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박영숙 씨의 ‘내 안의 마녀’ 연작. 모델은 여성학자 현경이다.
여성주의 사진작가 박영숙(65) 씨의 개인전 ‘미친년 프로젝트’의 전시장. 박 씨는 양 손바닥을 내밀어 3명의 40대 여성 관람객에게 ‘기’를 불어넣어 준다. 마치 ‘마녀’처럼.
예순이 훨씬 넘은 나이에 트레이드마크인 검은색 옷에 빨간색 안경을 쓰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박 씨를 바라보는 관람객들의 시선은 호기심에 가득 찬 어린 소녀들의 그것 같다. 부끄러운 듯 “빨간 안경이 늘 써보고 싶었어요”라고 말하는 한 여성에게 박 씨는 안경을 직접 씌워준다. “써보고 싶으면, 쓰세요”라고 그는 말한다.
“30, 40대 여성들이 매일 몰려와요. 그들을 만나기 위해 전시장을 지키죠. 나도 마흔여섯 살이 돼서야 비로서 내 안의 마녀성이 무엇인지 배웠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잘 알아요. 뭔가가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알면, 미쳐버리죠. 그러니 혼자 여기까지 왔을 테고요.”
‘미친년 프로젝트’ 여성들 밀물
1980년대 초부터 사회참여적 작업을 해온 박 씨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직관력과 지혜를 가진 여성들이 ‘마녀’라고 화형을 당하고, 무당들이 부당하게 핍박받은 사실에 충격을 받아 99년부터 ‘미친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미친년 프로젝트’는 페미니스트 미술가들과 운동가들의 광기와 마녀성을 날것으로 드러낸 초대형 사진 작업들이다. 페미니스트들을 한눈에 ‘미친년’처럼 연출해 찍었으므로 모델과 작가 사이의 연대와 신뢰 없이는 불가능했다.
모델들은 대부분 많이 알려진 활동가들이거나 김지숙, 예지원처럼 페미니즘 연극에 출연한 배우들이므로 사진을 보면 평소 집회 현장이나 무대, 글에서 그녀들이 품었던 칼날이 이런 모습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통쾌하다. 박 씨는 이렇게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미친년’과 ‘마녀’들을 촬영한 성과를 모아 책으로 펴내고 첫 개인전을 7월3일까지 성곡미술관에서, 7월7일부터 8월30일까지는 경기도 한국미술관에서 연다.
“요즘은 드라마나 영화 같은 대중문화의 여주인공들이 ‘마녀’인 것을 흔하게 봐요. 처음에 마녀들은 ‘자기만의 방’이나 ‘버자이너 모놀로그’ 같은 연극을 통해 소수의 사람들을 만났지만, 이젠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거죠. 물론 전 ‘안녕, 프란체스카’의 열혈 팬인데, 요즘 ‘마녀기’가 떨어진 거 같아요. 한번 만나봐야 할 것 같던 걸요.”
그의 말처럼 요즘은 어디에나 ‘마녀’들이 있다. ‘마녀 신드롬’을 선도한 MBC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가 ‘폐인’들의 요청으로 2부를 8월 말까지 연장하고 9월부터 3부를 방송한다. 더 과격한 버전을 담은 ‘디렉터스컷’ DVD와 캐릭터 인형들도 출시될 예정이다.
영화 ‘분홍신’, MBC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와 KBS ‘개그콘서트’의 ‘출산드라’. 전시장에서 여성 관객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박영숙 씨(왼쪽부터).
기대를 모으는 한국 영화들에서 여자 주인공들 역시 마녀와 동일시된다. 한때 여자 배역을 찾기 어려울 만큼 조폭적, 마초적 남성들에 취해 있던 한국 영화계도 모처럼 여자들이 혼자 극을 끌고 가는 작품들을 쏟아내고 있다.
6월30일 개봉하는 김혜수 주연의 ‘분홍신’은 여름 시즌 호러물이면서 엄마와 딸의 억눌린 여성성의 충돌, 원한 등이 폭발하는 상황을 공포로 설정했다. 영화에서 분홍신은 원래 동화에서 그랬듯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마녀성 그 자체다.
