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존재 여부를 두고 다시 논란이 뜨겁다. 논란의 중심에는 ‘빅뱅’ 이론으로 우주의 기원을 설명해온 영국 출신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있다. 그는 최근 자신의 책 ‘위대한 설계’를 출간, 빅뱅은 신이 아니라 중력의 자연법칙에 의해 저절로 생긴 현상이라 주장하며, 사실상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태도를 비쳤다. 창조주 없이 물리학 법칙으로 우주를 설명할 수 있으며, 과학은 신을 불필요하게 만들 것이라는 그의 발언을 두고 비판과 옹호가 교차한다. 한쪽에서는 과학만능주의의 오만함을 질타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선 신의 존재에 대한 논란을 종결짓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으로 환영한다.
호킹의 발언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은 서양에서 근대 이후 과학과 종교 사이에 나타난 오랜 갈등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근대과학은 출발부터 종교와 갈등을 빚었다. 17세기 과학혁명의 기수로서 지동설을 주장하다 가톨릭교회와 충돌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과학과 종교의 숙명적 갈등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굴절망원경 개량해 달 관측한 갈릴레오 일약 스타로
갈릴레오는 1564년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원래 유서 깊은 귀족가문이었으나, 그가 태어났을 때는 생활이 힘들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다. 어려운 경제사정에도 그의 부친은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인 아들에게 훌륭한 교육을 시키고 싶었다. 그리하여 갈릴레오는 피렌체 인근 수도원의 기숙학교를 거쳐 1581년 피사의 대학에 진학했다. 처음에는 부친의 희망에 따라 의학 공부를 했지만 곧 흥미를 잃고 대신 수학에 열중했다. 갈릴레오는 이미 학창시절에 과학자로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는데, 천장의 흔들리는 등불을 보고 진자의 등시성(等時性)을 발견했다. 졸업 후 한동안 수학 개인교사로 일하던 그는 1589년 피사 대학에 수학강사 자리를 얻었고, 1592년에는 베네치아 공화국 파도바 대학의 수학교수가 됐다.
1610년까지 18년간 파도바에 머무는 동안 갈릴레오의 일생에서 매우 중요한 일들이 일어났다.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동거하면서 두 딸과 아들을 얻었다. 학자로서 큰 명성도 누렸는데,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망원경이었다. 1608년 유럽에 처음 등장한 굴절망원경을 손에 넣은 갈릴레오는 이를 개량해 본격적으로 천체를 관측하기 시작했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통해 본 하늘은 놀라운 것이었다. 달의 표면은 매끈한 것이 아니라 지구와 마찬가지로 울퉁불퉁했으며,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새로운 별이 보였고, 특히 목성의 주변에는 네 개의 위성이 돌고 있었다. 갈릴레오는 기존의 관념을 깨뜨리는 이 새로운 발견을 정리해 1610년 ‘별의 전언(傳言)’이란 책을 발간했다. 토스카나 대공에게 헌정한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이 발견한 목성의 위성에 대공직을 세습하던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을 염두에 두고 ‘메디치의 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렇듯 뛰어난 처세술 덕에 그는 토스카나 대공의 수학자 겸 철학자로 임명돼 오랫동안 염원했던 피렌체로 금의환향했다.
이뿐 아니라 ‘별의 전언’ 출간 이후 그는 학계의 스타가 됐다. 1611년 갈릴레오는 로마를 방문해 망원경 관측을 시연하면서 자신의 천체관측 결과를 설명했다. 로마의 유력 귀족, 예수회 소속 학자, 고위 성직자들은 갈릴레오의 발견에 관심과 아울러 찬사를 보냈다. 교황 바오로 5세를 알현하고 로마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도 받은 갈릴레오는 유럽 최고의 과학자로서 인정받았다.
로마 방문은 이처럼 성공적이었으나 교황청 일각에서는 갈릴레오의 활동을 우려의 시선으로 예의주시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갈릴레오가 관측한 목성의 위성이나 금성의 위상 변화는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했다. 따라서 갈릴레오의 발견은 가톨릭교회가 중세 이후 신봉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과 이를 수학적으로 발전시킨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 우주론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었다. 갈릴레오 역시 자신의 관측 결과가 교회의 전통적 견해가 아니라, 16세기 전반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착안한 지동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확신했다.
지동설 주장 뒷받침하다 … 죽을 때까지 가택연금
코페르니쿠스 우주론의 적합성을 알리는 것이 과학자로서 사명이라고 생각한 갈릴레오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이론이 가톨릭 교리와 배치하지 않음을 설명하고자 1615~16년 다시 로마를 방문했다. 하지만 그는 설득에 실패했고 오히려 비공식적이지만 로마교회 성직자에게서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견지하거나 방어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지금껏 묵인돼왔던 코페르니쿠스 저술도 갈릴레오가 경고를 받은 직후 금서로 지정됐다.
