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 이맘때면 지난 1년간 실천하지 못한 결심을 반성하고 다가올 한 해의 목표를 세우곤 한다. 글을 깨친 이후부터 매년 이런 듯한데 나아진 것은 별반 없다. 게다가 요즘에는 매일 새롭게 고개를 드는 기막힌 사건으로 국가 전체가 해넘이와 해맞이를 제대로 치를 겨를이 없어 보인다. 이런 분위기라면 변화와 새로움을 갈망하기보다 삼삼오오 모여 서로를 위로하고 다독이며 지난 한 해도, 오늘도 잘 버텼다고 우리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서울 신사동에 ‘아지토’라는 일본식 주점이 있다. 은신처를 뜻하는 ‘아지트’에서 따온 이름이지만 ‘아지(あじ)’는 ‘맛’, 토(と)는 ‘출입구’라는 의미도 있다. 이곳은 유난히 4명 이상 단체손님이 많다. 이유는 음식 때문이다. 숙성이 잘된 회로 가볍게 입맛을 돋우고, 고기요리로 배를 든든하게 채운다. 마무리는 해물을 활용한 국물요리나 조림, 튀김으로 한다. 이런 식으로 요리를 골고루 맛보려면 먹성 좋은 사람으로 최소 서너 명은 필요하다.
흰살 생선회는 2~3시간 숙성시킨 것이다. 활어보다 질감이 부드럽고 은은한 감칠맛이 살아나 회를 즐기지 않는 사람도 한두 점 먹기에 부담이 없다. 도미 등살과 뱃살 일부는 껍질이 붙은 채로 맛볼 수 있다. 질길까 싶지만 껍질 부분만 뜨거운 물을 끼얹어 살짝 데치기 때문에 쫄깃쫄깃 씹는 맛이 살아 있다. 흰살 생선 외에는 숙성시킨 참치와 연어, 문어숙회, 단새우회 등이 나온다. 여러 종류의 회가 한 그릇에 모여 있지만 단 한 점도 맛이 비슷한 것이 없을 정도로 개성 있는 조합이다. 각각의 재료가 제맛을 낼 수 있도록 노련하게 손질하고 숙성시킨 주인의 솜씨 덕이다.
고기는 굽거나 쪄 먹는다. 등심을 작은 화로에 올려 구워 먹는 야키니쿠(やきにく)도 괜찮지만 여럿이 나눠 먹기에는 푸짐한 찜요리 세이로무시(せいろむし)가 좋다. 편백나무로 만든 커다란 사각형 그릇에 한우 등심과 차돌박이, 삶은 달걀, 각종 채소를 함께 넣어 10분 내외로 살짝 찐다. 채소로는 배추, 미나리, 쑥갓, 양파, 감자, 단호박, 각종 버섯이 푸짐하게 들어간다. 아무런 양념 없이 살짝 쪘을 뿐인데 채소들에서 우러나온 단맛과 감칠맛의 풍미가 대단하다. 이 요리의 주인공은 단연 채소다. 담백하고 부드러운 맛이 나는 고기는 맛의 흐름에 간간이 필요한 조연이라 할 수 있다. 등심과 차돌박이 외 ‘장어’ 조연이 등장하는 메뉴도 있다. 이 요리의 매력은 ‘건강함’이다. 술과 곁들일 때 이 매력은 언제나 든든한 면죄부가 돼준다.
회와 찜으로 깔끔해진 입맛의 마무리는 짭짤한 조림으로 한다. 먹을 것이 많고 유난히 고소한 도미머리를 무, 감자, 두부, 표고버섯, 고추, 당근과 함께 육수, 간장, 정종에 푹 조린다. 커다란 도미머리 곳곳에 숨어 있는 쫄깃한 살은 잘 발라 먹고, 뼈에 밴 국물은 샅샅이 빨아 먹어야 제맛이다. ‘아지토’에는 도미 한 마리를 통째로 맛볼 수 있는 메뉴가 있다. 회, 구이나 조림, 튀김, 탕으로 줄줄이 다양하게 도미 맛을 즐길 수 있다. 긴긴밤 술과 이야기를 곁들이며 여럿이 어울려 새해를 맞이하기에 딱 좋다.
아지토서울 강남구 강남대로150길 11 1층,
02-511-3686,
오후 6시~다음 날 오전 2시(일요일 휴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