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다문 입술. 8월 21일 경기 용인 제3군 야전군 사령부를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의 표정은 단호하기 이를 데 없었다. 3군 사령관과 각 군 작전사령관으로부터 북한과의 군사적 대치상황에 대한 평가를 보고받고 “추가 도발에 대해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한 치의 빈틈도 없는 대비태세를 유지하라”고 지시했다는 메시지 역시 명확했다. 북한이 남측을 향해 14.5mm 고사포와 76.2mm 평곡사포를 발사한 이튿날이었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날의 방문을 기획한 주체가 군 당국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 어디서도 대통령의 사령부 방문을 건의하지 않았다. 8월 20일 상황 직후 청와대에서 “VIP께서 현장에 가시겠다고 한다”며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것. 한마디로 대통령 본인이 직접 결정해 이뤄진 순시였다는 뜻이다.
양면게임이론으로 살펴보면
8월 20일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북측의 포격 사실이 청와대에 보고된 오후 5시쯤, 국가안보실은 사전 설정된 매뉴얼대로 NSC 소집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그간의 관례에 따라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이 회의를 주재하는 형식이었다고 안보당국자들은 전한다. “VIP께서 내려오신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회의는 급히 대통령 주재로 변경됐다. 김 실장으로부터 상황을 보고받은 박 대통령이 직접 회의를 주재하겠다며 준비를 지시했다는 뜻이다.
휴전선 비무장지대(DMZ) 남측 지역에서 목함지뢰가 폭발해 병사 두 명이 부상한 8월 4일부터 남북 고위급 접촉을 통해 최종 합의가 도출된 25일까지. 20일 남짓 한반도를 뒤덮었던 대치국면은 안보상의 위기에서 청와대가 어떤 사고방식과 우선순위에 따라 작동하는지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 생생한 사례였다. 특히 무박4일 동안 진행된 협상을 둘러싼 다양한 조각그림은 국제정치학 교과서의 분석 대상으로 삼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 공교롭게도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작동방식은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제1비서가 이끄는 평양 내부의 그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양면게임이론(Two-Level Game Theory). 로버트 퍼트넘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1980년대 후반 고안한 이 개념은 국내 정치와 외교협상의 관계를 묘파한 가장 깔끔한 이론으로 손꼽힌다. ‘이중협상이론’으로도 번역되곤 하는 이 아이디어의 핵심은 ‘모든 외교협상은 실제로는 두 방향에서 이뤄진다’는 것. 테이블에 마주앉은 상대방과의 밀고 당기기 못지않게 협상을 지켜보고 있는 자국 국민과의 보이지 않는 심리게임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여론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결과는 아무리 긍정적이어도 결국 패배로 기억되고 만다는 뜻이다.
그렇게 테이블 밖 여론에 의해 양측이 수용할 수 있는 타협안의 범위를 가리키는 말이 이름하여 윈셋(win-set), ‘승리의 틀’이다. 협상의 결론은 양측의 윈셋이 겹치는 곳에서 나오기 마련. 현대 외교협상의 가장 드라마틱한 특징은 바로 이 대목에서 나온다. 자국 여론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될수록 협상자는 그걸 무기 삼아 상대를 압박할 수 있으므로 윈셋이 좁은 쪽이 협상에서 유리할 수도 있다. 거꾸로 상대는 협상 국가의 여론에 어떻게든 영향을 미쳐 상대방 윈셋을 넓히려는 다양한 ‘플레이’를 펼친다. 그 복잡 미묘한 수 싸움이 국제정치학이 말하는 외교협상의 본질이다.
서두에서 살펴본 것처럼, 8월 20일을 기점으로 박 대통령의 행보는 확 달라졌다. 4일 북한의 지뢰도발 이후 ‘국방부 장관과는 전화통화 한 번 하지 않았고, 국가안보실장으로부터도 대면보고를 받은 적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박 대통령의 ‘은둔형 스타일’은 강한 비판에 휩싸인 바 있다. 청와대 NSC와 국가안보실, 김관진 실장이 정상적으로 제 할 일을 하고 있느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대다수 언론을 뒤덮었다.
