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은 기관장이 바뀔 때마다 낙하산 인사 반대 시위가 이어진다. 2006년 KBS노조의 정연주 사장 연임 반대 시위.
지난해 7월 서울행정법원은 눈길을 끄는 판결을 내렸다. 참여정부 임기 막바지인 2007년 11월 한국산재의료원 이사장에 임명된 심일선 전 열린우리당 중앙위원이 “노동부의 사퇴 압력을 견디지 못해 사직서를 제출했다”며 낸 이사장 지위확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한 것. 재판부는 “사직할 의사가 없었다 해도 그 뜻이 외부에 객관적으로 표시된 이상 효력을 갖는다. 사직 의사를 취소하려면 (사직서에 따른) 의원면직 처분이 이루어지기 전에 했어야 했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열받아 던진 사표라도 수리되면 끝’이라는 얘기다.
정권 바뀌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퇴
재판부는 이와 함께 주무부처의 ‘사퇴 압력’도 인정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인 2008년 4월 노동부 차관이 한국산재의료원 총무이사 이모 씨에게 전화를 걸어 심 전 이사장의 사표를 요구했고, 노동부 담당과장도 이씨에게 전화해 임원들의 일괄 사표를 요구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
결국 심 전 이사장은 지난해 5월 사직서를 내 의원면직이 됐고, 이후 2008년 10월 국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노동부에서 사퇴 압력이 들어왔고, 못 나가겠다고 버티니 특별감사와 예산삭감 조치가 취해졌다”고 주장했다.
심 전 이사장 사례에서 보듯 정권이 바뀌면 새 정부는 ‘정부와의 코드’를, 전 정권에서 임명된 공공기관 임원은 ‘임기 보장’을 주장하며 부딪친다. 노동부 사례처럼 임기가 남았지만 일괄 사표를 요구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현행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공공기관장은 3년 임기에 1년 단위로 연임할 수 있고, 비상임이사와 감사는 2년 임기에 1년 단위로 연임할 수 있다. 연임 여부는 기관장의 경우 경영실적 평가 결과를, 비상임이사와 감사는 공공기관운영위원회가 실시하는 직무수행실적 평가 결과를 근거로 결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전 정부에서 임명된 임원 상당수는 ‘험한 꼴’ 보기 전에 미리 옷을 벗거나, 사퇴를 종용하면 자리를 떴다.
그렇다면 공공기관 임원은 정권과 운명을 같이해야 할까, ‘법대로’ 임기를 보장해 정책의 일관성을 확보해야 할까. ‘정권과의 코드’를 강조하는 측에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듯, 새로 출범하는 정부의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고 조직 풍토를 일신해 조직 효율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반대 측은 “법에 임기가 보장된 만큼 법을 지켜야 하며, 조직의 일관성과 안정성을 위해서라도 정권과의 코드를 강조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맞받아친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원칙적으로 임기를 보장하는 게 맞지만, 정권의 정책을 적극 지원하거나 예산이 많은 공공기관 임원의 경우 현실을 고려해 예외일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 인사제도비서관을 지낸 연세대 김판석 교수(행정학)의 설명이다.
“상당히 복합적인 문제다. 법에 임기를 규정한 만큼 정치적 흐름과 관계없이 임기는 보장하는 게 맞다. 하지만 기술·환경 분야 같은 정치성 없는 공공기관은 관계없지만, 공영방송이나 LH(한국토지주택공사) 같은 정치적 연결성이 큰 공공기관 임원은 아무래도 부담일 수밖에 없다. 이는 현실적인 문제다.”
형식적 임원 공모에 정권에서 점찍은 사람 임명
그는 또 ‘기획인사’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적재적소(適材適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적인 원리다. 예를 들어 정부 정책에 보조를 맞추고 국민 주택 보급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LH 임원의 경우 최소 4명의 적임자를 천거해야 한다. 2명은 적임자이지만 대선 때 도움을 주지 않았고, 나머지 2명은 전문성은 조금 떨어지나 대선 때 도움을 준 인물이라는 식으로 대통령께 보고해야 한다. 최종 책임은 대통령이 지겠지만 전문성은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는 공공기관장 중 공기업 기관장은 임원추천위원회(이하 임원추천위)에서 기관장 후보자를 추천하면, 공공기관운영위원회의 심의 의결을 거쳐 주무장관이 제청하고 대통령이 임명한다. 준정부기관은 임원추천위 추천을 거쳐 주무장관이 제청해 대통령이 임명한다. 감사는 기획재정부 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대부분 정권에서 점찍어둔 인사가 ‘낙하산’을 타게 마련. 참여정부와 현 이명박 정부에서 공공기관 임원을 지낸 A씨의 말을 들으면 그 현실을 알 수 있다.
“요즘은 규정대로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과도기다. 기관장이나 감사 추천이 시작되면 임원추천위가 꾸려진다. 임원추천위에 (청와대에서) 누구를 낙점했는지 알려지는데, 일반적으로 결격사유가 없다면 낙점자를 추천하는 게 통례다. 만약 윗선에서 낙점한 후보를 빼고 추천하면, ‘적격자가 없다’며 재공고를 내고 다시 추천하라고 한다. 이런 상황을 모르는 사람은 순진하게 지원을 하지만 들러리일 뿐이다. 하지만 전문가 중심의 임원추천위 인사들도 자부심이 있어서 ‘전혀 아닌 사람’이 낙점되면 그대로 추천하지는 않는다. 조금씩 인사 시스템이 개선되고 있다고 본다.”
공공기관 직원들도 임원 공모는 여전히 형식에 불과하다고 본다. ‘공공기관 임원인사 실태 및 개선방안’(박홍엽)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2007년 4월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 시행 이후 임원 후보자에 대한 공모 실시로 낙하산 인사 시비가 줄어들 것인지를 물은 설문에서 공공기관 담당자 72명 중 23명(32.0%)이 ‘줄어들 것’이라고 답했다.
임원 공모절차와 임기보장도 문제지만 현실적으로 정부와 호흡이 맞지 않은 임원이 계속 엇박자를 내는 것도 문제다. 이어지는 A씨의 부연 설명이다.
“정부가 ‘4대강 사업’을 하는데 수자원공사 임원이 4대강 사업을 반대하면 현 정부의 정책이 제대로 추진되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임원 임기제는 양면성이 있다. 정부를 사사건건 반대하는 인사를 KBS 이사진에 넣을 수도 없지 않나.”
한성대 이종수 교수(행정학)도 주요 공공기관은 감시 기능을 강화하면 자연히 전문성 위주의 인물을 임명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임기도 보장될 것이라고 했다.
“공공조직 인사행정 제도는 선거에서 승리한 측이 모든 공직을 전리품으로 차지하는 엽관제(獵官制)에서 인사 임용 기준을 실적으로 평가하는 실적제(實績制)로 발전해왔다. 아직도 엽관주의는 지속되고 있지만, 정무직 등 직무 속성상 필요한 경우에 한정적으로 허용된다. 공직은 봉사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공공기관 임원 역시 전문성과 능력이 주요 임명 기준이 된다면 ‘임기 시비’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한 협회 수준의 공공기관은 몰라도 공기업은 정부부처에 해당하는 엄격한 감시체계를 만들면 ‘정치적 식객’이 자리 나눠먹기 식으로 임명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정권 말기에 보은 차원에서 대거 공공기관 임원을 임명하고 정권이 바뀌면 물갈이하는 방식을 되풀이해선 공공기관 선진화는 요원하다. 현 정부부터라도 임기를 보장해주고 다음 정부도 받아들이는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