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상훈 역을 맡아 열연한 양익준 감독(왼쪽)은 연출, 각색까지 1인3역을 소화했다.
너무도 당연히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는 김기덕 감독의 데뷔작 ‘악어’를 떠올리게 한다. 극악스러운 폭력의 머리채를 부여잡고, 갈 데까지 가보는 증오의 강을 건너 가녀린 구원의 터널을 향해 날아다니는 이 날짐승은 스스로를 동물에 비유하며, 맷집 좋게 한국 사회의 환부에 연타를 날린다. 그들의 영혼에 잠겨 있던 이 가없는 폭력의 기억은 스스로를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로 만들고,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사적인 감정을 무차별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살포한다.
그러나 김기덕 감독이 몽환적이고 출중한 시각적 이미지에 대한 갈망으로 뒷골목의 성(性)과 앞 골목의 폭력을 가차 없이 결부해왔다면, 양익준 감독은 본능적으로 이야기와 캐릭터, 정서와 내면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들고 찍기’라는 거친 호흡으로 폭발적인 에너지와 정서적 흡인력을 스크린에 흩뿌려놓는다(나는 이 두 감독이 너무나 상보적이라서 공동 작업을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궁금하다).
주인공 상훈에게는 가족이 있다. 아이 딸린 배다른 누나가 있고, 실상 여동생과 어머니를 죽인 것과 진배없는 아비가 있다. 좋든 싫든 깻묵을 치고 죽이고 살리든, 그들은 가족이다. 주인공은 이 사실에 진저리를 친다. 내가 아는 어느 작가는 ‘자신의 피’가 싫어서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공언했는데, 상훈은 이와 비슷하게 “내 손목을 끊어서 내 피를 다 ‘그 자식(아버지)’에게 쏟아붓고 싶다”고 외친다. 그러나 정작 손목을 그은 쪽은 그놈, 상훈의 아버지다.
질기디질긴 애증의 끈이 속박이며 동시에 구원인 가족. 그 질긴 업은 주류 영화와는 정반대의 심연으로 발을 이끈다. 산뜻한 로맨틱 영화의 주인공들이 가족 증발 상태로 연애질을 일삼을 때, 이곳 주인공들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는 연인마저 타액과 체액, 혈액이 튀는 악다구니와 욕을 주고받는다. 그것만이 이 구더기 끓는 세상의 탈출구이자 소통수단일 때, 그리고 그 폭력의 사슬에서 그들이 얼마나 벗어나기 힘든 상태인지를 이해하는 순간, 상훈은 더는 한 마리의 똥파리가 아니게 된다. 인간의 마음과 몸짓으로 ‘윙윙’거린다.
나는 아직도 한국 영화 속의 어떤 업이 끝내 온전히 살풀이되지 못했음을 느낀다. 박찬욱의 죄의식에 가득 찬 복수의 시도, 봉준호의 청산되지 못한 살인의 기억, 김기덕의 가학과 피학의 성교로 뒤범벅된 폭력. 폭력의 검은 강물은 한국 영화의 스크린에서 원혼처럼 떠돌고 있다.
그러므로 똥파리가 그려낸 세상은 낯설지 않다(이런 세상이 낯선 관객이 바로 당신이라면, 당신은 진정 행복한 사람이거나 지나치게 바보거나 둘 중 하나다). 아마도 계속해서 그곳에는 피떡으로 얼굴을 뭉갠 아들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들은 제 아버지를 죽이려 들다가도, 그 아비가 고꾸라지면 손수 아버지를 업고 제 피를 아비에게 수혈할 것이다. 이 기이한 양가감정(兩價感情) 속에서 여자들은 말없이 희멀건 허벅지를 내밀 뿐(물론 남자 감독들의 처절한 판타지다. 그들은 여자들의 허벅지 외에는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피하고 싶은 지저분한 똥파리들. 그러나 결코 시궁창은 사라지지 않으리. 그러니 그저 선택하라. 그 사포 같은 진심의 돌출에 베이거나 혹은 베어버리고 편안해지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