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스캔들로 손꼽히는 헨리 8세(위)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앤 불린.
영국은 중세부터 지속된 오랜 왕정의 전통만큼이나 왕실 혼사에 얽힌 이야기도 많다. 하지만 그 가운데 16세기 초 튜더왕조 헨리 8세의 혼사에 비교할 만한 것은 없다. 1509년 즉위해 1547년 사망한 헨리 8세는 40년 가까운 재위기간 중 모두 여섯 차례 결혼했다. 거듭된 그의 혼인은 당시 잉글랜드뿐 아니라 전 유럽을 떠들썩하게 했고, 특히 두 번째 결혼은 영국사의 전환점이 되는 종교적, 국가적 변혁의 발단이 됐다.
헨리 8세의 첫 번째 왕비는 에스파냐의 공주 캐서린이었다.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라와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난 캐서린은 원래 헨리 8세의 형인 아서 왕세자의 처였다. 캐서린과 아서의 혼인은 정략적인 것이었다. 헨리 8세의 부친 헨리 7세는 백년전쟁 이후 강국으로 부상하던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 경쟁관계에 있던 에스파냐와 동맹을 추구했는데, 아서와 캐서린의 결혼은 그것을 위한 수단이었다.
형수 캐서린과 결혼 갈등과 반목하다 파경
그러나 1501년 두 사람의 혼인은 반년도 못 돼 아서가 병사함으로써 끝이 났다. 헨리 7세는 에스파냐와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캐서린을 차남인 헨리 8세와 다시 결혼시키는 방안을 추진했고,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은 뒤 헨리 8세가 헨리 7세의 뒤를 이어 국왕에 즉위한 1509년 마침내 혼인이 성사됐다. 그러나 헨리 8세의 결혼은 교회가 형수와의 혼인을 금했다는 점에서 적법성에 문제가 있었다. 교황은 캐서린이 짧은 초혼 기간 중 처녀성을 유지했다는 이유로 이 결혼을 허가했지만 성서의 가르침에 비추면 말썽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헨리 8세는 외모가 출중한 데다 다방면에 재능을 지닌 인물로 카리스마와 개성이 강했다. 호방하고 활달한 성품으로 국민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부심이 강하고 다혈질이며 고집불통이었다. 캐서린과의 결혼은 부친의 뜻에 따른 정략적인 것이었으나 본인의 의사에 반(反)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홀로 된 형수를 동정하고 흠모했었다. 그러나 캐서린에 대한 그의 마음은 열정적 사랑이라기보다 여성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중세 기사도의 덕목에 가까운 것이었다.
헨리 8세와 캐서린은 결코 좋은 인연이 아니었다. 다른 어떤 왕비보다 캐서린과의 혼인이 오래 지속됐으나 두 사람의 결혼은 갈등과 반목으로 얼룩지고 결국 파경을 맞는 불행한 것이었다. 파경의 가장 큰 이유는 캐서린이 왕위를 계승할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캐서린은 결혼 후 10년 가까운 기간에 여섯 차례나 출산했지만 딸 메리를 제외하고는 사산과 유아 사망으로 더 이상의 자녀를 얻지 못했다.
아들을 원했던 헨리 8세의 실망은 커갔고, 그것은 여성편력으로 이어졌다. 6년 연상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여성으로서 매력을 잃었던 왕비를 대신해 활력이 넘치는 젊은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은 앤 불린이었다. 앤의 부친은 대(大)상인 가문의 평민 출신으로 헨리 8세의 궁정관리가 된 인물이었고, 앤은 부친의 주선으로 프랑스, 벨기에 등에서 궁정 생활을 한 뒤 캐서린의 시녀가 된 여성이었다. 앤과 캐서린은 여러모로 대비됐다. 캐서린은 신앙심이 강하고 원칙을 존중하며 몸가짐이 엄격하고 의지가 강한 반면, 앤은 세련되고 재기 발랄하며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다.
