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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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종가 추석엔 조상의 얼이 피어난다

  • 이연자 teacook@hanmail.net 사진 제공 윤종상, 박태신

    입력2010-09-20 10: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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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져가는 농경사회의 정서와 풍속이 살아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종가(宗家)다. 조상이 남긴 땅에서 수확한 곡식으로 제수품을 마련해 선대의 음덕을 기리고 자손들이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덕담으로 넘쳐나는 고향마을, 그곳을 지키는 종가의 추석 풍속과 차례상을 소개한다.

    #풍산 류씨 양진당과 충효당 종가 … 9월 9일 중구절에 다례 모셔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 풍산 류씨 집성촌에 있는 대종가의 추석은 어떤 모습일까? 이 마을에 가면 풍산 류씨들의 중흥조로 추앙받는 겸암 류운용(謙庵 柳雲龍, 1539~1601) 선생의 종가 양진당(養眞堂)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조선 선조 때 명재상인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 선생의 종가 충효당(忠孝堂)이 있다. 양진당은 형님 댁이고 충효당은 아우 댁이었다. 두 존택이 있는 하회마을이 8월 2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하회탈로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진 이곳은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가기도 했다.

    명문 종가 추석엔 조상의 얼이 피어난다

    1 갖가지 햇과일이 올려진 차례상 차림. 술안주로 올린 적은 익히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2 중구절에 쓴 모사 그릇. 조상의 혼백을 상징하는 모사는 그릇에 모래를 담고 그 위에 띠(茅)를 꽂는 것이 일반적이나, 양진당의 제사에는 유기 그릇에 솔잎을 담아 모사를 상징했다.

    추석에는 묘소 찾아 풀베기

    조선 영조 때 이중환(李重煥)이 지은 지리책 ‘택리지’에 사람이 살 만한 곳의 입지 조건으로 지리(地里),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4가지를 들었다. 이 조건을 두루 갖춘 복된 땅으로 기록된 곳이 안동 하회마을이다.



    이런 길지를 옛 선비들이 지나칠 리 없다. 조선 초에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낸 풍산 류씨 7세조인 유종혜(柳從惠) 선생이 하회마을 뒤편에 있는 화산(花山)을 100여 회나 오르내리면서 왕궁을 고르듯 길한 집터를 찾았는데 그곳이 하회마을 대종가 양진당 터다. 명택에 자리 잡은 덕분인지 문신이며 청백리의 사표로 추앙받는 겸암 선생, 임진왜란 때 명재상이었던 서애 선생 등 걸출한 인물들이 이 마을에서 배출됐다.

    하회는 강물이 마을을 휘감아 흐른다 해 ‘물돌이동’이라 한다. 마을을 중심으로 화산·남산·원지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남쪽으로만 흐르던 낙동강이 하회에 이르러 동북 방향으로 큰 원을 그리며 산을 휘감고 마을을 얼싸안아 휘돌아나간다.

    충효당과 양진당의 추석 차례는 팔월 보름이 아니라 음력으로 9월 9일 중구절에 모신다. 추석에는 햇곡식이 여물지 않아 중구절이어야 제대로 된 천신제를 올릴 수 있다 여긴 까닭이다. 추석에는 묘소를 찾아가 풀을 베는 것으로 끝이다.

    그래서 종가의 추석 차례를 보기 위해 2009년 음력 9월 9일 하회마을을 찾았다. 대종가인 양진당 차례는 오전 11시가 넘어서 시작됐다. 충효당 등 아랫집에서 먼저 모신 다음, 대종가에 모여 차례를 지내야 많은 후손이 참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제사만 모시는 지차(之次) 집에서 각기 차례를 지내고, 돌아가신 분의 아버지가 속해 있던 큰집에서 차례를 지낸 다음 점차 윗대로 올라가 고조부를 모시는 집에까지 이르면 그 집이 바로 종가다.

