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정몽주 묘, 바람이 잡아준 전국 8대 명당 중 하나”

[안영배의 웰빙 풍수] 개성에서 고향 영천으로 상여 향하다 회오리바람 일어 멈춘 곳

  • 안영배 미국 캐롤라인대 철학과 교수(풍수학 박사)

    입력2025-03-16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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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용인에 있는 포은 정몽주의 묘. 바람이 알려준 명당자리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경기도 제공]

    경기 용인에 있는 포은 정몽주의 묘. 바람이 알려준 명당자리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경기도 제공]

     2월 말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2층 소회의실에서는 ‘명당’이라는 흥미로운 주제로 동양학대토론회가 열렸다. 150석 규모 회의실에 200여 명이 참석할 만큼 뜨거운 관심 속에 진행된 이날 행사에서 풍수학자 5명은 ‘조선 팔대 명당의 본질과 사회적 맥락’이라는 주제로 내용을 발표하고 토론했다.

    ‘8대 명당’은 한 집안이 명문가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국내 묘지 중 특별히 빼어나다고 지목된 8곳을 가리킨다. 풍수 연구자라면 우선적으로 찾아가는 ‘풍수 답사 1번지’라고 할 수 있다. 이날 토론회를 주관한 박정해 한양대 융합산업대학원 동양문화학과 교수는 “8대 명당을 언제, 누가 선정했는지 정확하지 않으나, 이들 묘지에서 드러나는 공통적 특징을 찾아보는 것은 명당 기준을 제시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8대 명당으로 주로 거론되는 곳은 △고려 태조 왕건이 자신을 대신해 전사한 은혜를 갚고자 명당자리를 양보해준 것으로 유명한 신숭겸 장군의 묘(강원 춘천 소재)를 비롯해 △반남 박씨 시조 박응주의 묘(전남 나주 소재) △광주 이씨 시조 이당의 묘(경북 영천 소재) △광산 김씨 김극뉴의 묘(전북 순창 소재) △안동 김씨 김번의 묘(경기 남양주 소재) △동래 정씨 정문도의 묘(부산 부산진구 소재) △청주 한씨 한란의 묘(충북 청주 소재) △영일 정씨 정몽주 및 이석형의 묘(경기 용인 소재) 등이다. 이외에도 전국 15여 기 묘가 ‘조선 8대 명당’으로 풍수인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전북 순창에 있는 광산 김씨 김극뉴의 묘. 묘소의 주산(主山) 형상이 매우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안영배 제공]

    전북 순창에 있는 광산 김씨 김극뉴의 묘. 묘소의 주산(主山) 형상이 매우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안영배 제공]

    ‌8대 명당으로 지목된 곳은 대부분 각 문중 시조의 묘이며, 몇 가지 공통점을 보인다. △묘소의 주산(主山: 묘의 뒷배가 되는 산)이 매끈하게 우뚝 솟았거나(목성체·木星體), 종을 엎어놓은 것처럼 동그랗게 펼쳐진(금성체·金星體) 아름다운 형상이라는 점 △묘소 주변을 산들이 에워싸 살풍(殺風) 등 바람 관련 결함을 피했다는 점 △물길 역시 묘를 감싸듯 흘러가고 있다는 점 등이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남향 선호 심리와 달리 8대 명당은 서향, 남서향, 북서향 등 다양한 좌향(坐向)을 택하고 있다. 이는 햇볕을 강조하는 남향을 고집하기보다 지형 조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묘 방향을 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벌이 점지해준 반남 박씨 시조 묘

    8대 명당 중에는 자연의 기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짐승들이 잡아준 것으로 알려진 터도 있다. 반남 박씨 시조 박응주의 묘가 대표적이다. 이 묘의 주인공인 박응주는 고려 때 반남 호장(지방 향리의 우두머리)을 지낸 인물이다. 박응주가 세상을 뜨자 아들 박의가 지관에게 명당자리를 부탁했다. 지관은 자미산 자락을 뒤져 터를 잡아줬는데, 묘를 조성하려고 땅을 파는 순간 큰 벌 떼가 쏟아져 나와 지관을 공격해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런 전설 때문에 박응주 묘는 ‘벌 명당’으로 불리고 있다. 반남 박씨 후손들은 지관이 벌에 쏘여 죽은 고개에 봉현(蜂峴)이라는 표지석을 세워 그의 넋을 달랬고, 지금도 그 문중은 매년 10월 보름에 지관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는 풍수적 은유가 담겼다. 명당은 동물은 물론, 사람 신체를 편안하게 하고 기력을 보강하는 기운이 솟구치는 곳이다. 따라서 본능적으로 자연의 기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동물들 쉼터나 잠자리가 명당자리가 된다.

