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예용해는 1963년 ‘차를 찾아서’란 제목으로 연재기사를 썼다. 83년 다시 ‘차를 따라’라는 제목의 연재기사를 썼다. 역사 기록을 조사해 차 이야기가 전해지는 현장을 찾아간 기사들이었다. 예용해는 다산(茶山), 초의(草衣), 추사(秋史)의 기록을 비교해 차문화를 찾아내고 그것을 우리 시대에 전하려고 했다. 하지만 연재기사는 열독률이 낮아 모두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차문화는 그렇게 커피문화에 압도돼 기사조차 낼 수 없었다.
1989년 3월 필자가 동서(東西)문화의 교차로인 둔황(敦煌)에 들어갔던 취재 여행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 이유는 첫째, 당시 미수교국인 중국에서 취재를 해야 하는 출장이었고, 둘째, 고비사막을 횡단해 오지인 서역을 가는 여행이라 2박 3일 동안 승객이 가득한 만원 기차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베이징을 출발해 시안(西安)을 거쳐 란저우(蘭州)와 류위안(柳園)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처음으로 많은 중국차를 마셨다. 차 전문가였던 고(故) 전완길 태평양박물관 관장은 가는 곳마다 중국차를 사서 맛을 보고 일행에게 권했다. 현 아모레퍼시픽의 설록차 개발은 둔황에서도 그런 방식으로 이어졌다. 차 재배부터 찻잔과 전통 다구의 가치 인식, 그리고 학문 연구를 통해 차문화를 산업으로 성장시킨 인물이 전완길 전 관장이다.
예용해와 전완길 전 관장이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 그리고 추사 김정희에게서 찾아낸 차문화는 지금 전남 보성, 경남 하동, 제주 등지의 차밭과 이어진다. 층층이 열 맞춰 심은 차나무는 아름다운 모습 때문에 이미 오래전부터 새해 달력 사진이나 화보에 등장해 친숙하다.
최근 한성백제시기(기원전 18~475)에 귀족층을 중심으로 차문화를 향유한 흔적을 찾아냈다. 돌절구와 닭 모양 부리가 달린 주전자, 청자완 등을 발굴한 것이다. 신라에선 7세기 중엽 선덕여왕이 차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고, 또 흥덕왕 3년(828)에 당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대렴(大廉)이 차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었다고 한다. 불가의 차문화는 고려 귀족에게 퍼졌다. 고려 가마터에서 나오는 그릇 가운데 절반이 청자 찻잔인 사실을 보면 차문화 열풍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은 2016년 7월 ‘제다(製茶)’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전북 전주 국립무형유산원에서 12월 16일 ‘제다’의 보존 가치와 전승 방안을 모색하는 학술대회를 열었다. 애호가들이 살려낸 차문화가 산업화되고, 국가가 무형문화재로 지정해 전승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
‘제다’는 차나무의 싹, 잎, 어린 줄기 등을 이용해 차를 만드는 기법을 말한다. 찌거나 덖거나 발효 등을 거친 재료를 비비기, 찧기, 압착, 건조 등의 공정을 통해 마실 수 있는 차로 만드는 전통 기술은 다양하다. 정순일 원광대 교수는 “제다는 공정 순서와 시간을 조정하거나 발효 조건에 변화를 주면 사소한 손놀림 하나에도 전혀 다른 맛의 차가 만들어진다. 실제로 하동 작설차의 생산 현장을 보면 집집마다 사람마다 제다 방식에 차이가 있으며 각기 장점을 지닌다. 제다는 천의 얼굴을 가진 연금술”이라고 설명한다.
한국차의 고장 보성군에서 ‘보성차밭빛축제’가 열리고 있다. 14회를 맞은 이 축제는 2016년 12월 16일 점등식을 시작으로 보성읍 봉산리 한국차문화공원과 율포솔밭해수욕장 일원에서 2017년 1월 31일까지 47일간 겨울밤을 아름답게 수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