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역이 진정 기미를 보이니 다행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불안합니다. 이렇게 다시 모든 문제가 덮일까 봐서요.”
서울지역 한 수의대 A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2월 5일 충북 보은에서 처음 확인된 구제역은 이후 빠르게 확산될 기미를 보이다 14일 이후 추가 발생이 보고되지 않은 상태다. 전국적인 백신 접종과 소독 강화 조치를 펼친 정부는 이대로 상황이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분위기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는 “우리나라 축산업의 미래를 생각하면 이번 감염사태가 이렇게 끝나는 것이 환영할 일만은 아니다”라는 역설을 이야기한다. 올해 구제역 사태의 진앙지인 충북지역 축산농가를 여러 번 방문했다는 A교수는 “현장에 가보면 감염병 관리의 A부터 Z까지 구멍이 숭숭 난 걸 알 수 있다. 요즘 많은 언론이 ‘물백신’ 의혹을 제기하는데, 우리나라 농촌은 아무리 효과 좋은 백신을 배포해도 전염병 발생을 막기 힘든 구조다. 고병원성 조류독감(AI)에 이어 구제역까지 얻어맞은 이번 겨울 사태를 계기 삼아, 백신 정책은 물론 축산 정책 전체를 재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발길질하는 소 붙잡고 수직 접종?
가장 먼저 지적되는 것이 부실한 관리·감독이다. 2010년 발생한 구제역으로 전국에서 소, 돼지 350만 마리를 살처분한 정부는 이후 축산농가의 구제역 백신 접종을 의무화했다. 문제는 백신 접종을 사실상 농민에게 맡겨뒀다는 점이다. 이러다 보니 정부가 추정한 예방 효과와 현장 상황에 괴리가 컸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정부가 밝힌 충북 농가 소의 평균 항체 형성률은 97.8%에 달했지만, 구제역 발생 후 확인한 결과 최초 구제역 확진 농가 소의 항체 형성률은 19%에 불과했다. 인접 농가의 항체 형성률도 20~40%에 그쳤다. 이 과정에서 백신이 효과가 없는 것 아니냐는 이른바 ‘물백신’ 의혹이 일었다. 이에 대해 한 수의사는 “차후 정확히 조사하겠지만 현재로서는 백신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부 농가가 백신 접종을 소홀히 하고 접종 방식을 잘 지키지 않았을 개연성이 크다”고 밝혔다.
소를 50마리 이상 키우는 농가는 백신을 자체 접종하게 돼 있다. 방역당국은 백신 공병을 수거하는 방식으로 접종 여부를 확인할 뿐이다. 그런데 소에 백신을 주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전북 한 축산농민은 “구제역 백신은 1년에 2회 접종해야 하는데 주사를 놓을 때마다 곤혹스럽다. 참을성 있는 소도 있지만, 대다수 소는 주사 맞는 것을 끔찍이 싫어해 머리를 휘두르고 발로 차기도 한다”고 털어놓았다. 최근 구제역이 발생한 충북 보은군 탄부면에서는 2월 9일 방역당국의 혈청 채취를 돕던 농부가 소에 차여 얼굴을 10여 바늘 꿰매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이렇게 예민한 소를 달래가며 근육 부위에 정확히 주삿바늘을 꽂고 주사기가 피부와 직각을 유지하도록 한 채 백신을 투여하는 것은 농민에게 버거운 일이다. 정부가 배포한 ‘구제역 접종 매뉴얼’에 따르면 바늘이 덜 들어가거나 비스듬하게 꽂히면 백신이 지방층에 뭉쳐 항체 형성률이 낮아진다. 또 항체가 제대로 형성되게 하려면 백신을 평소 2~8도 냉장 보관하다 접종에 앞서 18도 안팎으로 올려 즉시 주사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까다로운 접종 수칙을 지키기 어려워 농장주가 백신을 구매한 뒤 외국인 노동자 등에게 접종을 맡기거나 아예 약제를 버리고 공병만 방역당국에 제출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으로 본다. 한 수의사는 “정부가 백신 접종을 제대로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충분히 교육하고 관리·감독하지 않는 상태에서 ‘시키는 걸 왜 안 하느냐’고 농민만 윽박지르고 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공중방역수의사 수를 늘려 대형농장도 수의사가 직접 구제역 백신을 접종하게 하거나, 최소한 관련 공무원이 농가의 백신 접종 현장에 참여해 상황을 통제하도록 하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정부가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것은 농가 소독 실태다. 한 축산 전문가는 “AI나 구제역 바이러스는 겨울이면 더욱 활성화한다. 그런데 농민은 겨울이 되면 소독액이 얼어 동파할 것을 우려해 소독기를 꺼놓는 경우가 많다”며 “이러한 방역 구멍에 대해 정부당국은 사실상 모른 척해왔다”고 지적했다.
겨울이면 작동 멈추는 소독기
실제로 정부가 배포하는 구제역 관련 매뉴얼에는 ‘소독기구’ 항목에 ‘동파 방지를 위해 소독 후 호스 파이프 노즐 부위의 소독수를 완전히 제거하고, 보온덮개를 하거나 실내에 보관’하라고 안내돼 있다. 또 ‘부동액은 자체가 유기물로 작용하여 소독제 효력을 저하시키므로 소독제의 동결을 막기 위해 임의로 차량용 부동액을 섞어 사용하지 않는다’는 단서도 붙어 있다. 그런데 농가에 차량이 출입할 때마다 하루에도 수차례씩 소독기를 돌려야 하는 농민들이 이를 준수하며 철저히 농가 안팎을 소독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경우는 사실상 전무하다. 한 수의대 교수는 “최근에는 정부가 구제역 백신 접종에 대한 홍보를 강화하면서 백신을 잘 놓으면 구제역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 생겨 농민들이 오히려 전보다 소독을 소홀히 하는 분위기도 만들어졌다. 소독은 분명히 번거롭지만, 농가 간 수평 감염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우리나라가 수시로 구제역에 시달리는 ‘축산 후진국’에서 벗어나려면 당장 이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를 위해 급선무로 지적되는 것이 관련 인력 확충이다. 2000년대 이후 구제역과 AI 등으로 대규모 살처분 참사를 겪은 뒤 정부는 2014년 한국능률협회에 방역조직체계 개선방안에 대한 연구용역을 의뢰했다. 당시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시·군·구에 필요한 적정 가축방역관 수는 525명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가축방역관 수는 208명으로, 적정치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전국 228개 시·군·구 가운데 일부에는 가축방역관이 1명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백신 접종과 소독 관리가 제대로 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와 동시에 농림축산식품부(농식품부) 내에 방역 업무 전담 부서를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도 힘을 얻고 있다. 현재 농식품부에서 가축전염병 방역을 담당하는 부서는 2개 과(방역총괄과, 방역관리과)가 전부다. 그런데 이들 부서가 축산업 진흥을 주업무로 하는 축산정책국에 속해 있어 적극적으로 방역조치를 하기에 적절치 않다는 비판이 계속돼왔다. 최농훈 건국대 수의대 교수는 “우리나라는 그동안 가축전염병 예방에 실패한 뒤 대규모 살처분과 보상으로 사태를 수습하는 악순환을 거듭해왔다. 이를 막으려면 더 늦기 전 전문인력 확충, 농가 교육 강화, 철저한 관리·감독 등 관련 조치를 시작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밀집사육을 개선하고 동물 면역력을 높이기 위한 정책 등도 마련해야겠지만,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일만 해도 상황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