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5일 밤늦게 귀국한 태광그룹 이호진 회장.
이 때문일까. 법조계에선 검찰의 수사 의지가 어느 때보다 강한 만큼 이번에는 과거 삼성, CJ 등 대기업의 비자금 수사처럼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로비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연말연초 정관계에 검찰발(發) 쓰나미가 몰아칠 것으로 보인다.
태광그룹과 한화그룹의 편법 증여 및 비자금 의혹을 수사 중인 서울서부지검 형사5부(부장 이원곤)는 두 그룹의 비자금 조성 규모와 정치권, 정부기관 등에 대한 로비 혐의를 입증하는 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봉욱 서부지검 차장검사는 “두 그룹 모두 수사의 초점은 비자금이고, 그 규모와 용처 파악에 주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김 총장이 국정감사에서 “두 그룹의 비자금 실체를 밝히겠다”고 언급한 뒤 검찰의 수사는 날개를 단 분위기다.‘정관계 검찰발 쓰나미’ 예측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법조계 안팎에선 김 총장의 발언을 1조 원대로 알려진 태광그룹 비자금과 최소 300억 원대로 파악된 한화그룹 비자금의 사용처를 철저히 파헤치겠다는 의미로 풀이한다.
공정사회 ‘사정 쓰나미’ 몰아칠 듯
검찰은 태광그룹의 경우 2006년부터 청와대와 방송통신위원회(전 방송위원회·이하 방통위) 전·현직 고위간부, 여야 정치인을 상대로 광범위하게 로비를 해온 것으로 보고 있다. 태광이 금융·미디어 그룹으로 기업구조를 재편하면서 정관계를 대상으로 폭넓게 로비를 벌였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은 로비 입증을 위해 태광그룹의 비자금 조성에 관여한 ‘재무라인’을 집중 조사하고 있다. 태광 창업주인 고(故) 이임용 회장 때 태광의 회계를 담당했고, 현 이호진(48) 회장 때에도 경리일을 하고 있는 태광의 ‘집사’ 박명석(61) 대한화섬 대표를 10월 19일 전격 소환 조사한 데 이어, 10월 20일에는 태광가(家)의 최측근 인사이자 회계를 맡았던 전·현직 임직원을 줄줄이 소환했다.
문제는 이번 소환 조사의 성격이다. 검찰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들에 대한 수사는 혐의를 추가로 캐내는 기초단계를 뛰어넘어 확인단계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어떤 혐의나 단서를 추가로 얻겠다는 수준이 아니라 물증을 들이밀고 확인하는 단계라는 얘기다. 수사진 관계자는 “태광에 대한 제보가 워낙 많고, 제보 수준이 ‘핀으로 집은 듯’ 정확해서 수사진 전체가 자신감이 넘친다”고 전했다.
검찰이 태광그룹의 비자금 관리에 관여한 인사를 연이어 소환 조사하는 등 비자금의 흐름과 용처를 캐는 데 총력을 기울일 수 있는 것도 ‘증거 능력을 갖춘 족집게 제보’ 때문이다. 비자금 부분에 대한 검찰 수사의 통상적 절차는 먼저 회계장부를 정밀 검토하고 자금흐름 전반을 파악한 뒤, 비자금과 관련된 핵심인사를 소환하는 것. 하지만 이번 수사는 곧바로 비자금의 출구, 즉 정관계 로비 의혹의 단서를 밝혀내는 쪽으로 ‘직행’했다.