위험을 감지한 갈릴레오는 한동안 침묵했지만 1623년 우르바노 8세가 새 교황으로 취임하면서 다시 희망을 갖게 됐다. 새 교황은 1611년 추기경 시절 로마에서 만난 뒤 오랫동안 친분관계를 유지하던 인물이었다. 1624년 로마를 방문해 교황을 알현하며 자신에 대한 호감을 확인한 갈릴레오는 용기를 내 지구의 움직임을 주장하는 책을 펴냈다. 1632년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대한 대화’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이 저술에서 갈릴레오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 그리고 그 증거로서 조수(潮水)에 관한 견해를 기술했다.
로마에서 출판 허가가 나지 않아 피렌체에서 출간한 이 책에 대한 로마교회의 반응은 교황청의 분위기를 갈릴레오가 완전히 오판했음을 보여주었다. 출판 직후 교황청에서는 위원회를 구성해 이 책을 조사했고, 이듬해 갈릴레오를 종교재판에 회부했다. 재판부는 갈릴레오가 이미 오래전 교회당국의 비공식 경고를 받았음을 밝혀냈고, 이를 다시 위반했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로마로 소환된 갈릴레오는 두 달 동안 네 차례에 걸쳐 심문을 받았는데, 첫 심문부터 자신의 신념을 철회하고 잘못을 인정했다. 교회와 사전 타협에 따라 굴욕적인 자백의 대가로 자비가 베풀어졌다. 갈릴레오는 유죄판결이 났지만 투옥은 면하고 가택연금으로 감형됐던 것이다.
1642년 죽을 때까지 피렌체 인근 자택에서 연금 상태로 지냈던 갈릴레오는 종교에 의해 과학자의 소신이 꺾이고 부당하게 희생된 경우였다. 로마 교황청은 무려 350년이 지난 1992년 그를 부당하게 대우했음을 인정하고 완전 복권을 선언했다. 그럼에도 당시의 역사적 맥락을 감안하면, 일방적으로 시비를 가리려는 데는 문제가 있었다. 갈릴레오와 교회가 갈등을 빚었던 당시는 가톨릭교회가 신교에 맞서 교리를 정비하고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해 개혁을 진행하던 시대였다. 또 정치적으로 1618년에 시작된 30년 전쟁이 전 유럽으로 확대되던 때였다.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30년 전쟁의 와중에 교황에게는 해가 뜨고 지는 현상의 본질을 둘러싼 논란보다 긴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산적했다. 특히 교황은 갈릴레오의 주장이 진실 여부를 따지는 실체적 논증이 아니라 천문학적 추론에 머물기를 원했다. 아직 완벽하게 증명할 수도 없는 가설 때문에 신앙체계가 전면적으로 흔들리는 것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결국 갈릴레오 사건은 과학의 본질과 한계에 대한 인식을 서로 달리함으로써 나타난 비극이었다. 사실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판단은 완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끊임없이 심사숙고하고 성찰할 대상이다. 더구나 철저히 세속화된 오늘날 종교는 갈릴레오 시대와는 달리 과학에 대해 강자가 아니라 절대적인 약자의 위치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의 존재 이유를 일절 부인하는 발언이 과연 바람직한지 의문이 든다.
호킹의 발언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은 서양에서 근대 이후 과학과 종교 사이에 나타난 오랜 갈등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근대과학은 출발부터 종교와 갈등을 빚었다. 17세기 과학혁명의 기수로서 지동설을 주장하다 가톨릭교회와 충돌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과학과 종교의 숙명적 갈등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굴절망원경 개량해 달 관측한 갈릴레오 일약 스타로
갈릴레오는 1564년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원래 유서 깊은 귀족가문이었으나, 그가 태어났을 때는 생활이 힘들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다. 어려운 경제사정에도 그의 부친은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인 아들에게 훌륭한 교육을 시키고 싶었다. 그리하여 갈릴레오는 피렌체 인근 수도원의 기숙학교를 거쳐 1581년 피사의 대학에 진학했다. 처음에는 부친의 희망에 따라 의학 공부를 했지만 곧 흥미를 잃고 대신 수학에 열중했다. 갈릴레오는 이미 학창시절에 과학자로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는데, 천장의 흔들리는 등불을 보고 진자의 등시성(等時性)을 발견했다. 졸업 후 한동안 수학 개인교사로 일하던 그는 1589년 피사 대학에 수학강사 자리를 얻었고, 1592년에는 베네치아 공화국 파도바 대학의 수학교수가 됐다.
1610년까지 18년간 파도바에 머무는 동안 갈릴레오의 일생에서 매우 중요한 일들이 일어났다.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동거하면서 두 딸과 아들을 얻었다. 학자로서 큰 명성도 누렸는데,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망원경이었다. 1608년 유럽에 처음 등장한 굴절망원경을 손에 넣은 갈릴레오는 이를 개량해 본격적으로 천체를 관측하기 시작했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통해 본 하늘은 놀라운 것이었다. 달의 표면은 매끈한 것이 아니라 지구와 마찬가지로 울퉁불퉁했으며,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새로운 별이 보였고, 특히 목성의 주변에는 네 개의 위성이 돌고 있었다. 갈릴레오는 기존의 관념을 깨뜨리는 이 새로운 발견을 정리해 1610년 ‘별의 전언(傳言)’이란 책을 발간했다. 토스카나 대공에게 헌정한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이 발견한 목성의 위성에 대공직을 세습하던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을 염두에 두고 ‘메디치의 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렇듯 뛰어난 처세술 덕에 그는 토스카나 대공의 수학자 겸 철학자로 임명돼 오랫동안 염원했던 피렌체로 금의환향했다.