비판은 외부로만 국한되지 않았다. 5~6월쯤 청와대가 외부 인사들에게 의뢰해 만든 국정 점검 보고서는 국가안보실의 조직체계 문제를 우려 사항 중 하나로 제기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통령이 신뢰할 만한 인사’들이 작성해 박 대통령 본인에게 직접 전달했다는 문건이 ‘현재의 체계와 인적 구성으로는 안보 위기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어렵다’는 결론으로 끝맺고 있었다는 것. 지뢰도발 이후 논란은 이 보고서의 ‘예언’이 적중한 실제 사례였던 셈이다.
안보부처 당국자들은 “그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하는 사안’이라고 결론 내린 것 같다”고 전한다. 이 시기 여론은 까칠하기 짝이 없었고, 지뢰도발에 대해 정부가 골랐던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 카드에 대해서도 불충분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앞서의 개념을 빌리자면, 초동대응 과정에서 우왕좌왕한 탓에 박 대통령에게 주어진 윈셋이 확 좁아진 셈. 이 쪼그라든 윈셋을 어떻게 요리하느냐가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분수령이 되리라는 사실이 8월 20일 시점에 명확해진 셈이다.
43시간이 필요했던 이유
순서대로 따라가보자. 이날 남과 북이 주고받은 포격전에서 정부는 우리 측이 상대보다 10배 넘는 대응사격을 가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양측 모두 상대에게 인적·물리적 피해가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지점을 겨냥해 포탄을 날렸다는 점은 부각하지 않았다. 첫 포탄이 군사분계선(MDL)을 넘은 직후 북측이 보낸 대화 제의를 “진의가 의심스러워 거부했다”고 밝힌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추후 확인된 내용이지만 이날 정부는 ‘김양건-김관진이 만나자’는 북측 제안에 ‘김관진-황병서가 만나야 한다’며 역제안을 보냈고, 결국은 홍용표 통일부 장관까지 포함하는 2+2 회담이 만들어졌다.
국민에게는 강도 높은 원칙론을 견지하는 ‘터프한’ 태도를 과시하면서도, 물밑에서는 확전 경계와 대화 진행을 이어나가는 방식. 이는 당연히 8월 10일 이후 누적된 강도 높은 비판을 의식한 것이었다. 눈여겨볼 것은 북측이 남측의 이러한 속내를 몰랐을 리 없다는 점이다. 실제로는 대화 논의를 이어가면서 겉으로는 거부했다고 발표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평양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결국 남측이 신경 쓰는 건 자신들이 아니라 국민이라는 사실, 게임의 본질은 국내 정치라는 ‘진리’에 평양 역시 장단을 맞춰줬다는 뜻이다.
서로가 서로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이러한 구도는 북측 역시 윈셋의 압박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원론적으로는 ‘여론’이 존재하지 않는 북한에서는 양면게임이론이 작동할 수 없지만, 집권 3년 차 권력의 정통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젊은 지도자에게는 이야기가 다르다. 군부에 대한 지도자의 위신, 인민들로부터의 신망은 체제안정을 위한 첫 번째 관건이다. 준전시상태 선포를 비롯한 다양한 초강경 조치로 위기 의식을 조성하면서도, 첫 포격을 날리자마자 남측에 대화를 제의한 평양의 이중적 행동은 이를 고스란히 입증한다.
달리 말하자면 이후 이어진 강 대(對) 강 대결국면은 북측이 남측의 윈셋을 넓히기 위한 시도에 가깝다. 긴장이 고조되고 공포 분위기가 조성돼 ‘결과야 어떻든 빨리 사태를 진정시켜라’는 여론이 힘을 얻기를 기대하는 것.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다면 협상장에 앉은 남측 대표는 훨씬 많은 재량권을 행사하게 되고, 북측으로서는 더 많은 양보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남측 정부 역시 여론이 허용하는 범위가 넓어지는 건 불감청고소원이다. 폐쇄회로(CC)TV를 통해 청와대에 실시간으로 중계된 이번 회담은 사실상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은 제1비서의 일대일 협상이었다. 협상이 교착에 빠졌다는 소식이 전해진 8월 23일, 주말임에도 전원 출근한 청와대 당국자들은 “대통령이 워낙 강경하다. 결과가 쉽게 나올 것 같지 않다”며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8월 24일 아침 박 대통령이 주재한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한 원칙론 역시 같은 기조였다.
