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은 1867년 11월 중건한 경복궁에서 신하들의 축하를 받고 대규모 사면령을 내렸다. 조선왕조는 남산과 삼각산 사이에 있는 천지의 중간에 경복궁을 짓고 500년 역사를 누렸다.
최근 국립고궁박물관이 경복궁 중건 기록인 ‘국역 영건일감(營建日鑒)’을 출간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로 불탔으나 전란에 시달린 까닭에 복원되지 못했다. 창덕궁을 다시 지은 광해군도 경복궁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270년 만에 흥선대원군이 과감하게 중건 결정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폐허로 남아 있을 것이다. 고종 즉위 2년인 1865년 시작한 복원사업은 1867년 끝났다. 그 공사 기록이 서울대 중앙도서관에 있는 ‘경복궁 영건일기’와 토지주택박물관이 소장한 ‘영건일감’이다. 최근 국립고궁박물관이 이 가운데 후자를 국역해 펴낸 것이다. 이 책은 국립고궁박물관 웹사이트에서 전자책(e-book)으로 볼 수 있다.
영건은 국가가 건물이나 집을 짓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를 기록한 자료에는 흥미 있는 내용이 여럿 나온다. 경복궁 교태전에 청기와를 얹을 계획이었으나 안료가 비싸고 굽기 어려워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궁궐 지붕에 청기와를 올린 것은 창덕궁 선정전이 유일하다. 또 밥을 파는 박학심이라는 사람이 일꾼 밥값을 떼먹고, 전국에서 거둬들이는 원납전 일부를 지방 관아가 가로챘다는 얘기가 있다. 박석을 까는 석공들이 일이 고되 도망가는 일이 잦았다고도 한다. 앞으로 근정전 앞마당과 월대의 박석을 걸을 때면 고역을 치른 석공 이야기가 떠오를 것 같다.
정부가 ‘스스로 원해 납부한다’는 뜻을 가진 원납전을 부자들에게 독촉한 기록도 있다. 1865년 9월 ‘영건일감’에는 강원감영에 ‘춘천 백성인 송구진은 매우 부유하나 의연금을 내지 않고 약간의 돈으로 면피할 계획만 세운다’며 ‘즉시 감옥에 가두고 원납전을 거부한 곡절을 엄히 조사하라’고 명한 기록이 있다. 그해 10월에는 경기감영에 ‘조정 벼슬아치부터 서민까지 모두 보탬이 돼야 한다’며 약속보다 적게 원납전을 낸 양반 안효기를 일벌백계하라고 지시한 내용이 있다.
김동욱 경기대 명예교수는 ‘영건일감’은 자재 조달과 원납전 납부 명세 등을 주로 기록했고, ‘경복궁 영건일기’는 공사 진행과 현장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이 책들을 통해 공사 현장의 기술 사항이나 건물별 공사 진척 정도를 알 수 있고, 이 시기의 사회·경제적 상황도 이해할 수 있다.
조선왕조는 궁궐을 경복궁처럼 평지에만 짓지 않았다. 창덕궁같이 산자락을 이용해 세우기도 했다. 역대 임금들은 평지에 우람하게 지은 경복궁보다 오밀조밀한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2008년 북한 개성을 방문했을 때 박물관에서 고려 궁궐 만월대의 축소 모형을 봤다. 산비탈을 따라 늘어선 궁궐의 전각은 창덕궁을 연상케 했다.
어느 나라나 궁궐 건축은 그 시기의 정치·경제뿐 아니라 사회·문화 역량의 집약물이다. 조선왕조의 국가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가 궁궐이었다. 태조가 정궁인 경복궁을 세우고 흥선대원군이 이를 복원한 것도 국력과 왕권을 위한 사업이었다.
요즘 경복궁 복원사업이 한창이다. 매년 전각이 복구되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3년 안에 경복궁을 중건한 것처럼 국력을 기울이는 건 아닐지라도 너무 더딘 느낌이 있다. 최근 끝난 국립고궁박물관 ‘영건, 조선 궁궐을 짓다’ 전시회에서는 궁궐 완공 후 공역에 동원된 장인 중 노비 출신을 면천시킨 사례가 나왔다. 경복궁 복원사업을 통해 우리 정치와 문화도 천격을 면하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