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부터 사흘이 지난 2010년 11월 26일, 이명박 대통령은 전사한 고(故)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의 빈소가 마련된 경기 성남 국군수도병원으로 가고 있었다. 이동 중에 이 대통령은 DMB 방송을 통해 ‘김태영 국방부 장관 후임으로 이희원 대통령 안보특보 유력’이라는 뉴스를 접했다. 조문을 마치고 청와대로 돌아온 이 대통령은 “도대체 내가 모르는 국방부 장관 인선을 누가 언론에 발설했느냐”며 참모들을 심하게 질책했다.
그 직후 이희원 안보특별보좌관에 대한 청와대 차원의 국방부 장관 예비청문회를 진행한 정진석 대통령실 정무수석비서관은 이 대통령에게 이 특보가 “국방부 장관 후보로 부적격”이라는 의견을 올렸다. 포격전 당시 청와대의 ‘확전 방지’ 메시지 논란에 연루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바로 그때 아직 이름을 밝히기 어려운 정권의 유력자가 이 대통령에게 “김관진 괜찮은 사람이다. 장관 시키지 않아도 좋으니 한번 만나 보시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언했다.
이에 이 대통령은 “내가 직접 사람을 검증하겠다”며 김관진 전 합동참모본부(합참) 의장을 “당장 청와대로 부르라”고 지시했다. 그다음 날 30분으로 예정된 면담이 이루어졌다. 막상 면담이 시작되자 김관진과 이 대통령의 대화는 3시간을 넘겼다. 이튿날 언론은 장관 후보자로 김관진 내정을 발표했다. 노무현 정부 당시 군단장, 합참의장을 역임한 과거 정부 사람이 보수 정부에 전격 발탁됐다.
#2 2013년 3월 박근혜 정부 출범에 따라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물러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딸만 셋인 그는 퇴임 직후 미국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딸의 연주회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 표까지 끊어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장관 후보로 예정됐던 김병관 예비역 대장이 갖은 구설에 휘말리며 국회에서 의원들의 호된 질타로 흔들리자, 박근혜 정부는 진퇴양난에 처했다. 결국 4월이 되자 김병관 대장은 국회에 자료로 제출하지 않은 주식거래 명세가 폭로돼 낙마했다. 그 여파로 김관진 장관의 유임이 결정된 4월 어느 날, 김 장관은 국방부 간부회의에서 “지난번에는 내가 (장관직에서) 나간다니까 뭘 지시해도 수첩에 받아 적지 않더니 이제 유임됐다니까 열심히들 적는군”이라고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국장급 간부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3 2014년 6월 서울시 간첩 증거조작 사건으로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의 입지가 크게 흔들리고, 김장수 국가안보실장 역시 북한 무인기 출몰 당시 “심각한 위협이 아니다”라는 의견을 전했다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남 원장은 간첩 증거조작이 불거질 무렵 청와대에 “국정원은 절대 조작한 적이 없다”고 청와대에 보고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면서 대통령의 신임을 잃었다.
김장수 실장이 국방부 장관으로 있던 2007년 당시 합참의장이 김관진 대장이었다. 같은 호남 출신으로 노무현 정부에서 동고동락한 김관진 합참의장에게 김장수 실장은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던 터. 그런데 이후 김관진 장관은 국가정보원이 주도하던 무인기 정국에서 김장수 실장과 달리 “북한 무인기는 심각한 위협”이라며 흐름을 자신이 주도했다. 이는 곧 김장수 퇴임, 김관진 안보실장 발탁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은 이제까지 남이 이미 차지한 자리를 대신 수행하는 방식으로 국방부 장관을 두 정권에서 역임하고 국가안보실장 자리에 올랐다. 비유컨대 한 번도 선발투수로 기용된 적 없이 중간계투로만 등판한 셈이다. 외교안보 분야에서 3대 정권에 걸쳐 장관급 직위를 역임하고 있는 이는 오직 그밖에 없다.