이뿐 아니라 ‘별의 전언’ 출간 이후 그는 학계의 스타가 됐다. 1611년 갈릴레오는 로마를 방문해 망원경 관측을 시연하면서 자신의 천체관측 결과를 설명했다. 로마의 유력 귀족, 예수회 소속 학자, 고위 성직자들은 갈릴레오의 발견에 관심과 아울러 찬사를 보냈다. 교황 바오로 5세를 알현하고 로마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도 받은 갈릴레오는 유럽 최고의 과학자로서 인정받았다.
로마 방문은 이처럼 성공적이었으나 교황청 일각에서는 갈릴레오의 활동을 우려의 시선으로 예의주시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갈릴레오가 관측한 목성의 위성이나 금성의 위상 변화는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했다. 따라서 갈릴레오의 발견은 가톨릭교회가 중세 이후 신봉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과 이를 수학적으로 발전시킨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 우주론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었다. 갈릴레오 역시 자신의 관측 결과가 교회의 전통적 견해가 아니라, 16세기 전반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착안한 지동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확신했다.
지동설 주장 뒷받침하다 … 죽을 때까지 가택연금
코페르니쿠스 우주론의 적합성을 알리는 것이 과학자로서 사명이라고 생각한 갈릴레오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이론이 가톨릭 교리와 배치하지 않음을 설명하고자 1615~16년 다시 로마를 방문했다. 하지만 그는 설득에 실패했고 오히려 비공식적이지만 로마교회 성직자에게서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견지하거나 방어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지금껏 묵인돼왔던 코페르니쿠스 저술도 갈릴레오가 경고를 받은 직후 금서로 지정됐다.
위험을 감지한 갈릴레오는 한동안 침묵했지만 1623년 우르바노 8세가 새 교황으로 취임하면서 다시 희망을 갖게 됐다. 새 교황은 1611년 추기경 시절 로마에서 만난 뒤 오랫동안 친분관계를 유지하던 인물이었다. 1624년 로마를 방문해 교황을 알현하며 자신에 대한 호감을 확인한 갈릴레오는 용기를 내 지구의 움직임을 주장하는 책을 펴냈다. 1632년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대한 대화’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이 저술에서 갈릴레오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 그리고 그 증거로서 조수(潮水)에 관한 견해를 기술했다.
로마에서 출판 허가가 나지 않아 피렌체에서 출간한 이 책에 대한 로마교회의 반응은 교황청의 분위기를 갈릴레오가 완전히 오판했음을 보여주었다. 출판 직후 교황청에서는 위원회를 구성해 이 책을 조사했고, 이듬해 갈릴레오를 종교재판에 회부했다. 재판부는 갈릴레오가 이미 오래전 교회당국의 비공식 경고를 받았음을 밝혀냈고, 이를 다시 위반했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로마로 소환된 갈릴레오는 두 달 동안 네 차례에 걸쳐 심문을 받았는데, 첫 심문부터 자신의 신념을 철회하고 잘못을 인정했다. 교회와 사전 타협에 따라 굴욕적인 자백의 대가로 자비가 베풀어졌다. 갈릴레오는 유죄판결이 났지만 투옥은 면하고 가택연금으로 감형됐던 것이다.
1642년 죽을 때까지 피렌체 인근 자택에서 연금 상태로 지냈던 갈릴레오는 종교에 의해 과학자의 소신이 꺾이고 부당하게 희생된 경우였다. 로마 교황청은 무려 350년이 지난 1992년 그를 부당하게 대우했음을 인정하고 완전 복권을 선언했다. 그럼에도 당시의 역사적 맥락을 감안하면, 일방적으로 시비를 가리려는 데는 문제가 있었다. 갈릴레오와 교회가 갈등을 빚었던 당시는 가톨릭교회가 신교에 맞서 교리를 정비하고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해 개혁을 진행하던 시대였다. 또 정치적으로 1618년에 시작된 30년 전쟁이 전 유럽으로 확대되던 때였다.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30년 전쟁의 와중에 교황에게는 해가 뜨고 지는 현상의 본질을 둘러싼 논란보다 긴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산적했다. 특히 교황은 갈릴레오의 주장이 진실 여부를 따지는 실체적 논증이 아니라 천문학적 추론에 머물기를 원했다. 아직 완벽하게 증명할 수도 없는 가설 때문에 신앙체계가 전면적으로 흔들리는 것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결국 갈릴레오 사건은 과학의 본질과 한계에 대한 인식을 서로 달리함으로써 나타난 비극이었다. 사실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판단은 완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끊임없이 심사숙고하고 성찰할 대상이다. 더구나 철저히 세속화된 오늘날 종교는 갈릴레오 시대와는 달리 과학에 대해 강자가 아니라 절대적인 약자의 위치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의 존재 이유를 일절 부인하는 발언이 과연 바람직한지 의문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