    양진당 안채에서는 문중 부인들이 모여 19대 종부 이정숙(李貞淑·57) 씨와 함께 차례 음식을 차렸다. 두 분의 불천지위(不遷之位·큰 공이 있어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와 종손으로부터 4대를 모시려면 열두 상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니 제수품은 간단해야 한다. 상마다 떡과 적, 포와 탕, 나박김치와 갖가지 햇과일과 종부가 직접 담근 술 등 모두 7가지를 올렸다. 기제사 때 올리는 밥과 국, 나물은 없었다.

    술안주 적(炙)은 모두 날것 올려

    명문 종가 추석엔 조상의 얼이 피어난다

    조상이 음식을 드실 동안 제관들은 엎드려 있다.

    사당에서 모시는 다례 순서도 간단했다. 먼저 음식을 차린 뒤 집사가 신주 문을 여니 종손이 분향(焚香) 강신(降神)한 후 제주 이하 참석자 모두 두 번 절했다. 다시 종손이 신주마다 술을 올리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손잡이가 신주로부터 오른편에 가도록 해 시접 위에 가지런히 올렸다. 이것을 삽시정저(揷匙正箸)라 했다. 제주 이하 참석자는 ‘조상님 덕분으로 새로운 곡식을 수확하게 됐으니 많이 잡수시라’는 뜻으로 부복해서 아홉 수저 잡수실 동안 기다렸다. 이후 집사가 수저를 거두고 제주 이하 참석자 모두 두 번 절하며 조상을 배웅하는 것으로 중구절 다례를 끝냈다. 이렇게 간단한 다례를 두고 무축(無祝·축이 없음) 단작(單爵·술 한 잔)이라 했다. 이날 제사의 주인은 19대 종손 류상붕(柳相鵬·60) 씨였다.

    이 다례의 특징은 분향 강신 때 쓰는 모사(茅沙) 그릇에 있다. 일반적으로 모사는 모래를 담고 그 위에 띠(茅)를 꽂았으나, 양진당 다례에는 유기 대접에 솔잎을 담아 모사를 상징했다. 또한 술안주인 적(炙)은 모두 날것으로 올렸다.

    “이것은 혈식군자(血食君子)라 하는데, 군자는 익히지 않은 음식을 올린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날고기를 쓰는 더 구체적인 뜻은 배려와 나눔이라 생각합니다. 참석자들은 집으로 돌아갈 때 생선 한 토막씩 가져갔는데, 이는 봉송(奉送)이라는 제사 예절의 하나입니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내륙인 이곳에선 생선을 구경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종가 제사 때 얻어가는 생선으로 탕을 끓여 온 가족이 나눠 먹으면서 오랜만에 생선 맛을 보았고, 조상의 음덕을 기렸습니다.”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면 종손의 해석은 설득력이 있었다.

    #일직 손씨 정평공 종가 … 종가 앞마당 600년 된 차나무

    명문 종가 추석엔 조상의 얼이 피어난다

    1 차나무가 있는 종가의 마당.

    경남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다원동에 들어서면, 여기저기 고색창연한 기와집이 범상치 않은 마을임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곳의 진가는 기와집에 있지 않았다. 우람한 기와집의 위세에 비하면 소박한 존재지만 그 연륜만은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수령 600년의 차나무가 그 주인공이다.

    고려 말 명신인 정평공 손홍량(靖平公 孫洪亮, 1287~1379) 종가의 재실인 혜산서원(惠山書院) 앞마당에 자리 잡아 긴 세월을 견뎌온 차나무는 마치 나이를 잊은 듯 청정한 잎새를 자랑하며 가을에 피워낼 수많은 꽃망울을 탐스럽게 매달고 있다. 차나무는 서원뿐 아니라 조상의 덕목을 기린 신도비 옆, 다원서당 연못가에 한 그루씩 모두 세 그루다.

    더욱 놀라운 건 600년 된 늙은 차나무에서 딴 찻잎으로 추석 차례상에 차를 올린다는 사실. 설과 추석에 ‘다례 모신다’는 어원을 실천하고 있는 보기 드문 종가의 다례상이 궁금했다.

