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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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시대 이전으로의 회귀?

카메라폰·디카 확산으로 ‘영상’이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자리굳혀

  •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mkyoko@chollian.net

    입력2005-07-07 16: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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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자시대 이전으로의 회귀?

    2003년 미츠 메이어 작 ‘자연의 어머니’ 시리즈 중 하나. 컴퓨터그래픽 기법을 활용해 만든 것으로 반은 인간, 반은 식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옛 소련 시절, 모스크바 거리에 개가 두 마리 있었다. 한 마리는 살이 찌고, 한 마리는 삐쩍 말랐다. 삐쩍 마른 개가 살찐 개에게 묻는다. “너는 어디서 먹을 게 나서 그렇게 살이 피둥피둥 쪘냐?” 그러자 살찐 개가 태연하게 대답한다. “바보, 저기에 가면 파블로프 연구소가 있거든. 거기 가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어. 그럼 잠시 후 조건반사 된 인간이 들어와 종을 땡땡 치고 먹을 것을 가져다줄 거야.”

    영상 커뮤니케이션

    이렇듯 우리 세대가 알던 유머는 대개 텍스트로 된 것이다. 똑같이 ‘개’에 관해 농담을 해도 요즘 세대는 말이 아니라 영상으로 하는 모양이다. 언젠가 인터넷을 떠돌던 ‘개벽이’ 사진. 두 벽 사이의 틈으로 빼쭉 머리를 내민 강아지의 모습을 보고 배꼽을 잡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사람을 웃기는 데 굳이 말이 필요 없다는 것. 그게 요즘 세대의 감성이다.

    얼마 전 어느 포털 사이트의 ‘유머’ 코너에 들어갔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말로 된 농담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고, 대부분의 농담이 영상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웹사이트에서 퍼온 희한한 사진들, 손으로 그린 우스꽝스런 캐리커처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카메라폰으로 거리에서 찍은 사진들. 영상의 종류도 퍽 다양했다. 유머 감각 자체가 변한 것이다.

    과거에 카메라는 졸업식, 수학여행, 결혼식 등 특별한 계기에만 등장하던 물건이었다. 하지만 카메라가 휴대전화와 통합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오늘날 세계는 언제, 어디서라도 시각적으로 인용 가능한 것이 되었다. 과거에는 길거리에서 겪은 일을 기억에 담아 주위 사람들에게 ‘말’로 보고하곤 했다. 하지만 요즘 세대는 거리에서 인상적인 장면을 마주칠 경우 카메라에 담아 주위 사람들에게 영상으로 보여준다.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휴대전화를 통해 전송된다. 그림으로 소통하던 원시시대처럼, 영상이 다시 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글자가 없던 시절에는 그림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알파벳이 등장하면서 그림 대신 문자가 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문자의 시대도 이제 종말을 고하고, ‘구텐베르크 은하’의 끝에서 영상이 복귀하고 있다. 빌렘 플루서는 ‘그림의 혁명’에서 이 변화의 과정을 추적한다.

    세계의 그림

    인간도 한때는 동물처럼 대자연의 품에서 그 일부로 살아갔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인간은 자연에서 분리되어 자신을 자연과 다른 존재로 의식하게 된다. 이 과정은 여러 신화 속에 ‘낙원추방’의 설화로 반영되어 있다. 흔히 ‘실존’이라 번역되는 ‘existence’라는 말은 ek+sistens, 즉 ‘바깥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자연상태의 바깥으로 나옴으로써 비로소 인간으로서 실존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문자시대 이전으로의 회귀?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

    인간이 자연의 품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자연을 적대적인 힘으로 의식하게 되었을 때 인간과 세계의 관계는 매우 낯설었다. 이 간극을 메워준 것이 바로 이미지였다. 원시인들은 뮐렌도르프의 비너스와 같은 조각을 만들거나, 라스코나 알타미라 동굴의 벽에 그림을 그림으로써 자신과 세계 사이의 간극을 메웠다. 다시 말해 ‘주술’을 통해 세계의 적대성을 극복하고, 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과학이나 기술이 없었던 시절, ‘주술’은 세계를 정복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 시대에는 조각이나 그림과 같은 가상의 이미지를 조작함으로써 현실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주술로 자연을 부릴 수는 없는 일, 그렇다고 주술이 아무 쓸모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주술은 자연의 위력 앞에서 느끼는 공포감을 덜어주어, 삶을 사는 데에 필요한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세계는 책이다

    지력(知力)이 발달하면서 인간들은 점차 주술의 효용성에 의문을 갖게 된다. 이로써 한때 그림이 매개했던 세계와 인간의 관계는 다시 낯설어진다. 이 새로운 낯섦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바로 이때 ‘문자’가 발명된다. 문자와 더불어 이른바 ‘역사’라는 것이 시작된다. 역사시대가 시작되면서 원시인의 주술적 사유는 점차 사라져간다. 그리고 그 대신에 합리적, 철학적 사유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원시인들은 세계의 그림을 그리고, 그 이미지에 조작을 가함으로써 결과를 현실로 연장하려 했다. 역사시대로 들어오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제 인간은 세계를 문자로 기록한다. 세계와의 만남에서 얻은 정보를 기록함에 따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식은 누적적으로 발전한다. 사람들은 문자로 씌어진 자연의 비밀이 자연을 정복할 수 있게 해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 목표를 이루려면 자연은 문자가 아니라 숫자로 기술되어야 했다. 미적분의 발명은 자연을 남김없이 수학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오늘날 자연의 모든 현상은 방정식으로 표현되고, 자연은 ‘거대한 수학책’으로 여겨진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자연의 수학화가 지구의 모습을 바꿔놓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미지의 귀환