이렇듯 강경하기 짝이 없던 태도는 20시간도 되지 않아 왜 바뀌었을까. 이와 관련해 정부 당국자들은 문제의 주말에 청와대 내부에서 작성한 뒤 대통령에게 건의했다는 한 편의 보고서를 지목한다. ‘대치국면이 장기화할 경우 하반기 국정운영에 치명타가 될 수 있음.’ 세월호 사고와 정윤회,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파동을 거치면서 한 번도 제대로 힘을 받은 적이 없는 대통령으로서는 그야말로 악몽의 시나리오다. 남북관계 개선을 활용해 국내 정치 문제로 인한 난국을 돌파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는 청와대 내부에서 이미 수차례 제기된 바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강경한 태도를 강조하는 것 역시 여론이 허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히는 결과를 낳는다. 협상이 길어지고 앞으로도 쉽게 타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전망이 힘을 얻을수록 지켜보는 이들의 피로감 역시 상승하고, 그만큼 결과에 대한 국내 정치적 부담은 줄어든다. 한껏 쪼그라들었던 남측의 윈셋이 서서히 커진 시간이 곧 무박4일, 43시간이었던 셈이다. 눈앞에 보이는 ‘국정운영 동력’이라는 이익과 충분히 넓어진 여론, 이 두 가지 변수를 가늠하는 것이야말로 박 대통령의 마지막 결심이었던 셈. 대통령의 정치적 감각이 절묘하게 발휘된 순간이었다.
‘상하이 코뮤니케’ 방식?
그리고 결과. 피곤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선 김관진 실장이 내놓은 합의문은 분명 청와대가 공언해왔던 바와는 거리가 있었다. ‘사과’ 대신 ‘유감’, 주체와 재발 방지라는 단어가 포함돼 있지 않은 합의문은 남과 북의 협상이라는 측면에서만 보자면 미비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협상 본질이 남북의 힘겨루기가 아니라 대통령과 국민여론의 밀고 당기기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합의문에 대한 여론조사 지지율이 60%가 넘는 현재 상황은 분명 긍정적인 결과다.
합의가 이뤄진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북한 ‘조선중앙TV’에 나와 다른 말을 하는 황병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역시 주민들을 의식하고 있음은 불문가지다. 그러한 ‘표변’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겠다고 밝힌 남측 정부의 태도는 양측이 ‘각자 국민을 상대로 내놓을 해석에는 시비를 걸지 않는다’는 합의가 어떤 형태로든 있었음을 뜻한다. 이름하여 ‘상하이 코뮤니케’ 방식.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과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가 이 문서에 서명해 데탕트의 물길을 연 이래, 상당수 외교협상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일종의 ‘암묵적 부속합의’다. 역시 자국 국민과의 협상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은 북에 대한 남의 우위도, 압도적인 군사력 과시도 아니었다. 8월 10일 이후 일주일간 청와대를 냉혹하리만큼 다그쳤던 ‘까칠한 국민’은 박 대통령을 대신해 협상장에 앉은 김관진 실장과 홍용표 장관의 윈셋을 사정없이 좁혀놓았다. 초기의 우왕좌왕이 역설적으로 협상에서의 우위를 가져다준 셈. 나흘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여론이 허용할 수 있는 타이밍과 범주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국내 정치적 이익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계산해낸 대통령의 감각은 마지막 분기점이었다. 남북 문제를 남북이라는 틀에서만 보는 동안에는 놓치기 쉬운 함정이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분명 해피엔딩이 아닐 수 없다. 당장 통일부는 후속 대화의 체계와 구성을 설계하느라 바쁘고, 군사회담부터 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나리오가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과연 이는 앞으로도 유효할 수 있을까. 예컨대 10월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일에 즈음해 북한이 또다시 장거리 로켓을 발사한다면? “내정 문제는 합의문 3항의 ‘비정상적인 사태’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북측 태도를 남측 여론은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윈셋이 무너지는 순간 합의도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는 불안한 성공을 앞에 두고, 대통령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날의 방문을 기획한 주체가 군 당국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 어디서도 대통령의 사령부 방문을 건의하지 않았다. 8월 20일 상황 직후 청와대에서 “VIP께서 현장에 가시겠다고 한다”며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것. 한마디로 대통령 본인이 직접 결정해 이뤄진 순시였다는 뜻이다.