“나만 좋아한다는 느낌을 준다”
항상 벼랑 끝에 몰려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는가 싶은 순간에, 그는 세간의 예상을 비웃듯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리고 이제 남북 분단사에 유일한 ‘43시간 회담’의 주인공이 됐고, 군인의 길을 뛰어넘어 남북협상의 상징적 인물이 됐다. 전문가 대부분이 체념한 상태에서 기적처럼 만들어낸 8월 25일 새벽, 초췌한 표정으로 합의문을 읽어 내려가던 그를 보며 필자는 일종의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무서운 생명력의 본질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김 실장과 절친한 사이로 알려진 육군사관학교 동기 김국헌(육사 28기) 예비역 소장은 김관진 실장의 본질을 독일 육사의 전통에서 찾는다. 1968년 생도 1학년 6중대에서 김 소장과 같은 방을 쓰던 김관진 실장은 2학년 때 독일 육사로 유학을 떠났다. 그 당시 독일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지 20년이 조금 넘는 군대였다. 200년 역사의 독일 총참모부는 히틀러가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기 이전까지는 독일식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은 군사 분야 천재들이 모인 ‘클라우제비츠의 후예들’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무엇이 우리를 패배하게 만들었는가’에 한층 집착했고, 그 때문에 승전한 군대보다 더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작전술을 개발하는 데 앞서 나갔다.
독일 군대는 새로운 작전술을 끊임없이 개발해가며 선배가 후배에게 과거 실패의 교훈을 열심히 가르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한국군 장교단의 독일 유학파들 역시 이러한 특징을 공유한다. 미국 유학 경력을 과시하기 좋아하는 엘리트 주류 장교들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성이다. 김관진 실장 역시 독일에서 돌아온 후 보병학교에서 전술교관을 역임하는 동안 끊임없이 연구하고 후배들과 줄기차게 토론함으로써 한국군의 새로운 가능성을 일깨운 당사자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육사 30기 사이에서는 “김관진 선배는 미래 육군의 희망”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회자됐다.
후배에게 무엇을 깨우치게 한다는 그의 자세는 엄격한 권위가 아니라 인간적 살가움으로 표출되곤 했다. 김관진 실장의 현역 시절 같이 근무했던 장교들은 “알려진 바와 달리 그는 굉장히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입을 모은다. 김종업(육사 36기) 예비역 대령은 “부하들에게 ‘나만 좋아한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라며 “사람의 심리를 읽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말한다. 그게 이명박 정부에서 장관으로 발탁된 배경이라는 것이다. 야단치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의 한계를 들춰내는 토론은 “얻어맞는 느낌이 아니라 가장 민감한 부위를 긁어내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고 한다. 이런 ‘포용의 심리학’이 이번 남북협상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런 견해에는 김국헌 예비역 소장도 적극 동의한다. 회담에 나선 북한 대표 김양건, 황병서는 모두 군사(軍事)에 문외한들이다. 황병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이 현재 군인 신분이긴 하지만, 총정치국은 군사를 다루는 곳이 아니라 군에 대한 권력의 통제를 담당하는 기관이다. 우리로 치면 국군기무사령부와 유사하다. 이는 지뢰도발과 관련해 김관진 실장이 매우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게 만들어준 일종의 행운이라 할 수 있다.