    종가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차나무

    고색창연한 종갓집 서원 앞마당에 2m가 넘는 키에 가슴높이 줄기둘레가 세 아름이나 되는 당당한 풍채의 차나무가 한 그루도 아닌 세 그루나 가문의 혈맥처럼 서 있었다. 차나무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차의 종주국인 중국 윈난(雲南)성 서쌍판납의 대차수(大茶樹)가 수령이 1700년이라 하지만 종가의 차나무와는 비할 바가 아니다. 운남의 차나무는 키가 20m 넘는 야생종으로 찻잎이 큰 대엽종이다. 종가의 것은 키가 작고 찻잎도 작은 소엽종으로, 대대로 가족의 손으로 키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하다. 일직 손씨 26대 종손인 손특수(1989년 작고) 옹이 들려준 차나무의 내력이다.

    “중국에 살던 선조께서 고려로 오면서 가져왔다는 설도 있고, 중시조인 정평공이 집 안에서 키우던 차나무를 서원으로 옮겨 지금의 자리에 심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옵니다. 하지만 기록이 없어 그 내력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종가 사람들은 이 차나무를 ‘타나무’라 불렀고, 우리가 음료로 마시는 차나무와는 다른 종류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입향조의 고향인 중국 푸젠(福建)성에서는 차를 타로 발음하므로 타나무가 바로 차나무인 것이다.

    범상치 않은 차나무에 대한 비밀을 캐기 시작했다. 어쩌면 종가의 제사 순서를 기록해놓은 ‘홀기(笏記)’에 단서가 있지 않을까. 종가를 다시 찾았을 때 26대 종손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27대 종손 손태철(孫泰徹) 옹(작고)에게 홀기를 보여달라고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장롱 깊숙이 넣어둔 200여 년 전 빛바랜 ‘홀기’가 나왔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국을 내리고 차를 올린다’는 뜻의 ‘진다(進茶)’와 ‘점다(點茶)’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이 기록대로라면 종가에서는 오래전부터 다례에 차를 올렸음을 알 수 있다.

    차나무를 키운 정평공 생전은 불교와 함께 우리나라 차문화가 가장 성행했던 고려시대다. 기호음료일 뿐 아니라 의식용으로도 차가 쓰였음을 ‘고려사’나 은둔 선비들의 시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차나무를 키우던 정평공이 92세로 세상을 뜨자 후손들은 그를 기념하고자 안동시 일직면에 타양서원을 짓고 서원 앞마당에 차나무를 옮겨 심었다. 그 후 정평공의 증손자인 손관(孫寬)이 관직에 올라 안동에서 경남 밀양시 용활동으로 이사 오면서 타양서원에 있던 차나무도 함께 옮긴 것으로 추측했다. 이후 손관의 후손인 손호(孫顥)가 다원동으로 옮기면서 지금의 자리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명문 종가 추석엔 조상의 얼이 피어난다

    2 마당의 차나무에서 직접 따서 만든 차. 3 추석 차례상에 종손이 차를 올리고 있다.

    정성 가득 단출하게 차린 차례상

    종가에서는 2002년 추석부터 다시 차례상에 차를 올렸다. 추석을 앞두고 지금은 고인이 된 종손 손태철 옹과 종부 안경현(安庚鉉·78) 할머니에게 미리 차례상을 보여달라는 외람된 부탁을 해서 허락을 받았다. 종가에 묻혀 있던 600년 된 차나무의 존재를 지상에 알린 인연 덕분이었다.