양면게임이론으로 살펴보면
8월 20일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북측의 포격 사실이 청와대에 보고된 오후 5시쯤, 국가안보실은 사전 설정된 매뉴얼대로 NSC 소집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그간의 관례에 따라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이 회의를 주재하는 형식이었다고 안보당국자들은 전한다. “VIP께서 내려오신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회의는 급히 대통령 주재로 변경됐다. 김 실장으로부터 상황을 보고받은 박 대통령이 직접 회의를 주재하겠다며 준비를 지시했다는 뜻이다.
휴전선 비무장지대(DMZ) 남측 지역에서 목함지뢰가 폭발해 병사 두 명이 부상한 8월 4일부터 남북 고위급 접촉을 통해 최종 합의가 도출된 25일까지. 20일 남짓 한반도를 뒤덮었던 대치국면은 안보상의 위기에서 청와대가 어떤 사고방식과 우선순위에 따라 작동하는지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 생생한 사례였다. 특히 무박4일 동안 진행된 협상을 둘러싼 다양한 조각그림은 국제정치학 교과서의 분석 대상으로 삼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 공교롭게도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작동방식은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제1비서가 이끄는 평양 내부의 그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양면게임이론(Two-Level Game Theory). 로버트 퍼트넘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1980년대 후반 고안한 이 개념은 국내 정치와 외교협상의 관계를 묘파한 가장 깔끔한 이론으로 손꼽힌다. ‘이중협상이론’으로도 번역되곤 하는 이 아이디어의 핵심은 ‘모든 외교협상은 실제로는 두 방향에서 이뤄진다’는 것. 테이블에 마주앉은 상대방과의 밀고 당기기 못지않게 협상을 지켜보고 있는 자국 국민과의 보이지 않는 심리게임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여론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결과는 아무리 긍정적이어도 결국 패배로 기억되고 만다는 뜻이다.
그렇게 테이블 밖 여론에 의해 양측이 수용할 수 있는 타협안의 범위를 가리키는 말이 이름하여 윈셋(win-set), ‘승리의 틀’이다. 협상의 결론은 양측의 윈셋이 겹치는 곳에서 나오기 마련. 현대 외교협상의 가장 드라마틱한 특징은 바로 이 대목에서 나온다. 자국 여론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될수록 협상자는 그걸 무기 삼아 상대를 압박할 수 있으므로 윈셋이 좁은 쪽이 협상에서 유리할 수도 있다. 거꾸로 상대는 협상 국가의 여론에 어떻게든 영향을 미쳐 상대방 윈셋을 넓히려는 다양한 ‘플레이’를 펼친다. 그 복잡 미묘한 수 싸움이 국제정치학이 말하는 외교협상의 본질이다.
서두에서 살펴본 것처럼, 8월 20일을 기점으로 박 대통령의 행보는 확 달라졌다. 4일 북한의 지뢰도발 이후 ‘국방부 장관과는 전화통화 한 번 하지 않았고, 국가안보실장으로부터도 대면보고를 받은 적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박 대통령의 ‘은둔형 스타일’은 강한 비판에 휩싸인 바 있다. 청와대 NSC와 국가안보실, 김관진 실장이 정상적으로 제 할 일을 하고 있느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대다수 언론을 뒤덮었다.
