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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덕쟁이 앤 여왕의 치세가 후대에 남긴 것들

영화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에 처칠과 스위프트는 왜?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2019-03-11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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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화가 마이클 달이 그린 앤 여왕 초상화(1705년·왼쪽)와 영화 속 앤 여왕(올리비아 콜먼 분). [위키미디어, 사진 제공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영국 화가 마이클 달이 그린 앤 여왕 초상화(1705년·왼쪽)와 영화 속 앤 여왕(올리비아 콜먼 분). [위키미디어, 사진 제공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영화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는 영국 앤 여왕의 시대(재위 1702~1714)를 다룬다. 영국 역사에서 앤이란 이름의 여왕은 단 한 명이다. 그래서 앤 1세가 아니라 그냥 앤 여왕이다. 

    영화는 앤 여왕(올리비아 콜먼 분)의 총신(favourite) 자리를 놓고 여왕의 소꿉놀이 친구였던 말버러 공작부인 사라(레이철 바이스 분)와 사라의 사촌으로 가문이 몰락해 하녀가 됐지만 다시 귀족 복귀를 꿈꾸는 애비게일(엠마 스톤 분) 간 암투를 블랙코미디로 그려낸다. 영화에서 앤 여왕은 외모에 자신감이 없는 데다 통풍에 시달리는 열등감 덩어리이자 변덕쟁이로 나온다. 앤 여왕을 연기한 콜먼은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해 더욱 화제가 됐다. 

    앤 여왕의 치세는 조선 19대 왕 숙종의 치세(1674〜1720)와 겹친다. 한국 사극 속 숙종은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 사이에서 오락가락한, 우유부단한 남자로 그려지기 일쑤다. 그래서 영화 속 앤은 숙종, 사라는 인현왕후, 애비게일은 희빈 장씨를 연상케 한다. 물론 조선에선 ‘왕의 여자들’인 반면, 영국에선 ‘여왕의 여자들’이라는 차이가 존재하지만.

    조선 숙종 닮은 영국 앤 여왕

    애비게일 마샴 남작부인의 초상화 (17세기 추정·위)와 영화 속 애비게일 (엠마 스톤 분). [사진 제공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위키미디어]

    애비게일 마샴 남작부인의 초상화 (17세기 추정·위)와 영화 속 애비게일 (엠마 스톤 분). [사진 제공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위키미디어]

    인간의 약점을 거침없이 파고드는 도발적 상상력으로 최근 각광받는 그리스 출신 영화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18세기 초 영국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스캔들을 레즈비언 삼각관계라는 발칙한 상상의 그물망으로 포획한다. 한국 사극 ‘여인천하’의 영국판을 보는 듯하다. 

    그래서 영화는 당대의 당파 투쟁을 원경으로 두고 여왕의 총애를 얻기 위한 사라와 에비게일의 ‘밀당’에만 초점을 맞췄다. 그러다 보니 당시 역사의 주역이던 남자들은 약삭 빠른 모리배 아니면 아둔한 호색한으로만 그려진다. 



    심지어 사라는 애비게일의 유혹에 넘어간 앤에게 “그동안 받은 야한 러브레터들을 언론에 공개하겠다”고 협박하면서 ‘걸리버 여행기’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를 ‘기레기’ 취급한다. 또 전쟁 영웅인 사라의 남편 존 처칠(1650~1722·마크 게티스 분)마저 아내 치마폭에 둘러싸인 팔불출처럼 묘사한다. 

    영국사에 정통한 관객이라면 이런 설정에 폭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대 영국사에 문외한인 관객에겐 자칫 정사(正史)로 받아들여질 우려가 있다.

    18세기를 연 앤 여왕의 치세는 의미심장했다. 스코틀랜드 혈통인 스튜어트 왕가의 마지막 왕인 동시에 1708년까지 독립왕국이던 스코틀랜드를 통합해 오늘날 영국 국호인 ‘브리튼 연합왕국’을 실현시킨 초대 왕이었기 때문이다. 영국 국기인 유니언 잭도 이때 만들어졌다. 또 ‘태양 왕’으로 불리던 프랑스 루이 14세와 맞대결(에스파냐 계승 전쟁)을 펼쳐 에스파냐와 프랑스를 통합하려던 그의 야욕을 꺾었다. 그 승리의 대가로 식민지를 확장해 대영제국의 초석을 놓았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 선봉장이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윈스턴 처칠의 8대조 조상인 초대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이다. 육군이던 처칠은 수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는 전설의 무인(武人)이다. 전통적으로 해군이 강한 영국이지만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정복할 뻔했던 헨리 5세,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최종 패배를 안긴 웰링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로멜을 격퇴한 버나드 로 몽고메리와 함께 손꼽히는 지상전의 영웅이다. 

    존 처칠의 업적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영화 초반 모델하우스로 잠깐 등장하는 블레넘 궁전에서도 확인된다. 1704년 처칠이 이끄는 영국-오스트리아 연합군이 오스트리아 블렌하임(블레넘의 독일어 발음)에서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해 앤 여왕이 처칠에게 하사한 이 궁은 왕실 소유가 아님에도 유일하게 궁(palace)으로 불리는 대저택이다. 윈스턴 처칠은 바로 여기서 태어났다.

    토리와 휘그, 양당정치의 개화

    영국 화가 찰스 저바스가 그린 말버러 공작부인 사라 처칠의 초상화 (1700년 경·아래)와 
영화 속 사라 처칠 (레이철 바이스 분). [위키미디어, 사진 제공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영국 화가 찰스 저바스가 그린 말버러 공작부인 사라 처칠의 초상화 (1700년 경·아래)와 영화 속 사라 처칠 (레이철 바이스 분). [위키미디어, 사진 제공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그럼 조나선 스위프트는 왜 기레기 취급을 받는 걸까. 앤 여왕 치세에 영국 의회가 토리(Tory)와 휘그(Whig)의 양당체제 위에 확립됐음을 알아야 한다. 