    당시 종손 손태철 옹은 차례상의 의미를 꼼꼼히 설명해주었다. 추석 차례는 햇것을 올리는 천신제이니 반드시 햇과일과 햇곡식으로 만든 음식을 올려야 하며, 이 땅에서 나지 않는 수입 과일은 올리지 않는 게 조상에 대한 예의라 했다. 차례상에 올리는 기본 과일은 밤, 대추, 감, 배 네 가지였다. 햅쌀로 빚은 송편도 올렸다. 나박김치도 있었다. 술은 양위분마다 한 잔씩 올렸다. 술안주는 쇠고기 적 한 가지로도 충분하지만 이날은 도미 한 마리, 조기 한 마리를 제기에 담았다. 마른안주로 북어 한 마리와 문어 다리 하나, 육포를 한 그릇에 담았다. 여기다 차 한 잔과 다식 한 접시를 더해 모두 일곱 가지였다.

    “우리 어릴 때는 먹을 것이 귀하지 않았습니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기다리는 게 명절날이었지요. 양반집 제삿날은 10리 안팎에서 다 알았고요. 지금도 주위 30여 호에 우리 문중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예전에는 더 많았어요. 그 사람들이 제삿날 모이면 웬만큼 차린 음식으로는 어림도 없었어요. 어디 그뿐인가요. 제사상에 올렸던 음식을 나눠 봉투에 담아 가져가게 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먹을 것이 흔하고 아이들이 제사 음식보다 피자나 햄버거를 더 찾으니 제물을 많이 차릴 이유가 없지요.”

    종손은 종가에서부터 차례상 차림에 변화를 줘야 한다고 했다. 설·추석 차례는 차 한 잔과 다식 한 접시, 과일 한 그릇으로 단출하게 지내도록 후손들에게 당부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미풍양속인 설·추석 차례를 세세연연 이어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주 나씨 송도공파 나천정 종가 … 햇차 한 잔에 햇과일 다섯 가지

    명문 종가 추석엔 조상의 얼이 피어난다

    찻잔이 오른 추석 다례상.

    차례상에 차를 올리기 위해 직접 차나무를 재배하고 차를 만드는 종손이 있다. 전남 광양시 칠성읍 칠성리 나주 나씨 송도공파 나천정(羅天鼎·649~1713) 선생의 종가다. 12대 종손 나상면(羅相冕·58·보광한의원장) 씨와 종부 김영순(金榮順·56) 씨는 주말이면 종가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산속 야생차밭으로 달려가 차나무 돌보는 일을 낙으로 여긴다.

    종손은 차밭에 농약을 뿌리는 대신 풀을 뽑고, 종부는 찻잎을 따서 정성껏 만든 차를 추석 차례는 물론 종가의 모든 제례에 술 대신 쓰고 있었다. 의례물로 차뿐 아니라 찻잎으로 만든 송편과 찻잎 적 등 차 음식 일색으로 차례상을 차렸다. 전국에 산재한 종가를 120집 넘게 답사했지만 이러한 종가는 처음이었다. 500여 년 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차례(茶禮)’라는 용어의 본질에 맞는 종가를 비로소 찾은 것이다.

    술잔 대신 찻잔이 오르다

    차밭은 보성군 벌교읍에서 율어면으로 가는 옛길에 있다. 존제산(尊帝山) 하늘고개(천치·天峙)를 올라가는 길은 순탄치 않아 일반 승용차로는 어림도 없다. 사륜구동의 지프라야 겨우 비포장 비탈길을 오를 수 있는 산중에 날갯짓하는 새와 같은 모습으로 앉은 집 한 채가 종손이 주말이면 기거하는 별서(別墅)다.

    하늘고개라는 지명답게 땅보다 하늘이 많이 보이는 이곳에서 종손은 부처와 조상의 신주를 모시면서 차를 만들고 있었다. 집 옆으로는 개울물이 흐르고 울창한 자연림 사이에 청량한 공기를 마시며 차나무는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없는 밀림 속 같은 산중턱 중심부 약 10ha(3만여 평)가 종손의 차밭이다. 30여 년 전에 차씨만 뿌려놓고 방치했던 차밭을 종손이 인수해 2001년부터 연인원 500여 명을 동원해 3.3ha(약 1만 평) 정도에 사람이 드나들며 찻잎을 딸 수 있게 길을 텄다.

