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을 그린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그래선지 행복에 대한 논의도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서양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행복의 문제를 철학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은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선(supreme good)’이 바로 ‘행복(eudaimonia)’이며, 행복은 ‘덕(德·virtue)’을 통해 얻어진다고 생각했다. 이때 ‘덕’이란 ‘이성’, 즉 선악을 구분하고 사리를 분별하는 능력과 의지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인간’을 삶의 길잡이로 제시한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위해 독배를 마심으로써 이성에 따라 덕을 좇는 삶의 모범을 몸소 실천해 보였다.
모든 철학적 논의가 그렇듯 행복론도 그리스 고전 철학에서 출발하지만 행복에 관한 서양 고대의 논의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헬레니즘 철학이다. 종종 헬레니즘 철학은 고전 철학에 가려 빛을 잃지만 행복에 관한 논의에서만큼은 한층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헬레니즘 철학의 핵심 주제가 바로 ‘행복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이기 때문이다.
‘행복전도사’ 불행한 죽음으로 안타까운 결말
행복에 대한 헬레니즘 철학의 관심은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헬레니즘 시대, 즉 기원전 4세기 후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제가 그리스를 정복한 뒤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전성기의 활력을 잃고 사실상 생명력을 상실했다. 정치적 부패와 혼란으로 시민공동체로서 폴리스의 성격은 사라졌으며, 사회적으로도 기강이 무너지고 퇴폐와 향락 풍조가 만연했다.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인들은 폴리스의 공동체 질서가 무너진 뒤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뿔뿔이 흩어진 원자적 존재로서 방황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엇이 진리이고 정의인가 하는 사변적 문제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현실적 문제가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헬레니즘 철학은 ‘삶을 위한 철학’이요, ‘삶의 기술(the art of living)’이라 일컬을 정도로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 철학의 최고 관심사는 ‘최선의 삶’ ‘행복한 삶’이었다. 행복, 그리고 행복에 이르는 방법에 관해 헬레니즘 철학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사모스 출신의 에피쿠로스(기원전 341~270)가 창시한 에피쿠로스학파와 키프로스 출신 제논(기원전 334~262)을 시조로 한 스토아학파가 그것이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제가 그리스를 정복한 뒤,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부패와 혼란으로 생명력을 잃었다.
에피쿠로스, “욕망 버려야 마음 평정 얻는다”
그럼에도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철학을 ‘쾌락’과 ‘금욕’의 윤리로 대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것은 많은 부분 에피쿠로스철학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됐다. 에피쿠로스철학은 그가 직접 항의할 정도로 이미 당대부터 반대자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왜곡되는 경향이 있었고, 그런 왜곡이 후대의 인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에피쿠로스가 행복과 관련해 쾌락의 가치를 역설한 것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방탕하고 향락적인 생활을 옹호한 것은 결코 아니다.
우선 그는 행복을 얻기 위해 쾌락은 최대화하고 고통은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무조건 쾌락만 추구하고 고통은 회피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당장 쾌락을 가져오지만 향후 더 큰 고통을 가져오는 경우 쾌락은 포기해야 하고, 거꾸로 지금은 괴롭더라도 나중에 더 많은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고통은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가르침이었다.
에피쿠로스는 행복을 얻기 위해 쾌락은 최대화하고고통은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행복을 위해 어떤 욕구는 추구하고 어떤 것은 단념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에피쿠로스는 욕구를 세 종류로 나누어 답했다. 첫째, 자연적이고 필요한 욕구다. 그것은 기본적인 의식주와 관련된 욕구처럼 대다수 사람이 비교적 쉽게 충족시킬 수 있는 반면 억제하기 대단히 어려운 것들이다. 둘째, 고급 음식이나 사치품에 대한 욕망처럼 자연스럽지만 불필요한 욕구다. 에피쿠로스는 이러한 욕망에서 얻는 쾌락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불필요하다고 여겼다. 허기를 채운 뒤 산해진미가 별 가치가 없듯 불필요한 욕구는 필요한 욕구의 충족을 능가하는 쾌락을 주지 못하며, 나아가 그것을 쉽게 충족시킬 수 없는 처지라면 쾌락은커녕 고통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부자연스럽고 불필요한 욕구인데 부, 권력, 명예에 대한 욕구가 이에 속한다. 이 부류의 욕구는 인간 본성이 아니라 사회나 개인의 잘못된 생각이 만들어낸 것으로 성취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반면, 억제하기는 상대적으로 쉽다. 식욕은 짧은 시간 내 충족되지만 금전욕은 일생 지속되며, 식욕보다는 금전욕을 단념하기가 용이한 법이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자연스럽지 않거나 필요하지 않은 욕망이란 결코 충족되지 않으며 채울수록 오히려 더 커지고 그만큼 더 큰 고통을 초래하므로 가능한 한 버려야 한다.
결국 에피쿠로스는 이론적으로는 괘락주의를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금욕주의를 설파했다고 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에게 행복의 요체는 쉽게 이룰 수 있는 기본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되도록 욕망을 버림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얻는 것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그는 금욕의 도리를 아는 안분지족(安分知足)에서 행복을 찾았던 것이다. 물론 쾌락 그 자체는 무엇이든 좋은 것이라 여겼던 에피쿠로스를 금욕의 옹호자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쾌락은 욕구의 충족과 동시에 한계에 이르며, 쾌락보다 더 큰 고통이 따르는 욕구는 어떤 것이든 금해야 한다고 역설한 점에서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