    토리는 ‘도적떼’라는 뜻의 아일랜드어 ‘to′raidhe’에서 기원한 말로, 가톨릭 신자인 제임스 2세를 국교도(성공회) 국가인 잉글랜드 왕으로 추대하는 것을 지지한 왕당파 세력에 대한 비칭이었다. 휘그 역시 ‘가축 도적’을 뜻하는 스코틀랜드어 ‘whiggamore’에서 기원한 말로, 제임스 2세 추대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비칭이었다. 토리와 휘그는 제임스 2세가 반국교도 정책을 펼치자 1688년 단합해 그를 왕좌에서 몰아내고 그의 맏딸이자 국교도인 메리(메리 2세)와 그 남편인 네덜란드 오라녀 공작 윌리엄(윌리엄 3세)을 왕좌에 앉힌다. 이것이 명예혁명이다. 

    이들 부부 왕이 후손 없이 모두 숨지는 바람에 메리의 여섯 살 연하 여동생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그가 바로 앤 여왕(1665~1714)이다. 앤은 팔자 사나운 여자였다. 열여덟 나이에 덴마크 크리스티안 5세의 동생인 조지 왕자에게 정략결혼으로 시집가야 했고 부친이 프랑스로 추방당한 뒤엔 왕위 경쟁자라는 이유로 언니 부부로부터 경원시됐다. 

    운 좋게 왕위에 올랐지만 15~18명의 아이 대부분이 사산되거나 열 살 전에 죽었고, 본인은 지독한 통풍에 시달리다 결국 그 병으로 49세에 숨졌다. 자녀가 없었기에 영국 왕좌는 그녀의 사촌인 독일 하노버 왕가의 조지에게 넘어가게 됐다. 

    앤의 어린 시절 소꿉친구가 바로 다섯 살 연상인 사라 제닝스(1660~1744)였다. 사라는 열일곱 나이에 그녀의 재산을 노린 바람둥이 존 처칠과 결혼했다. 앤과 달리 사라는 행운아였다. 한량인 줄 알았던 처칠은 군사작전에 놀라운 재능을 지니고 있었고, 소꿉친구였던 앤이 최고권좌에 앉으면서 남편은 대외군사를 통솔하고 자신은 병약한 앤을 대신해 국내정치를 장악하며 궁까지 하사받는 공작부인이 됐다. 

    에스파냐 계승 전쟁(1701~1714)은 이들 부부가 승승장구할 수 있는 발판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13년이나 장기화하면서 전쟁 비용을 국비로만 충당하기 어렵게 되자 세금 인상 권한을 쥔 의회의 역할이 커졌다. 정치 및 신앙의 자유를 주장한 휘그당은 전쟁 승리의 대가를 많이 누리게 되는 상인계층의 지지를 받으면서 주전파가 됐다. 질서와 복종을 강조한 토리당은 전비 부담으로 세금 부담만 늘게 된 지주계층을 대변하며 주화파가 됐다. 

    당연히 말버러 공작부부는 주전파인 휘그당과 그 지도자인 시드니 거돌핀 재무상(당시엔 수상이 없었고 재무상이 내각의 수반)을 지지했다. 그 대척점에 선 토리당의 당수가 바로 로버트 할리(1661~1724·니컬러스 홀트 분)다.

    英 소설의 아버지들은 ‘남자 애비게일’

    영화 속 토리당 당수 로버트 할리(니컬러스 홀트 분). [사진 제공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영화 속 토리당 당수 로버트 할리(니컬러스 홀트 분). [사진 제공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영화에서 할리는 훗날의 남작부인 애비게일 마샴(1670?~1734)을 정보원으로 활용해 여당이던 휘그당을 물리치고 토리당 중심의 내각을 이끌며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전쟁을 종결한다. 애비게일은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앤의 침실을 파고들어 귀족 작위를 되찾은 뒤 사촌언니 사라 처칠을 밀어내고 왕실 재무총재를 맡게 된다. 그와 함께 말버러 공작부부는 횡령 혐의로 국외 추방된다. 

    이를 앤 여왕의 총애를 다툰 두 여인의 경쟁의 산물로만 볼 수 있을까. 숙종 시대를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의 애정 다툼으로만 보는 관점도 있지만, 애첩을 이용해 노론과 남인 세력을 견제하려 했던 숙종의 노련한 환국(換局)정치의 일환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마찬가지로 앤 여왕 역시 자신의 집권 기간 내내 독주한 사라와 휘그당을 견제하고 전비 부담을 덜기 위해 애비게일과 토리당을 기용했다는 정치적 해석도 가능하다. 

    토리당을 위해 할리가 끌어들인 인물은 애비게일만 있었던 게 아니다. ‘로빈슨 크루소’(1719) 작가 대니얼 디포와 ‘걸리버 여행기’(1726)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도 있었다. 할리는 휘그당 성향의 두 논객을 영입해 휘그당을 저격하는 정치 팸플릿과 신문기사 작성을 맡겼다. 사라가 앤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스위프트에게 넘기겠다고 협박한 이유다. 

    이처럼 앤 여왕의 치세에 영국 의회와 언론,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산문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세계 최초 신문 ‘데일리 쿠란트’가 런던에서 창간된 것이 앤 여왕 치세 첫 해인 1702년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디포와 스위프트는 그렇게 탄생한 저널리즘을 통해 얻은 필명을 토대로 훗날 영국 소설의 원형으로 불리는 고전들을 발표했으니 앤 여왕의 변덕을 과히 탓할 바는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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