    기계로 찻잎을 따고 기계로 만들어내는 대단위 신식 다원과는 상황이 다른 산중다원의 문제점은 찻잎을 딸 인부를 구할 수 없다는 것. 찻잎이 활짝 피기 전 곡우 전후에 따야 맛있는 차를 만들 수 있는데 이때의 인건비가 찻값보다 비싸다. 어렵사리 사람을 동원해 차를 따서 만들어보았지만 까다로운 녹차 만들기는 경험 부족으로 실패를 거듭했고 2003년에야 첫 수확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초의 스님이 베껴 정리한 ‘다신전(茶神傳)’ 조다법대로 한 치의 오차 없이 차를 만든다. 억센 잎과 억센 줄기 부스러기를 골라내고 지름 80cm 솥에 생잎 900g을 넣고 덖어 익혀서 손으로 비빈 다음, 다시 솥에 넣어 말리는 덖음 녹차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투자와 공력을 들여 만든 차를 성공 첫해부터 종가에서 지내는 모든 제례에 올리고 있다. 차를 제례에 올리는 것은 조상대대로 전해오는 제사 순서를 적은 ‘홀기(笏記)’에 ‘국을 내리고 차를 올린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명문 종가 추석엔 조상의 얼이 피어난다

    1 햇빛과 물, 바람이 키우는 종가의 차밭. 2 찻잎으로 만든 송편

    4대조 기일은 어버이날과 개천절

    “시조는 나부(羅富)로 고려시대 벼슬을 했던 인물입니다. 중국 예장 사람으로 사신으로 왔다가 돌아가기 전 송나라가 망하자 우리나라에 그대로 눌러앉았다고 합니다. 우리 집안은 직장공파에서 분파된 송도공파입니다.”

    종손은 다른 종가들처럼 조상들이 큰 벼슬을 한 집안이 아니라 했다. 송도공파 파조인 나해윤 할아버지대에 세 아들과 일곱 손자가 과거에 급제해 진사댁 소리를 들으며 알아주는 집안이 됐다고 했다. 화약기술자였던 증조부가 일제강점기 의병에 가담해 독립운동을 했으나 일본군과 접전 중에 총상을 당하고 세상을 떠났다. 나라를 구하려다 세상을 떠난 증조할아버지의 애국심은 가문의 자랑이다.

    증조모님이 돌아가시자 할아버지는 시묘살이 대신 집에 상방을 차려 3년상 내내 그 방에서 잠자고 조석 상석을 올리면서 전통의 예를 지켰다. 그렇게 아버지대까지는 엄격한 종가의 제례 예법을 지켰지만 종손 대에 이르러서는 간편하게 정리했다.

    “아이들이 성장해서 제 갈 길 가고, 형제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제사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어 제사 혁명을 시도했습니다. 번잡한 예법을 지키고 이것저것 제사 음식을 늘어놓다 보면 제사의 본질은 사라지고 허례허식이 될 것 같기도 했고요. 줄이고 또 줄여서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모셔야 자손만대로 제사가 이어질 것 아니겠어요?”

    4대조 기일(忌日) 제례를 하루에 모시되 봄에는 5월 8일 어버이날에, 가을엔 개천절로 정했다. 4대가 아니라 지금은 증조까지 3대만 모신다. 어버이날은 살아 있는 부모를 섬기기 위해 자식들이 모이기 때문에 이때 제삿날을 정하면 부담 없이 참석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제삿날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조상 앞에서 반성도 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하는 교육적인 날로 만들기 위해서다. 10월 3일 개천절은 예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낸 날이어서 의미가 있다. 시제는 양력으로 4월 첫 일요일 묘소에서 하루에 다 모신다.

    ▼ 종가에서 정한 제사 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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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부모님 사후 3년간은 기일 제사를 모신다.

    ② 3년 후부터는 제삿날에 합제로 한다.

    ③ 제삿날은 봄철 어버이날과 가을 개천절로 두 번 지낸다.