7월 말 개봉하는 이영애 주연의 ‘친절한 금자씨’도 ‘정말이지 착하게 살고 싶었’던 금자 씨가 늘 ‘기도하는’ 선량한 모습으로 13년 동안 교도소에서 처절한 복수를 준비한다는 내용으로 ‘올드 보이’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완결편. 딸의 원수를 직접 갚는 무서운 엄마 이야기 ‘오로라 공주’와 방중술, 즉 ‘색공’으로 신라시대 진흥·진지·진평 등 세 명의 왕을 사로잡은 미스터리 우먼 ‘미실’도 지금 기획 중인 우리 영화다. 올해의 베스트셀러 소설 중 하나인 김별아의 동명 소설에 등장한 바로 그 ‘미실’이 주인공이다. 이 같은 마녀형 캐릭터 영화의 흐름은 한두 해 동안 남자 배우들의 개런티가 천정부지로 치솟은 데 대한 현실적 대안이면서 관객들의 요구를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다.
당당함 넘어선 캐릭터 여성의 진화
영화 ‘싱글스’의 시나리오 작가 노혜정 씨는 “최근 드라마나 영화엔 스테레오 타입의 악역들이 사라졌다. 대신 여주인공들은 당당함을 넘어서 마녀성을 가진 캐릭터로 나타난다. 일종의 ‘진화’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6월24일 미국에서 개봉한 ‘비위치드(Bewitched)’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모았던 ABC의 인기 시트콤 ‘아내는 요술쟁이’(1964~72년)를 영화로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배트맨 비긴즈’에 이어 박스오피스 2위에 올랐다. 니콜 키드먼이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마녀성을 감추고 인간세계에서 살아가는 마녀 사만사 역을 맡았는데, 마법을 할 때마다 실룩거리는 코와 입을 보노라면 진짜 마법사로 속아주고 싶다.
한편으로 KBS ‘개그콘서트’의 여주인공이 된 개그우먼 김현숙은 ‘뚱뚱교 교주’라는 독특한 마녀 이미지와 ‘프라이드치킨 껍질 까먹는 것들 혼내주겠다’는 등 촌철살인의 어록으로 인기를 얻고 있기도 하다.
수상해 보이는 ‘친절한 금자씨’ 의 영화 포스터.
한 마법용품(마술용품이 아니다) 판매자는 “주로 중학생에서 대학생 여성들이 마법술을 믿는데, 타로 카드는 14세기 이후 계속된 것으로 정확하기도 하고 카드 그림 자체가 신비로워서 가장 대중화된 아이템”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다양한 층위의 마녀들은 대개 두 가지 생각의 축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쪽 끝에 사진작가 박영숙 씨의 ‘미친년 프로젝트’가 뿜어내는 여성주의적 마녀성이 존재하고, 반대편 끝에는 ‘비위치드’(아내는 요술쟁이)처럼 코만 움직여서 사랑하는 남자에게 모든 것을 이루게 해주는 ‘슈퍼우먼’ 마녀가 있다. 다른 마녀 캐릭터들은 양축이 만드는 좌표 어딘가에 위치한다. 한쪽은 매우 급진적인 페미니즘으로 보이고 다른 한쪽은 남자들의 또 다른 팬터지에 불과해 보이지만, 어느 쪽이든 풍부한 성적 함의를 담고 있다.
우리가 마녀들에게 끌리는 가장 큰 이유는 중세의 마녀나 무당처럼, 이들은 ‘미쳤기 때문에’ 감히 은밀한 욕망과 세계의 비밀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미친년 프로젝트’의 마녀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미술평론가 백지숙 씨의 말처럼 여전히 억압된 가부장제가 폭압을 떨치고 있는 “이런 ‘×같은 세상에서 여성이 멀쩡한 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홍신’에서 주인공 선재(김혜수)는 지적인 안과 의사이자 유능한 남편을 둔 정숙한 아내에게 요구되는 역할 때문에 돌아버릴 지경이다. 이는 선재가 늘 입는 무채색 옷들과 그녀가 사 모은 화려한 구두의 대비로 암시된다.
