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불법사금융이 디지털 공간을 매개로 한층 기승을 부리고 있다. 사진은 서울 시내 한 거리에 뿌려진 불법사금융 전단. [뉴스1]
카톡방에 지인들 강제 초대해 협박
최근 불법사금융 일당으로부터 금전적 피해뿐 아니라, 나체 사진 유포 피해까지 입은 30대 A 씨는 12월 12일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하소연했다. 신용등급이 낮아 제도권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릴 수 없던 A 씨는 사채를 쓰기 시작했다. 도박이 문제였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개인돈’ ‘갠돈’ 같은 검색어를 입력하면 소액을 빌려준다는 각종 대부업체 사이트와 블로그, 카페가 쉽게 노출됐다. 올해 초 불법사금융업자는 A 씨에게 얼굴이 드러나도록 ‘셀카’를 찍어 보내라고 요구했다. 당초 빌린 돈은 20만 원 정도였지만, 법정 최고치 20%를 훌쩍 넘는 이자율에 갚아야 할 돈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터였다. “이미 원금과 이자보다 훨씬 많은 돈을 갚지 않았느냐”고 항의하자 불법사금융 일당의 압박 수위는 더 높아졌다. 그들은 이미 A 씨의 스마트폰을 자기네 스마트폰과 동기화하는 애플리케이션(앱)을 설치하게 해 지인들 전화번호를 확보한 상태였다. 일당이 지인들을 강제로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 초대해 “A가 당신들로부터 돈을 대신 받으라며 전화번호를 넘겼다”고 협박하자, A 씨는 “나체 사진을 촬영해 보내라”는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A 씨는 불법사금융 일당에게 당한 피해를 ‘주간동아’에 제보한 이유를 묻자 “도박에 빠져 사채를 쓴 것은 분명 내 잘못이다. 나 같은 피해자가 많을 텐데 대부분 불법추심이 무서워 말도 못 꺼내고 있을 것이다. 이 나라에서 불법사채 자체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A 씨의 나체 사진을 유포한 일당은 이미 비슷한 형태의 불법추심으로 경찰 추적을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들은 온라인에서 비대면으로 ‘대포폰’ ‘대포통장’만 쓴 일당의 얼굴과 본명도 모르는 상태라 수사는 난항을 겪고 있다.
최근 불법사금융은 살인적 이자율은 물론, 불법추심 수위가 높고 수법 또한 교묘해지는 양상을 띠고 있다. 디지털 공간에 숨어 합법을 가장한 채 피해자를 속이고, 조직적·계획적으로 움직이는 게 특징이다. 취재에 응한 또 다른 불법사금융 피해자인 30대 B 씨는 인터넷 대출 플랫폼에서 알게 된 업체로부터 돈을 빌렸다. 그가 처음 수십만 원을 빌린 곳은 합법적 업체를 표방했으나 상환이 미뤄지자 이내 본색을 드러냈다. B 씨의 직장 사무실로 동시다발적으로 전화해 “그 회사 직원이 사채를 썼다”며 업무를 마비시킨 것이다. 그는 “연락처를 함부로 넘긴 내 잘못도 크지만, 불법사금융 일당이 대포폰과 대포통장으로 수사망을 피해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를 것을 생각하니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이기동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 소장은 “최근 불법사금융은 조직적·계획적인 신종 피싱범죄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이 소장은 불법사금융 피해자를 여럿 돕고 있는데, 하루에도 많게는 20명 이상이 도와달라는 연락을 해온다고 한다. 한때 보이스피싱 조직에 가담해 2년 6개월 징역을 살기도 한 그는 마음을 고쳐먹고 ‘보이스피싱과 대포통장의 정체’라는 책을 쓰는 등 피싱범죄의 심각성을 알리고 있다. 2017년 소년원 출원생을 지원하는 법무부의 ‘푸르미 서포터즈’로 위촉되기도 했다. 피싱 조직 생리와 수법에 밝은 이 소장은 최근 불법사금융 범죄의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과거에는 길거리에서 전단이나 명함을 본 사람이 사채업자 사무실을 직접 찾아가 돈을 빌렸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비대면 금융 거래가 활발해지자 인터넷에 각종 대출 플랫폼이 생겨났는데, 여기에 대부업체들이 광고를 한다.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개인돈’ 등 검색어를 입력해도 돈을 빌려준다는 블로그와 카페가 여럿 뜬다. 상당수가 합법을 가장한 불법사금융업체다. 이들에게 온라인으로 연락한 사람들의 전화번호 등 개인정보는 불법사금융 조직의 ‘빅데이터’가 된다. 이들은 광고팀, 상담팀, 인출팀, 협박팀으로 역할을 분담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데, 피해자와 오프라인 접점은 없다. 피해자는 ‘△차장’ ‘실장’ 같은 닉네임을 쓰는 불법사금융업자의 실명, 얼굴도 모른 채 온라인에서 돈을 빌리는 것이다. 돈을 보내라고 알려준 계좌는 대포통장이고, 피해자를 협박할 때 쓰는 전화는 대포폰이다. ‘이자를 깎아주겠다’며 또 다른 피해자를 회유해 받아낸 대포폰과 대포통장을 계획적으로 악용하는 것이다.”
“이자 깎아주겠다” 대포폰·통장 확보해 악용
불법사금융으로 인한 피해는 갈수록 늘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국민의힘 서범수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금감원 불법사금융 피해신고센터에 접수된 상담·신고 건수는 6784건에 달한다. 연간 기준으로 봐도 2019년(5468건)부터 지난해(1만913건)까지 매년 증가 추세다. 불법사금융 피해가 심각해지자 윤석열 대통령은 11월 9일 금감원 불법사금융 피해신고센터를 직접 찾아 “불법사금융을 끝까지 처단하고 불법이익을 남김없이 박탈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부는 ‘불법사금융 척결 범정부 태스크포스(TF)’를 운영하는 등 대응 마련에 나섰다. 금감원은 내년 1월 30일까지 대부업체를 대상으로 특별점검에 나섰고, 대한법률구조공단과 함께 불법대부계약을 무효로 하는 피해자 소송도 무료 지원할 방침이다. 민법상 ‘반(反)사회적 계약’으로서 계약 자체를 무효화하는 판례를 이끌어내 불법사금융 피해를 줄이겠다는 취지다.하지만 전문가들은 이와 같은 정부 조치로는 당장 불법사금융을 발본색원하기 어렵다고 우려했다. 이기동 소장은 “피해자가 불법사금융 일당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라 금융·수사 당국이 당장 규제와 단속을 강화한다 해도 근본적 해결은 어렵다”며 “불법사금융 조직의 주된 무기인 대포통장과 대포폰의 악용 및 유통을 철저히 막고 강력히 처벌해야 불법추심뿐 아니라, 조직적 범죄 자체를 막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백주선 법무법인 융평 대표변호사(한국파산회생변호사회 정책이사)는 “이자제한법, 채권추심법 등 관련법을 개정해 법정 최고이자율을 넘기는 불법대출계약 자체를 무효화하고 부당한 추심 행위 기준도 구체화해 강력히 처벌할 필요가 있다”며 “불법사금융을 근절하려면 국가가 금융취약계층을 복지제도와 서민금융을 통해 보호하는 근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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