북한 대표들은 대포병레이더 아서-K가 뭔지, 열상감시장비(TOD)가 뭔지 알아듣지 못했다. 김관진 실장이 구사하는 전문용어나 포탄 궤적, 남북한 지뢰 특성 같은 개념을 따라잡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무기로 “우리는 증거를 다 갖고 있다”는 김 실장 앞에서 북측 비전문가들이 당해낼 도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아마도 이때 반박할 논리를 찾지 못한 그들이 느낀 게 바로 ‘가장 민감한 곳이 긁히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승자도 패자도 아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번 협상에서 북한의 결정적인 실책 가운데 하나는 군사에 정통한 엘리트 군인을 협상 대표로 투입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김관진 실장이 “나는 한때 전군을 지휘했던 사람”이라고 압박하자 그같은 경험이 없는 북한 대표들은 다분히 위축됐을 공산이 크다. 이것이야말로 지뢰 사건에 대한 북한의 유감 표명으로 이어진 협상 비결 중 하나였을 테고, 막상 지뢰 문제가 풀리자 나머지 5개 조항에 대한 합의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김관진은 이겼고 황병서와 김양건은 졌다’는 식으로 단언하기는 곤란하다. 이기는 건 확실하게 이기면서도 상대방이 아픔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는 게 김관진 실장의 진가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패장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은 전쟁 논리에서는 합리적일 수 있어도 외교에서는 아니다. 전쟁은 이기느냐 지느냐를 결정하는 전략(戰略)의 영역이지만, 외교는 줄 것은 주면서 챙길 것은 챙기는 정략(政略)의 영역이다. 승자와 패자 대신 누가 상대적으로 유리해지느냐의 문제만 남는다.
김관진 실장은 전략이 아니라 정략에 치중했다. 확성기 방송을 포기하겠다고 양보했을 때, 아마 그 자신도 이것이 군인의 선택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내부의 반발을 극복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어떻든 협상 상대를 배려해야 했다. 이것이 평생 군인이었으면서도 군인의 특성을 버려야 하는 김 실장의 숙명이었다.
슬픔을 암시하는 처연한 눈빛을 가진 김관진 실장의 얼굴은 그런 이중성을 모두 감내해야 하는 패러독스의 이미지다. 강함과 부드러움을 겸비한 표정의 뒤편에는 군사와 외교의 논리가 극렬하게 충돌하는 모순의 세계가 있다. 그런 만큼 8월 25일 새벽 합의문을 읽는 그의 모습은 승리자도 아니고 패배자도 아닌, 설명이 불가능한 그 무엇이었다.
이 기괴함은 합의문 곳곳의 모호한 표현으로도 드러난다. 명쾌하지 않은 결말, 그리고 분단 역사를 새로 써야 할 날들의 아득함을 합의문은 말하고 있다. 이 합의문은 거대한 분단의 벽에 조그만 구멍을 내어 만든 하나의 통문이다. 그 통문 밖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아직 누구도 알지 못한다. 결과를 발표하고 모처럼 숙소로 돌아온 후로도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 직후 이희원 안보특별보좌관에 대한 청와대 차원의 국방부 장관 예비청문회를 진행한 정진석 대통령실 정무수석비서관은 이 대통령에게 이 특보가 “국방부 장관 후보로 부적격”이라는 의견을 올렸다. 포격전 당시 청와대의 ‘확전 방지’ 메시지 논란에 연루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바로 그때 아직 이름을 밝히기 어려운 정권의 유력자가 이 대통령에게 “김관진 괜찮은 사람이다. 장관 시키지 않아도 좋으니 한번 만나 보시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언했다.
이에 이 대통령은 “내가 직접 사람을 검증하겠다”며 김관진 전 합동참모본부(합참) 의장을 “당장 청와대로 부르라”고 지시했다. 그다음 날 30분으로 예정된 면담이 이루어졌다. 막상 면담이 시작되자 김관진과 이 대통령의 대화는 3시간을 넘겼다. 이튿날 언론은 장관 후보자로 김관진 내정을 발표했다. 노무현 정부 당시 군단장, 합참의장을 역임한 과거 정부 사람이 보수 정부에 전격 발탁됐다.