‘분홍신’의 제작자 김광수(청년필름 대표) 씨는 “이전에 여자주인공은 사랑하는 남자가 바람을 피면 다른 여자를 증오하지만, ‘분홍신’의 주인공은 다른 여자에 대한 감정이 없이 그저 남자를 죽인다. 그리고 분홍신을 통해 여성적 쾌감을 얻고 남자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밝히지만, 그 남자 역시 주인공에게 절대적인 존재는 아니다”고 말한다.
애써 부인하던 내 안의 ‘미친 나’ 발견
프란체스카나 요술쟁이 사만사에게 ‘×같은 세상’은 금전 만능주의와 사랑이라는 이름의 위선이다. 프란체스카는 전세금을 만들기 위해 태연하게 은행강도로 나서 두일을 테러하고, 사기성 주부 아르바이트에 나서기도 한다. 프란체스카는 UN평화의 상징과 도심의 골칫거리 사이에 놓여 있던 비둘기들을 과감하게 잡아먹음으로써 심리적 금기도 깨버렸다. 결정적으로, 월급을 옷 사는 데 날린 엘리자베스를 두일이 이해하기로 하고 가족들이 서로 등을 보듬는 장면에서 프란체스카는 말한다.
인기 외화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의 아이콘과 네 주인공들의 섹시하고 무서운 뒷모습. ‘아내는 요술쟁이’를 리메이크한 영화 ‘비위치드’(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안녕, 프란체스카’의 작가 신정구 씨는 “사회 문제를 다루려고 한 적이 없는데, 시청자들이 그런 의미를 읽어낸다고 할 때 다소 ‘당황’스럽다”면서도 “설정이 드라큘라라는 환상인 만큼 소재는 일상에서 따오려고 했다. 외모만 있는 백치 남자 켠, 메트로섹슈얼의 기성주, 무능한 가장 두일, 해체된 가정은 주변에서 흔히 보는 사례들”이라고 말한다. 그는 “어느 여성에게나 마녀성이 있으며, 그것은 여성들에게서 속을 알 수 없는 깊이와 매력을 만들어낸다”고 프란체스카의 인기를 설명했다.
8월에 방송될 프라하 현지 촬영작 ‘안녕, 프란체스카’의 프리퀄(이전 이야기) 2부작으로 인터넷이 들썩거리는 가운데, 프란체스카와 청순했던 안성댁이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처럼 지금의 ‘마녀’가 된 사연이 공개될 예정이다.
흥미로운 것은 ‘겨우’ TV의 캐릭터인 ‘출산드라’의 김현숙 씨나 ‘위기의 주부들’이 ‘진지한’ 시민단체들로부터 항의를 받았다는 것이다. ‘출산드라’는 기독교 희화화로 비난을 받았고, ‘위기의 주부들’에 대해서는 미국 주부단체들이 주부들은 결코 악녀들이 아니라며 광고주에게 압력을 넣었다. 물론 대중적 인기와 시청률은 이런 주장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해프닝’처럼 보이지만 이런 반발들은 근대 역사가 인간성의 한 부분이었던 ‘광기’를 ‘질병’으로 격리시켰다는 미셸 푸코의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관객들은 이성보다 직관으로 행동하는 마녀들의 낯섦에 매력을 느끼지만, 이들이 현실의 위협이 된다면 ‘이성의 역습’은 이보다 훨씬 거셀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분홍신’에 ‘깜장 드레스’를 입고 ‘사과’(‘위기의 주부들’의 아이콘)를 건네는 친근한 마녀들의 미덕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거나 애써 부인했던 정서적인 세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 속에서 ‘미친 나’도 내 삶의 한 면임을 긍정하게 해준다는 점이다.
사진작가 박영숙 씨는 ‘내 안의 마녀’란 시에서 마녀성을 이렇게 정의한다.
‘이제 우리는 내 안의 마녀를 거침없이 받아들이자/ 잃어버린 직관력을, 따뜻함을, 포용력을, 에로스를, 감미로움을/ 그것은 ‘미친년’ 그녀의 것/ 그녀의 것이지만 나누어야 할 것/ 더 풍성해져야 할 것/ 너와 나, 모두에게 발굴되어 세상천지를 놀래키게 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