생 제동용 브레이크(AHB)가 장착됐다. 모터로 생성된 유압을 통해 제동력을 확보하는 전동식 유압부스터를 적용해 연료주행 거리를 최대 140km까지 늘렸다”고 말했다.
전기차의 주행 성능은 기대 이상이었지만 실제 일반인이 이 전기차를 구입할 수 있는 시기는 확실치 않다. 현대차 역시 “일단은 관공서를 중심으로 운행을 유도하고 일반인이 이를 접해 전기차를 구매할 인프라가 구축되는 것이 우선”이라고 밝혔다. 현대차는 올 연말까지 정부 공공기관에 30대를 공급해 시범 운행한 뒤, 2011년 초부터 2012년 말까지 총 2500대를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일반인 대상 판매는 일러야 2013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전망되지만 충전소 설치 등 인프라 구축과 가격 현실화가 전제돼야 한다.
특히 가격이 문제다. 한 조사에 따르면, 일반인들은 환경을 위해 전기차를 구입할 용의는 있지만 전기차 구입으로 인해 추가 부담은 안 하겠다는 의견이 다수를 이루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업계에선 소형차인 블루온의 가격을 5000만 원 선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부가 보조금을 지원해도 선뜻 다가서기 힘든 가격이다. 시승회에 참석한 기자들 역시 “경차 수준의 성능과 옵션을 고려할 때 2000만 원이 넘는다면 구매가 쉽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런 한계에도 블루온은 국산 전기차 개발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성장했음을 알려주기에 손색이 없다. 향후 배터리 기술이 향상돼 1회 충전거리가 늘어나면 장거리 운행도 충분할 것으로 기대된다. 어쩌면 전기차를 도로에서 흔히 보게 될 날이 생각보다 머지않은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