비판은 외부로만 국한되지 않았다. 5~6월쯤 청와대가 외부 인사들에게 의뢰해 만든 국정 점검 보고서는 국가안보실의 조직체계 문제를 우려 사항 중 하나로 제기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통령이 신뢰할 만한 인사’들이 작성해 박 대통령 본인에게 직접 전달했다는 문건이 ‘현재의 체계와 인적 구성으로는 안보 위기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어렵다’는 결론으로 끝맺고 있었다는 것. 지뢰도발 이후 논란은 이 보고서의 ‘예언’이 적중한 실제 사례였던 셈이다.
안보부처 당국자들은 “그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하는 사안’이라고 결론 내린 것 같다”고 전한다. 이 시기 여론은 까칠하기 짝이 없었고, 지뢰도발에 대해 정부가 골랐던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 카드에 대해서도 불충분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앞서의 개념을 빌리자면, 초동대응 과정에서 우왕좌왕한 탓에 박 대통령에게 주어진 윈셋이 확 좁아진 셈. 이 쪼그라든 윈셋을 어떻게 요리하느냐가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분수령이 되리라는 사실이 8월 20일 시점에 명확해진 셈이다.
43시간이 필요했던 이유
순서대로 따라가보자. 이날 남과 북이 주고받은 포격전에서 정부는 우리 측이 상대보다 10배 넘는 대응사격을 가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양측 모두 상대에게 인적·물리적 피해가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지점을 겨냥해 포탄을 날렸다는 점은 부각하지 않았다. 첫 포탄이 군사분계선(MDL)을 넘은 직후 북측이 보낸 대화 제의를 “진의가 의심스러워 거부했다”고 밝힌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추후 확인된 내용이지만 이날 정부는 ‘김양건-김관진이 만나자’는 북측 제안에 ‘김관진-황병서가 만나야 한다’며 역제안을 보냈고, 결국은 홍용표 통일부 장관까지 포함하는 2+2 회담이 만들어졌다.
국민에게는 강도 높은 원칙론을 견지하는 ‘터프한’ 태도를 과시하면서도, 물밑에서는 확전 경계와 대화 진행을 이어나가는 방식. 이는 당연히 8월 10일 이후 누적된 강도 높은 비판을 의식한 것이었다. 눈여겨볼 것은 북측이 남측의 이러한 속내를 몰랐을 리 없다는 점이다. 실제로는 대화 논의를 이어가면서 겉으로는 거부했다고 발표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평양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결국 남측이 신경 쓰는 건 자신들이 아니라 국민이라는 사실, 게임의 본질은 국내 정치라는 ‘진리’에 평양 역시 장단을 맞춰줬다는 뜻이다.
서로가 서로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이러한 구도는 북측 역시 윈셋의 압박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원론적으로는 ‘여론’이 존재하지 않는 북한에서는 양면게임이론이 작동할 수 없지만, 집권 3년 차 권력의 정통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젊은 지도자에게는 이야기가 다르다. 군부에 대한 지도자의 위신, 인민들로부터의 신망은 체제안정을 위한 첫 번째 관건이다. 준전시상태 선포를 비롯한 다양한 초강경 조치로 위기 의식을 조성하면서도, 첫 포격을 날리자마자 남측에 대화를 제의한 평양의 이중적 행동은 이를 고스란히 입증한다.
달리 말하자면 이후 이어진 강 대(對) 강 대결국면은 북측이 남측의 윈셋을 넓히기 위한 시도에 가깝다. 긴장이 고조되고 공포 분위기가 조성돼 ‘결과야 어떻든 빨리 사태를 진정시켜라’는 여론이 힘을 얻기를 기대하는 것.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다면 협상장에 앉은 남측 대표는 훨씬 많은 재량권을 행사하게 되고, 북측으로서는 더 많은 양보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남측 정부 역시 여론이 허용하는 범위가 넓어지는 건 불감청고소원이다. 폐쇄회로(CC)TV를 통해 청와대에 실시간으로 중계된 이번 회담은 사실상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은 제1비서의 일대일 협상이었다. 협상이 교착에 빠졌다는 소식이 전해진 8월 23일, 주말임에도 전원 출근한 청와대 당국자들은 “대통령이 워낙 강경하다. 결과가 쉽게 나올 것 같지 않다”며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8월 24일 아침 박 대통령이 주재한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한 원칙론 역시 같은 기조였다.
