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7일(신축)맑음.경주에 닿았다.
영천에서 경주까지의 여정은 중앙선 기찻길 및 경부고속도로와 나란히 간다. 조만간 경부고속철도도 가세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대동맥인 것이다.
낮에 모량역에서 쉬는데 영일현감 조경보, 하양현감 이귀영, 청도군수 이수가 보러 왔다.
모량역은 지금도 중앙선 역 이름으로 남아 있다. 보통 통신사 등 고위 여행자는 모량역을 점심 장소로 여겼다. 그렇게 하면 경주 읍성에 늦지 않은 시간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일반 여행자들은 지금의 건천읍인 ‘건천점’이라는 주막촌을 이용했다.
저녁에 경주에 들어가니, 주수(사또) 이해중이 안동시관(試官)이 되어 고을에 있지 않으므로 섭섭했다. 영장 홍관해가 들어와 뵈었다.
경주는 통신사 경로 중 충주나 안동과 비슷한 중요성을 가진 대읍으로 으레 2, 3일 머물다 가곤 했다. 조엄의 경우는 지대를 맡아야 할 부사가 부재중이어서 그냥 잠만 잔 것이다.
경주역과 서부시장 사이에 위치
경주는 말할 것도 없이 신라 천 년의 고도(古都)다. 국내외에서 찾아오는 여행객이 경주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고대 경주의 모습일 것이다. 조선시대 경주는 신라 시절과는 전혀 달랐다. 물론 상주나 충주처럼 유서 깊은 대읍으로서 주변 고을보다 높은 품격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옛날 경주와는 비교가 되지 못했다.
통일신라시대의 도시구조에 관해서는 여타 논문들이 발표되었고, 또 학자에 따라 의견이 갈라지고 있기도 하다. 서울민속박물관이나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모형과 같은 규모의 도시였다면, 조선시대 경주는 신라시대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것이다.
조선시대 경주 중심에는 경주 읍성이 있었다. 이는 지금 첨성대 쪽에 흔적이 남아 있는 월성과는 별도의 성으로, 월성이 언덕 위에 있는 것과 달리 평지에 있었다. 읍성의 위치는 지금의 경주역과 서부시장 사이였고, 정사각형이지만 잘 보면 위쪽(북쪽)이 약간 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읍성 둘레는 4075척이며 사방으로 문이 있었고, 성 안에 우물이 86개 있었다. 일제가 제작한 지적원도를 보면 적어도 26개소의 치(雉·방어하기 쉽도록 성벽을 밖으로 튀어나오게 한 것)가 확인되고, 성 밖에는 해자(垓字·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가 있는 등 방위 위주의 설계였음을 알 수 있다. 성문들을 기점으로 동서남북 대로가 십자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경상도 읍성 중에서는 큰 편이었지만 역시 신라시대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읍성은 구한말부터 일제시대에 걸쳐서 대부분 철거되었는데 동쪽 성벽만 50m가량 남아 있다. 최근 성벽에 붙어 있었던 민가들이 철거돼서 제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해동지도’를 보면 읍성 한가운데에 동헌이, 동남쪽 모퉁이에는 객사가 있었다. 동헌은 지방관 등이 상주하며 정무를 집행하던 지방행정 기관이고, 객사는 중앙 권력을 대신하는 건물이었다. 그래서 역사가 짧은 고을의 경우, 객사가 고을 중심에 있고 동헌은 그 옆에 붙어 있는 인상을 주는 곳이 많다. 지난번에 찾아간 의흥이나 신녕이 그 예다. 그러나 이곳 경주와 상주, 충주 등 고대로부터 역사를 간직해온 ‘대읍’에서는 객사는 구석에 있고 동헌이 가장 좋은 ‘명당자리’를 차지했다. 짐작컨대 고려시대 이전, 아직 중앙보다 지방 호족들의 힘이 셌던 시절 공간구조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객사인 동경관(東京館·東京은 경주의 별칭)은 일제시대에는 박물관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지금 객사 자리에는 조흥은행이 들어서 있다. 동헌 자리는 오랫동안 군청으로 사용돼오다 지금은 경주문화원이 되어 있다. ‘제승정’과 ‘진남루’는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 있고, 남문 밖에 있었던 종각은 안으로 들여왔다. 종각은 서울 보신각과 마찬가지로 문이 열리고 닫히는 시간을 알려주었다.
지금 읍성은 공동화(空洞化)로 빈터가 많고 인기척도 드물다. 17만명이 사는 이 도시의 번화가가 교외로 빠져나간 지 오래다. 교외로 나가면 새 아파트도 많고 할인점까지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역사도시로서 건축규제를 한 것이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읍성을 좀더 사실적으로 복원해 경주 관광의 또 하나의 핵으로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다.