    ④ 제수는 제철에 나는 세 가지 과일과 술 한 잔, 젓갈(명란)과 포(전으로 대용)와 밥과 국을 올리며 녹차는 신위마다 한 잔씩 올린다.

    ⑤ 설날은 밥과 국 대신 떡국 한 그릇을 한 분마다 올리고, 추석은 떡국 대신 송편을 올린다.

    ⑥ 절은 한 사람이 두 번 한다.

    ⑦ 설·추석 차례는 아침 6시, 봄·가을 제사는 저녁식사 시간을 기준으로 한다.

    #영일 정씨 송강 정철 종가 … 시인의 다례상에 오른 국화주와 송편

    아버님 날 나흐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곳 아니시면 이 몸이 사라실까

    하늘 같은 가업슨 은덕을 어데 다혀 갑사오리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의 ‘훈민가’ 16수 중 한 수다. 조선 선조 때의 시인이자 정치가인 정철 선생의 종가는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어은마을에 있다. 이웃이라곤 없는 외딴곳에서 묘역과 사당을 지키는 16대 종손 정구성(鄭求晟·65) 씨와 종부 김선옥(金善玉·65) 씨는 시인의 후손답게 맑고 선한 눈을 가진 자연과 동화된 분이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의 산실인 전남 담양에 있는 ‘송강정’은 송강이 당쟁의 회오리를 피해 4년여간 머물렀던 문학의 태실일 뿐 종가는 아니다. 애주가로도 유명했던 송강은 ‘장진주사’ ‘계주문’ 등 술에 관한 시가도 많이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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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큰 별 송강 선생의 문집. 2 선조가 내린 은술잔과 옥술잔에 종부가 직접 빚은 향기로운 국화주를 담아 조촐한 상차림으로 추석 차례를 모신다.

    진천 ‘상산팔경’에 자리 잡은 종가

    진천의 명물 농다리에서 4km 거리에 송강 정철의 묘소와 사당, 종가가 있다. 종가 옆 계곡의 맑은 물엔 고기가 숨어 살고, 우거진 숲에는 사슴이 노니는 비경 때문에 ‘어은계석(漁隱溪石)이라고 하는데 진천이 자랑하는 ‘상산팔경’에 종가 마을이 들어간다. 이런 명당에 송강의 묘소 자리를 정한 것은 조선 숙종 때 노론의 수장이었던 우암 송시열(尤唵 宋時烈, 1607~1689) 선생이다. 송강의 고손자인 정양(鄭瀁)이 우암과 절친한 사이로 할아버지 묏자리를 특별히 부탁했던 것이다.

    송강은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정치적 영욕과 부침을 계속하다 58세에 강화에서 유명을 달리한 후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에 묻혔다. 임진왜란 시절이라 후손들이 묏자리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회한을 풍수지리에 밝은 우암에게 부탁해 지금의 자리로 옮김으로써 푼 것이다. 송강이 세상을 떠난 지 72년 후(1665)의 일이다. 그 후 선조의 묘를 지키기 위해 후손들이 묘 아래 집을 짓고 살면서 지금의 ‘정송강사’ 자리는 정씨들의 집성촌이 됐다.

    종가의 추석 차례상 차림을 궁금해하자 종손은 책을 한 권 내밀었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가문의 예법인 ‘제례홀기’였다. 종가에는 현재 정철 선생 내외의 불천지위 2번, 종손으로부터 4대 봉제 8번, 설·추석 차례 2번, 모두 12번의 제사를 모신다. 이 밖에도 4월 5일에는 묘소에서 차사를 모시고, 4월 9일은 진천 유림에서 주관하는 정철의 향사를 송강정사에서 따로 모신다.