    하지만 자연의 수학화는 또 다른 이행을 준비하는 과도기였다. 가령 문자 ‘일, 이, 삼’과 숫자 ‘1, 2, 3’은 다르다. 문자 ‘일, 이, 삼’은 음성을 표기한 것이지만, 아라비아 숫자 1, 2, 3은 의미를 표기한 것. 숫자는 문자와 그림의 중간에 존재한다. 예컨대 각종 기호로 씌어진 복잡한 공식을 우리는 선형적으로가 아니라, 그림과 비슷하게 공간적으로 읽지 않는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책=세계’라는 믿음에 균열이 생긴다. 과거에 텍스트는 ‘자연의 거울’로 여겨졌다. 하지만 오늘날 그 거울은 깨졌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인간 인식의 완전성에 대한 믿음을 흔들어놓았다. 근대인들은 뉴턴의 이론을 세계의 객관적 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아인슈타인의 이론마저 세계의 진정한 ‘모상’이 아닌, 필요에 따라 언제라도 수정할 수 있는 ‘모형’으로 간주된다.

    문자시대 이전으로의 회귀?

    캘리그램. 텍스트의 윤곽으로 보아 생물 혹은 무생물을 그린 것으로, 텍스트는 그 생물 또는 무생물의 몸에 적혀 있다. 텍스트에 이미지를 겹쳐놓는 것은 현대 광고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에서 과거의 독자들은 ‘현대인의 심리’를 읽었다. 하지만 요즘의 독자들은 거기서 ‘작자의 주관적 생각’을 본다. 책으로 매개되었던 인간과 세계의 관계가 다시 낯설어진 것이다.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기술적 형상, 기술복제로 만들어낸 그림들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사진, 영화, 방송, 컴퓨터그래픽 등 이미 우리의 세계는 기술적 영상들의 홍수로 뒤덮여 있지 않은가.

    텍스트의 그림

    문자 이전의 영상이 문자 이후로 되돌아오고 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영상은 ‘픽셀’이라는 점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과거의 영상과는 추상의 차원이 다르다. 가령 조각은 시간의 차원을 배제한 3차원의 매체. 벽화는 거기서 깊이를 접은 2차원의 소통이다. 텍스트는 거기서 또 한 차원을 접어 문자를 1차원의 선형으로 배열한다. 기술적 영상은 거기서 또 한 차원을 접는다. 그것은 점으로 된 영상, 즉 0차원의 그림이다.

    구텐베르크 은하의 끝에서 인간은 다시 그림으로, 이미지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과거의 것과 다르다. 문자 이전의 ‘주술적 상상력’이 이미지로 이미 있는 세계를 정복하려 했다면, 문자 이후의 ‘기술적 상상력’은 이미지로 아직 없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이미 요즘 세대는 가상공간 속의 아바타를 꾸미기 위해 현실의 돈을 쓰고 있잖는가. 이미 영상은 ‘버추얼 리얼리티(virtual reality)’를 넘어, 가상이 된 현실 ‘리얼 버추얼리티(real virtuality)’로 전화하고 있다.

    과거의 영상이 세계의 그림이라면, 기술적 형상은 0과 1이라는 숫자로 그린 이미지다. 가령 컴퓨터그래픽을 생각해보라. 과거의 영상이 문자를 전제하지 않았다면, 새로운 영상은 바탕에 텍스트를 깐 그림이다. 예를 들어 윈도우의 아이콘은 세계의 그림이 아니라 명령어의 그림이다. ‘도스’ 환경에서는 선형적인 텍스트의 형태로 명령을 입력했으나, 이제 유저는 아이콘을 클릭하는 것으로 타이핑을 대체한다. 요즘은 프로그래머도 아이콘을 사용한다고 한다.

    기술적 상상력

    영상이 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한 수단으로 떠오른 시대에는, 몇십 년 전에 발터 벤야민이 말한 것처럼 “문맹은 글자를 못 읽는 사람이 아니라 영상을 못 읽는 사람”이다. 아울러 글쓰기도 성격을 바꾸어 점점 더 영상을 지향하는 스크립트에 가까워질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이 영상으로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관념, 생각, 정보를 산출하는 것 못지않게 그것을 시각화하는 능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유는 활자 매체에 입각한 논리적, 추론적 사유가 아니라 영상 매체에 입각한 형상적, 상상적 사유로 바뀌어가고 있다. 그래서 빌렘 플루서는 글쓰기에 미래는 없다고 단언한다. 전통적인 읽기와 쓰기는 중세의 수도원처럼 소수의 선택된 집단에서만 하는 일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전통적인 인문학은 대중적 독자를 잃고, 점차 소수의 소일거리로 전락해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것이 인문학의 위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인문학이 적응해야 할 환경의 변화만을 지시할 뿐이다. 이제 인문학도 영상 속에서 텍스트를 읽고, 텍스트를 영상으로 만들어내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에 대한 감각을 길러야 한다. 새로운 영상은 과거의 주술적 영상과는 다른 기술적 영상, 문자와 숫자로 그린 텍스트의 그림이다. 때문에 텍스트를 읽고 쓰는 능력이야말로 영상 커뮤니케이션의 전제가 된다.

    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하면 영상을 읽을 수 없다. 텍스트를 영상으로 조직할 수도 없다. 이 경우 인간은 영상의 해독자나 창조자가 아니라 영상의 게으른 소비자가 된다. 텍스트를 읽지 못하는 이들은 영상을 먹어치우기에 바쁘다. 정신적 구강기에 빠져 남이 입에 넣어주는 영상을 씹어 삼키기만 하는 소비자의 의식은 문자 이전의 시대, 그러니까 주술의 시대로 퇴행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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