#2 2013년 3월 박근혜 정부 출범에 따라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물러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딸만 셋인 그는 퇴임 직후 미국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딸의 연주회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 표까지 끊어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장관 후보로 예정됐던 김병관 예비역 대장이 갖은 구설에 휘말리며 국회에서 의원들의 호된 질타로 흔들리자, 박근혜 정부는 진퇴양난에 처했다. 결국 4월이 되자 김병관 대장은 국회에 자료로 제출하지 않은 주식거래 명세가 폭로돼 낙마했다. 그 여파로 김관진 장관의 유임이 결정된 4월 어느 날, 김 장관은 국방부 간부회의에서 “지난번에는 내가 (장관직에서) 나간다니까 뭘 지시해도 수첩에 받아 적지 않더니 이제 유임됐다니까 열심히들 적는군”이라고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국장급 간부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3 2014년 6월 서울시 간첩 증거조작 사건으로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의 입지가 크게 흔들리고, 김장수 국가안보실장 역시 북한 무인기 출몰 당시 “심각한 위협이 아니다”라는 의견을 전했다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남 원장은 간첩 증거조작이 불거질 무렵 청와대에 “국정원은 절대 조작한 적이 없다”고 청와대에 보고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면서 대통령의 신임을 잃었다.
김장수 실장이 국방부 장관으로 있던 2007년 당시 합참의장이 김관진 대장이었다. 같은 호남 출신으로 노무현 정부에서 동고동락한 김관진 합참의장에게 김장수 실장은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던 터. 그런데 이후 김관진 장관은 국가정보원이 주도하던 무인기 정국에서 김장수 실장과 달리 “북한 무인기는 심각한 위협”이라며 흐름을 자신이 주도했다. 이는 곧 김장수 퇴임, 김관진 안보실장 발탁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은 이제까지 남이 이미 차지한 자리를 대신 수행하는 방식으로 국방부 장관을 두 정권에서 역임하고 국가안보실장 자리에 올랐다. 비유컨대 한 번도 선발투수로 기용된 적 없이 중간계투로만 등판한 셈이다. 외교안보 분야에서 3대 정권에 걸쳐 장관급 직위를 역임하고 있는 이는 오직 그밖에 없다.
“나만 좋아한다는 느낌을 준다”
항상 벼랑 끝에 몰려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는가 싶은 순간에, 그는 세간의 예상을 비웃듯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리고 이제 남북 분단사에 유일한 ‘43시간 회담’의 주인공이 됐고, 군인의 길을 뛰어넘어 남북협상의 상징적 인물이 됐다. 전문가 대부분이 체념한 상태에서 기적처럼 만들어낸 8월 25일 새벽, 초췌한 표정으로 합의문을 읽어 내려가던 그를 보며 필자는 일종의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무서운 생명력의 본질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김 실장과 절친한 사이로 알려진 육군사관학교 동기 김국헌(육사 28기) 예비역 소장은 김관진 실장의 본질을 독일 육사의 전통에서 찾는다. 1968년 생도 1학년 6중대에서 김 소장과 같은 방을 쓰던 김관진 실장은 2학년 때 독일 육사로 유학을 떠났다. 그 당시 독일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지 20년이 조금 넘는 군대였다. 200년 역사의 독일 총참모부는 히틀러가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기 이전까지는 독일식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은 군사 분야 천재들이 모인 ‘클라우제비츠의 후예들’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무엇이 우리를 패배하게 만들었는가’에 한층 집착했고, 그 때문에 승전한 군대보다 더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작전술을 개발하는 데 앞서 나갔다.
독일 군대는 새로운 작전술을 끊임없이 개발해가며 선배가 후배에게 과거 실패의 교훈을 열심히 가르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한국군 장교단의 독일 유학파들 역시 이러한 특징을 공유한다. 미국 유학 경력을 과시하기 좋아하는 엘리트 주류 장교들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성이다. 김관진 실장 역시 독일에서 돌아온 후 보병학교에서 전술교관을 역임하는 동안 끊임없이 연구하고 후배들과 줄기차게 토론함으로써 한국군의 새로운 가능성을 일깨운 당사자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육사 30기 사이에서는 “김관진 선배는 미래 육군의 희망”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회자됐다.