    종손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다달이 들어 있는 절사를 모두 지냈다고 한다. 정월 초하룻날엔 떡국차사를 올리고 정월대보름날엔 오곡밥과 나물반찬을 차려 사당에 올렸다. 3월 삼짇날은 진달래 화전을 만들어 사당에 천신(薦新)했고, 4월 5일 청명 한식날은 묘제를 지냈으며, 5월 5일 단옷날엔 쑥절편을 만들어 사당에 고했다. 6월 15일 유두절에는 맨드라미화전, 밀쌈 등으로 사당 차례를 모셨으며, 7월 7일 칠석날은 햇밀로 국수를 만들고 호박전을 지져서 조상 앞에 올렸다. 8월 추석날에는 설과 함께 가장 큰 명절로 햅쌀로 송편을 만들고 국화주를 빚어 조상을 섬겼다. 9월 9일 중양절엔 국화주와 국화전을 만들어 사당에 고했으며, 동짓날엔 팥죽차사를 지냈다. 이렇게 1년에 12번 올리는 절사는 대대로 이어졌으나 몇 년 전 종손이 병이 들자 문중회에서 지내지 않기로 결의해 지금은 제사가 많이 줄었다.

    음식을 장만하는 정성과 깨끗함 우선

    종가에서는 정철 선생 양위분을 모신 사당에서 실제 차례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문중 어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추석날이 아니지만 이른 추석 차례를 모셨다. 신주로부터 앞줄 오른편에 수저를 놓고, 그 옆으로는 선조가 하사한 은잔과 옥잔을 놓았다. 은잔은 정철 선생의 잔이고, 옥잔은 정경부인 문화 류씨의 잔이다. 그 줄에 조청 한 종지와 송편 한 접시를 놓았다. 두 번째 줄에는 서에서 동으로 돼지수육, 육전, 소전, 어전 순으로 놓았다. 쇠고기와 두부를 함께 빚어 지진 육전(肉煎), 명태포를 밀가루 씌워 지진 어전(魚煎), 파와 채소 다시마를 밀가루에 부쳐 네모 모양으로 얇게 지진 소전(蔬煎)을 술안주로 올렸다. 그 다음 줄엔 명태포 한 마리와 도토리묵, 나박김치, 청장과 식혜 순서로 놓았고, 넷째 줄엔 조율이시(棗栗梨枾)를 따랐으며 조과를 올렸다. 모두 네 줄로 차린 종갓집 차례음식치곤 의외로 단출했다.

    술은 종손이 직접 술잔에 따라 조상 앞에 놓았는데, 한 잔만 드렸다. 종손은 “선조들은 차례상에 올리는 음식보다 그 음식을 장만하는 정성과 깨끗함이 우선이라는 말씀을 강조했습니다. 또 집에서 나는 음식으로 장만하지, 남에게 빌려서 올리지는 말라고 하셨어요”라고 설명했다.

    이날 도토리묵을 올린 것은 종가 터에 도토리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라 했다. 술을 좋아했던 정철 선생의 제사엔 종부가 직접 술을 만들어 올린다. 350여 년 이어온 종가는 국화주를 만들어 시인의 차례상에 올리고 있었다.

    찹쌀 지에밥(고두밥)을 지을 때 솔잎을 씻어 바닥에 놓고 찌면 솔 향이 밥에 밴다. 고두밥을 식혀 누룩과 버무릴 때 술빛을 맑게 하려면 누룩을 적게 넣어야 한다. 찹쌀 1말에 누룩 3되 정도가 적당하다. 국화를 따서 말려두었다가 함께 섞으면 국화주가 된다. 고두밥, 누룩, 국화와 술약(이스트)을 넣고 버무린 다음 옹기 항아리에 켜켜로 담아 그늘진 곳에 이불을 덮어두는데, 10일 정도면 발효가 된다. 용수를 박아 맑고 향기로운 국화주를 떠서 차례상에 올리는 것이다.

    명문 종가 추석엔 조상의 얼이 피어난다

    성역화된 송강 정철의 사당.

    소소 이연자 씨는 한배달우리차문화원 원장으로 ‘이연자의 우리 차 우리 꽃’ ‘자연을 마시는 우리 차’ 등을 펴내 차 문화 보급에 앞장섰고, 저서로는 한국의 명문 종가 120곳을 직접 취재해 쓴 ‘명문 종가 사람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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