이날은 80리를 갔다.
동경관.
낮에 모량역에서 쉬는데 영일현감 조경보, 하양현감 이귀영, 청도군수 이수가 보러 왔다.
모량역은 지금도 중앙선 역 이름으로 남아 있다. 보통 통신사 등 고위 여행자는 모량역을 점심 장소로 여겼다. 그렇게 하면 경주 읍성에 늦지 않은 시간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일반 여행자들은 지금의 건천읍인 ‘건천점’이라는 주막촌을 이용했다.
저녁에 경주에 들어가니, 주수(사또) 이해중이 안동시관(試官)이 되어 고을에 있지 않으므로 섭섭했다. 영장 홍관해가 들어와 뵈었다.
경주는 통신사 경로 중 충주나 안동과 비슷한 중요성을 가진 대읍으로 으레 2, 3일 머물다 가곤 했다. 조엄의 경우는 지대를 맡아야 할 부사가 부재중이어서 그냥 잠만 잔 것이다.
경주역과 서부시장 사이에 위치
경주는 말할 것도 없이 신라 천 년의 고도(古都)다. 국내외에서 찾아오는 여행객이 경주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고대 경주의 모습일 것이다. 조선시대 경주는 신라 시절과는 전혀 달랐다. 물론 상주나 충주처럼 유서 깊은 대읍으로서 주변 고을보다 높은 품격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옛날 경주와는 비교가 되지 못했다.
통일신라시대의 도시구조에 관해서는 여타 논문들이 발표되었고, 또 학자에 따라 의견이 갈라지고 있기도 하다. 서울민속박물관이나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모형과 같은 규모의 도시였다면, 조선시대 경주는 신라시대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것이다.
조선시대 경주 중심에는 경주 읍성이 있었다. 이는 지금 첨성대 쪽에 흔적이 남아 있는 월성과는 별도의 성으로, 월성이 언덕 위에 있는 것과 달리 평지에 있었다. 읍성의 위치는 지금의 경주역과 서부시장 사이였고, 정사각형이지만 잘 보면 위쪽(북쪽)이 약간 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읍성 둘레는 4075척이며 사방으로 문이 있었고, 성 안에 우물이 86개 있었다. 일제가 제작한 지적원도를 보면 적어도 26개소의 치(雉·방어하기 쉽도록 성벽을 밖으로 튀어나오게 한 것)가 확인되고, 성 밖에는 해자(垓字·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가 있는 등 방위 위주의 설계였음을 알 수 있다. 성문들을 기점으로 동서남북 대로가 십자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남문 밖에서 동헌 터로 옮겨진 경주 종각.
‘해동지도’를 보면 읍성 한가운데에 동헌이, 동남쪽 모퉁이에는 객사가 있었다. 동헌은 지방관 등이 상주하며 정무를 집행하던 지방행정 기관이고, 객사는 중앙 권력을 대신하는 건물이었다. 그래서 역사가 짧은 고을의 경우, 객사가 고을 중심에 있고 동헌은 그 옆에 붙어 있는 인상을 주는 곳이 많다. 지난번에 찾아간 의흥이나 신녕이 그 예다. 그러나 이곳 경주와 상주, 충주 등 고대로부터 역사를 간직해온 ‘대읍’에서는 객사는 구석에 있고 동헌이 가장 좋은 ‘명당자리’를 차지했다. 짐작컨대 고려시대 이전, 아직 중앙보다 지방 호족들의 힘이 셌던 시절 공간구조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객사인 동경관(東京館·東京은 경주의 별칭)은 일제시대에는 박물관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지금 객사 자리에는 조흥은행이 들어서 있다. 동헌 자리는 오랫동안 군청으로 사용돼오다 지금은 경주문화원이 되어 있다. ‘제승정’과 ‘진남루’는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 있고, 남문 밖에 있었던 종각은 안으로 들여왔다. 종각은 서울 보신각과 마찬가지로 문이 열리고 닫히는 시간을 알려주었다.
지금 읍성은 공동화(空洞化)로 빈터가 많고 인기척도 드물다. 17만명이 사는 이 도시의 번화가가 교외로 빠져나간 지 오래다. 교외로 나가면 새 아파트도 많고 할인점까지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역사도시로서 건축규제를 한 것이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읍성을 좀더 사실적으로 복원해 경주 관광의 또 하나의 핵으로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다.
이날은 80리를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