앤을 총애하게 된 헨리 8세는 1526년 앤에게 청혼하고 캐서린과 이혼하려 했다. 그러나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에는 교회의 승인이 필요했고 이에는 적합한 사유가 있어야 했다. 헨리 8세는 교회법이 형수와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은 헨리 8세의 의도대로 풀리지 않았다. 캐서린은 헨리 8세와 혼인 당시 처녀성을 유지했음을 맹세하며 이혼을 거부했고, 로마교황도 헨리 8세의 이혼 허락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교황의 부정적 태도에는 1527년 로마를 점령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영향을 미쳤는데 그는 캐서린의 친정 조카였다.
토머스 모어 ‘앤’과 혼인 반대하다 목숨 잃어
2011년 4월 결혼을 발표한 영국의 윌리엄 왕자와 약혼녀 케이트 미들턴의 다정한 모습.
로마교황과 결별한 헨리 8세는 이혼 문제도 마음대로 처리했다. 1533년 루터의 신교사상에 동조했던 케임브리지 신학자 크랜머를 신임 캔터베리 대주교에 임명해 캐서린과의 결혼이 무효임을 선언토록 하고, 이미 임신한 채 비밀리에 결혼한 앤을 정식 왕비로 책봉했다. 그리고 앤이 곧 딸 엘리자베스를 낳자 이듬해 캐서린의 딸 메리 대신 앤의 자녀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왕위계승 법을 공표했고, 동시에 이 원칙을 수용하겠다는 선서를 모든 신민에게 요구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대역죄로 규정했다.
혼사 문제로 영국 왕국을 대내외적으로 혼란과 갈등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던 헨리와 앤은 드디어 원하던 바를 성취했지만 그들의 혼인은 결코 축복받지 못했다. 버림받은 왕비 캐서린에게 동정적이었던 여론은 국왕의 재혼에 부정적이었다. 특히 가톨릭 신앙에 충실한 고위 성직자나 국민들은 신교사상에 호의적이었던 앤을 싫어했으며, 앤과의 결혼에 대한 비판이 금지됐음에도 혐오와 불만의 감정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그리하여 헨리 8세와 앤의 혼인으로 목숨을 잃는 희생자가 생겨났는데, 그 가운데는 왕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대법관직에까지 올랐던 당대 최고의 문사 토머스 모어가 포함됐다. 그는 캐서린과의 이혼을 반대하고 헨리가 요구한 왕위계승 원칙에 대한 선서를 끝까지 거부하다 참수당했다.
축복받지 못한 혼인이었다는 것은 무엇보다 앤에 대한 왕의 총애가 오래가지 못함으로써 드러났다. 앤은 엘리자베스 출산 이후 왕이 학수고대하던 아들을 얻지 못한 채 사산을 거듭했다. 헨리 8세는 저주와 악몽으로 여긴 첫 결혼의 경험이 반복될까 두려워했고, 곧 제인 시모어라는 새로운 여인에게 눈을 돌렸다. 캐서린과 달리 왕의 바람을 참지 못한 앤은 시기와 질투로 헨리와 충돌했고, 앤에게 염증을 느낀 헨리 8세는 최측근 심복 토머스 크롬웰이 제기한 간통혐의를 명분으로 1535년 그녀를 처형했다. 뜨거운 열정으로 시작한 헨리 8세와 앤의 관계는 냉혹한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7년여 기다리다 불과 1000일 남짓 왕비 자리에 머물렀던 앤에 대한 평가는 진실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종파에 따라 극단적으로 갈린다. 가톨릭에서 앤은 왕을 유혹한 요부이자 적통의 왕비와 공주를 제거하려 한 악녀인 반면, 개신교에서 그녀는 신교도의 보호막이 된 거룩하고 성스러운 성녀이자 궁정 권력의 음모에 희생된 비련의 여인이다. 여하튼 생전에 기복 심한 삶을 살았던 앤의 결혼은 사후에야 행운과 축복이 주어졌다. 헨리 8세 사후 딸 엘리자베스가 제인 시모어가 낳은 아들 에드워드 6세, 캐서린의 딸 메리에 뒤이어 왕위에 올라 45년간의 치세를 통해 역대 어느 군주보다 빛나는 송덕과 찬미의 대상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