이렇듯 강경하기 짝이 없던 태도는 20시간도 되지 않아 왜 바뀌었을까. 이와 관련해 정부 당국자들은 문제의 주말에 청와대 내부에서 작성한 뒤 대통령에게 건의했다는 한 편의 보고서를 지목한다. ‘대치국면이 장기화할 경우 하반기 국정운영에 치명타가 될 수 있음.’ 세월호 사고와 정윤회,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파동을 거치면서 한 번도 제대로 힘을 받은 적이 없는 대통령으로서는 그야말로 악몽의 시나리오다. 남북관계 개선을 활용해 국내 정치 문제로 인한 난국을 돌파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는 청와대 내부에서 이미 수차례 제기된 바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강경한 태도를 강조하는 것 역시 여론이 허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히는 결과를 낳는다. 협상이 길어지고 앞으로도 쉽게 타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전망이 힘을 얻을수록 지켜보는 이들의 피로감 역시 상승하고, 그만큼 결과에 대한 국내 정치적 부담은 줄어든다. 한껏 쪼그라들었던 남측의 윈셋이 서서히 커진 시간이 곧 무박4일, 43시간이었던 셈이다. 눈앞에 보이는 ‘국정운영 동력’이라는 이익과 충분히 넓어진 여론, 이 두 가지 변수를 가늠하는 것이야말로 박 대통령의 마지막 결심이었던 셈. 대통령의 정치적 감각이 절묘하게 발휘된 순간이었다.
‘상하이 코뮤니케’ 방식?
그리고 결과. 피곤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선 김관진 실장이 내놓은 합의문은 분명 청와대가 공언해왔던 바와는 거리가 있었다. ‘사과’ 대신 ‘유감’, 주체와 재발 방지라는 단어가 포함돼 있지 않은 합의문은 남과 북의 협상이라는 측면에서만 보자면 미비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협상 본질이 남북의 힘겨루기가 아니라 대통령과 국민여론의 밀고 당기기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합의문에 대한 여론조사 지지율이 60%가 넘는 현재 상황은 분명 긍정적인 결과다.
합의가 이뤄진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북한 ‘조선중앙TV’에 나와 다른 말을 하는 황병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역시 주민들을 의식하고 있음은 불문가지다. 그러한 ‘표변’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겠다고 밝힌 남측 정부의 태도는 양측이 ‘각자 국민을 상대로 내놓을 해석에는 시비를 걸지 않는다’는 합의가 어떤 형태로든 있었음을 뜻한다. 이름하여 ‘상하이 코뮤니케’ 방식.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과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가 이 문서에 서명해 데탕트의 물길을 연 이래, 상당수 외교협상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일종의 ‘암묵적 부속합의’다. 역시 자국 국민과의 협상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은 북에 대한 남의 우위도, 압도적인 군사력 과시도 아니었다. 8월 10일 이후 일주일간 청와대를 냉혹하리만큼 다그쳤던 ‘까칠한 국민’은 박 대통령을 대신해 협상장에 앉은 김관진 실장과 홍용표 장관의 윈셋을 사정없이 좁혀놓았다. 초기의 우왕좌왕이 역설적으로 협상에서의 우위를 가져다준 셈. 나흘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여론이 허용할 수 있는 타이밍과 범주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국내 정치적 이익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계산해낸 대통령의 감각은 마지막 분기점이었다. 남북 문제를 남북이라는 틀에서만 보는 동안에는 놓치기 쉬운 함정이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분명 해피엔딩이 아닐 수 없다. 당장 통일부는 후속 대화의 체계와 구성을 설계하느라 바쁘고, 군사회담부터 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나리오가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과연 이는 앞으로도 유효할 수 있을까. 예컨대 10월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일에 즈음해 북한이 또다시 장거리 로켓을 발사한다면? “내정 문제는 합의문 3항의 ‘비정상적인 사태’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북측 태도를 남측 여론은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윈셋이 무너지는 순간 합의도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는 불안한 성공을 앞에 두고, 대통령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