    명당 기운이 후손에게 전달됐는지 박응주의 현손인 박상충은 고려 말 중앙정계에 진출해 예조정랑을 지냈고 그 후에도 후손들의 벼슬길이 끊이지 않았다. 반남 박씨 대종회에 의하면 조선시대 이 집안에서 왕후 2명, 대제학 2명, 정승 7명, 문과 급제자 215명이 배출됐다.

    벌 명당 설화가 전해지는 곳은 더 있다. 전북 완주군의 ‘벌 명당과 발산 소씨’라는 구전 설화도 비슷한 내용이다. 묘를 쓰려고 땅을 파자 왕벌이 나타나 ‘벌 명당’으로 불렸고, 이후 명당 발복을 통해 발산 소씨가 이 지역 명문이 됐다는 이야기다. 황진이와의 일화로 유명한 조선 중기 문신 소세양(1486~1562)이 바로 발산 소씨 출신이다. 이처럼 벌 명당에 묘를 쓰면 후손이 벌 떼처럼 번창하고, 또 벌이 꿀을 모으듯 재물과 명예가 뒤따른다고 한다.

    명당은 편안한 마음으로 건강한 삶 누리는 터

    조선시대에 축조된 한양도성. ‘택리지’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는 눈이 녹는 자리를 보고 성의 경계를 정했다. [GettyImages]

    조선시대에 축조된 한양도성. ‘택리지’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는 눈이 녹는 자리를 보고 성의 경계를 정했다. [GettyImages]

    8대 명당 중 하나로 꼽히는 포은 정몽주(1337~ 1392)와 저헌 이석형(1415~1477)의 묘는 ‘하늘이 점지해준’ 명당으로 유명하다. 고려 말 충신 정몽주와 그의 증손녀 사위인 이석형이 묻힌 곳은 경기 용인 문수산 자락 쌍유혈(雙乳穴) 혈처로 알려져 있다.

    이 묘에 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정몽주가 개성에서 이방원에게 타살된 뒤 그의 묘를 쓰려고 고향 경북 영천으로 길을 나섰을 때 일이다. 상여를 메고 가던 중 현 용인 수지구 풍덕천에 이르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더니 포은 선생의 명정(망자의 관직과 성씨 따위를 써놓은 기)이 날아가버렸다. 명정이 바람을 타고 길을 인도하듯이 날아가다가 멈춘 곳을 지관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따라가 보니 지금의 묘 터였다. 사방을 두루 살펴보던 지관은 “이곳보다 더 훌륭한 명당자리는 없을 것”이라고 감탄하면서 “이는 포은 선생이 스스로 마련한 명당자리이니 마땅히 이곳에 안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후대에 이르러 그 옆자리에 포은의 손자 정보(鄭保)의 딸과 그 남편 이석형이 함께 묻히게 된 것이다.

    회오리바람이 터를 잡아줬다는 전설은 정몽주의 제자 혹은 후손들이 미리 정해놓은 용인 땅에 묘지를 조성하고자 퍼뜨린 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바람이 멈추는 곳, 즉 바람이 잠자는 곳은 지기(地氣)가 충만한 명당일 가능성이 크다.

    바람이 멈추는 곳 외에도 자연 현상으로 알 수 있는 명당은 다른 데보다 눈이 빨리 녹는 터, 산불이 피해간 자리, 금잔디가 자라는 땅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겨울철 내린 눈이 빨리 녹는 자리는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잔잔한 명당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대표적 사례로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 외곽에 쌓은 도성을 꼽을 수 있다. 이중환의 저서 ‘택리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이성계가 외성을 쌓으려 했으나 둘레의 원근(遠近)을 결정하지 못하던 중에 큰눈이 내렸는데, 일정한 경계를 두고 안쪽은 눈이 녹아 사라지고 바깥쪽으로 눈이 쌓이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를 보고 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한양도성이 설성(雪城)으로 불리게 된 배경이다.

    결국 명당은 사람이나 동물이 편안한 마음으로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는 터다. 눈 밝은 이라면 동물의 쉼터 혹은 자연 현상을 보고 얼마든지 이런 명당자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