검찰이 태광의 비자금과 관련된 단서가 있을 것으로 짐작하는 곳을 파상적으로 압수수색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검찰 주변에선 압수수색도 족집게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검찰은 10월 13일 서울 중구 장충동 태광산업 본사와 고려상호저축은행 등 계열사를 전격 압수수색한 것을 시작으로 16일 종로구 신문로 흥국생명 빌딩 24층 이 회장 사무실, 장충동 자택, 부산 골프연습장 등을 압수수색했다. 18일에는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을 압수수색해 2007년 태광그룹에 대한 특별세무조사의 1600억 원대 비자금 관련 자료 일체를 확보했다. 검찰은 서울지방국세청이 비자금에 대한 추징금만 물린 채 고발을 하지 않은 점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검찰의 압수수색은 차명주식 등 상당 부분의 비자금을 수십 년간 관리해온 것으로 알려진 이 회장의 어머니 이선애(82) 태광산업 상무의 자택으로 확대됐다. 검찰 수사는 이 상무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두 차례 법원에서 기각되면서 난항을 겪는 듯했으나 20일 법원이 전격적으로 영장을 발부하면서 급물살을 탔다.
수사 초기지만 검찰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의 자택·사무실 압수물과 소환 조사를 받은 태광 임직원의 진술 등을 토대로 청와대·방통위·정치권 인사 100여 명의 리스트를 확보했고, 이들 중 청와대·방통위의 전·현직 간부 10여 명에 대해선 로비를 입증할 정황 증거와 구체적인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또 이 회장이 청와대와 방통위 등에 대해 조직적으로 인맥을 관리했다는 진술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태광 임직원 조사에서 “이 회장이 방통위와 청와대 등에 우호적인 인사를 만들려고 학벌과 인맥이 좋은 직원을 추천해 각종 작업을 벌였다”는 진술도 받아둔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의 또 다른 관계자는 “태광 수사에서 구멍 난 곳을 채울 게 별로 없다”며 비자금 수사에 자신감을 보였다.
‘제2 중수부’ 서부지검에 이목 집중
1 검찰의 압수수색이 있었던 태광그룹 계열사 흥국생명 본사. 2 한화그룹 본사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하고 있는 서울서부지검 수사팀.
검찰이 당초부터 한화그룹에 대한 수사를 조세 포탈이나 증여세 탈루로 제한하지 않은 정황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차명계좌 5개가 불거졌을 당시 한화 측은 자발적으로 56개의 차명계좌를 검찰에 전해줬다. 이때만 해도 한화 측은 검찰 수사가 비자금 수사로 진행될 것이라고 판단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검찰 수사가 비자금으로 방향을 틀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검찰은 한화 관계자를 소환해 비자금의 용처에 대해 집중수사를 벌이면서 정치권에 비자금이 유입됐는지도 캐물은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한화 측은 “차명계좌는 비자금이 아니며 선대 회장한테서 물려받은 재산”이라며 시종일관 정치권 비자금 유입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문제는 검찰이 한화 측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주느냐다. 현 상황으로 볼 때 이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법조계에선 검찰이 한화에 대한 본격 수사에 착수하기 전 이미 차명계좌에 조성된 돈이 친인척에게 흘러들어간 정황을 포착했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져 있다. 대검 중수부가 내사단계에서 이런 정황을 파악했다는 설도 있다. 검찰이 한화그룹 본사와 한화증권 여의도 사무실, 계열사인 태경화성 등을 대대적으로 압수수색한 것도 이런 설을 뒷받침한다. 단순히 김승연 한화 회장의 증여세 탈루 등의 혐의를 캐려고 그 많은 곳에 대한 압수수색을 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한편 검찰의 대기업 수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확대되는 형국이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이하 중수부·부장 김홍일)는 21일 C·그룹 서울 장교동 본사 및 각 계열사를 압수수색하고 임병석 회장을 긴급체포했다. C·그룹은 C·해운과 C·상선, C·우방 등 41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으며, 노무현 정부 시절 급성장한 기업. 중수부가 직접 수사에 나선 것은 지난해 6월 ‘박연차 게이트’ 수사 이후 처음이다.
중수부는 재계 10위권에 드는 S·Y그룹, 또 다른 S그룹 등 대기업 3곳의 비자금 조성 의혹에 대해 내사를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 중 한 곳이 해외에 불법 비자금을 조성해 그중 일부를 정·관계 로비자금으로 사용했다는 단서를 잡은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