후배에게 무엇을 깨우치게 한다는 그의 자세는 엄격한 권위가 아니라 인간적 살가움으로 표출되곤 했다. 김관진 실장의 현역 시절 같이 근무했던 장교들은 “알려진 바와 달리 그는 굉장히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입을 모은다. 김종업(육사 36기) 예비역 대령은 “부하들에게 ‘나만 좋아한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라며 “사람의 심리를 읽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말한다. 그게 이명박 정부에서 장관으로 발탁된 배경이라는 것이다. 야단치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의 한계를 들춰내는 토론은 “얻어맞는 느낌이 아니라 가장 민감한 부위를 긁어내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고 한다. 이런 ‘포용의 심리학’이 이번 남북협상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런 견해에는 김국헌 예비역 소장도 적극 동의한다. 회담에 나선 북한 대표 김양건, 황병서는 모두 군사(軍事)에 문외한들이다. 황병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이 현재 군인 신분이긴 하지만, 총정치국은 군사를 다루는 곳이 아니라 군에 대한 권력의 통제를 담당하는 기관이다. 우리로 치면 국군기무사령부와 유사하다. 이는 지뢰도발과 관련해 김관진 실장이 매우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게 만들어준 일종의 행운이라 할 수 있다.
북한 대표들은 대포병레이더 아서-K가 뭔지, 열상감시장비(TOD)가 뭔지 알아듣지 못했다. 김관진 실장이 구사하는 전문용어나 포탄 궤적, 남북한 지뢰 특성 같은 개념을 따라잡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무기로 “우리는 증거를 다 갖고 있다”는 김 실장 앞에서 북측 비전문가들이 당해낼 도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아마도 이때 반박할 논리를 찾지 못한 그들이 느낀 게 바로 ‘가장 민감한 곳이 긁히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승자도 패자도 아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번 협상에서 북한의 결정적인 실책 가운데 하나는 군사에 정통한 엘리트 군인을 협상 대표로 투입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김관진 실장이 “나는 한때 전군을 지휘했던 사람”이라고 압박하자 그같은 경험이 없는 북한 대표들은 다분히 위축됐을 공산이 크다. 이것이야말로 지뢰 사건에 대한 북한의 유감 표명으로 이어진 협상 비결 중 하나였을 테고, 막상 지뢰 문제가 풀리자 나머지 5개 조항에 대한 합의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김관진은 이겼고 황병서와 김양건은 졌다’는 식으로 단언하기는 곤란하다. 이기는 건 확실하게 이기면서도 상대방이 아픔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는 게 김관진 실장의 진가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패장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은 전쟁 논리에서는 합리적일 수 있어도 외교에서는 아니다. 전쟁은 이기느냐 지느냐를 결정하는 전략(戰略)의 영역이지만, 외교는 줄 것은 주면서 챙길 것은 챙기는 정략(政略)의 영역이다. 승자와 패자 대신 누가 상대적으로 유리해지느냐의 문제만 남는다.
김관진 실장은 전략이 아니라 정략에 치중했다. 확성기 방송을 포기하겠다고 양보했을 때, 아마 그 자신도 이것이 군인의 선택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내부의 반발을 극복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어떻든 협상 상대를 배려해야 했다. 이것이 평생 군인이었으면서도 군인의 특성을 버려야 하는 김 실장의 숙명이었다.
슬픔을 암시하는 처연한 눈빛을 가진 김관진 실장의 얼굴은 그런 이중성을 모두 감내해야 하는 패러독스의 이미지다. 강함과 부드러움을 겸비한 표정의 뒤편에는 군사와 외교의 논리가 극렬하게 충돌하는 모순의 세계가 있다. 그런 만큼 8월 25일 새벽 합의문을 읽는 그의 모습은 승리자도 아니고 패배자도 아닌, 설명이 불가능한 그 무엇이었다.
이 기괴함은 합의문 곳곳의 모호한 표현으로도 드러난다. 명쾌하지 않은 결말, 그리고 분단 역사를 새로 써야 할 날들의 아득함을 합의문은 말하고 있다. 이 합의문은 거대한 분단의 벽에 조그만 구멍을 내어 만든 하나의 통문이다. 그 통문 밖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아직 누구도 알지 못한다. 결과를 발표하고 모처럼 숙소로 돌아온 후로도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