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쿠바 수도 아바나의 혁명광장은 외국인 관광객들과 그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쿠바인들로 북적거렸다. 광장 어디에도 독재자 카스트로의 얼굴이나 동상은 없었다.
꼭 일주일 전, 평양을 일곱 번째 방문했을 때 북측 안내원은 늘 그랬듯 일행을 만수대 위 김일성 주석 동상 앞으로 안내했다. 일행이 경건하게 머리를 숙이길 원하는 북측과 이를 거부하는 남측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사회주의 쿠바를 49년 동안 철권통치한 카스트로가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카스트로에게 아직 보고 배울 점이 많다. 최고지도자를 우상처럼 숭배하지 않게 한 점은 그중 한 가지에 불과하다.
북한과 쿠바는 1990년 소련 등 소비에트 블록 국가들이 붕괴하자 똑같이 경제위기에 처했다. 카스트로는 과감한 개혁개방을 통해 역설적으로 사회주의를 지켜냈지만 김 위원장은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하다 수십, 수백만 명이 굶어 죽는 아사(餓死)를 초래했다. 무엇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을까.
소비에트 블록 붕괴에 따라 90년 이후 북한과 쿠바 두 나라의 연간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를 나타내기 시작했다(그래프 참조). 카스트로는 경제위기 상황임을 솔직히 시인했고, 이러한 위기를 ‘특별한 시기’로 명명했다. 91년엔 대소(對蘇) 경제의존 실태를 인민들에게 상세히 발표하고 함께 대응책을 마련했다.
최고지도자 ‘고백’ 후 개혁개방 vs 경제위기 ‘쉬쉬’
최고지도자의 ‘고백’ 덕분에 쿠바는 권력 엘리트와 인민대중의 동의하에 개혁과 개방을 단행할 수 있었다. 쿠바는 91년부터 외국인 관광과 투자를 대폭 확대했다. 93년과 94년에는 시장의 재도입과 자영업 허용, 내국인 달러 보유 허용 등 개혁조치를 취했다. 쿠바 경제는 94년부터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8년 현재도 전 국민에게 배급제를 실시하고 무상교육과 의료복지 혜택을 주는 등 북한보다 비교적 많은 사회주의적 가치를 유지하고 있다.
북한은 쿠바와 다른 길을 갔다. 실권자인 김 위원장은 경제가 위기이며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권력 엘리트는 물론 인민대중에게 알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92년까지 미국 일본 한국 등과의 관계 개선 및 제1차 핵 위기를 통해 경제난을 해소하려 했다.
이에 실패한 북한 지도부가 경제위기를 간접적으로 시인한 것은 93년 12월이었다. 북한도 91년부터 나진선봉경제특구 도입과 무역자유화 등 부분적인 개방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쿠바와 같은 시장지향적 개혁조치를 단행하지는 못했다. 90년대 후반 북한 사회주의 경제는 물적 기반 자체가 붕괴됐다. 북한은 더욱 심화된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2002년 이후 경제개혁을 했지만 큰 성과를 보지 못했다.
북한이 왜 90년대 초반 쿠바처럼 과감한 개혁을 하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안보 딜레마’ 가설이 가장 일반적이다. 쿠바와 달리 북한은 남한과 대치하고 있어 개혁에 따른 체제붕괴의 불안감이 더 컸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지에서 만난 쿠바 아바나대학 경제학부 호안 트리아나 교수는 이를 일축했다. 그는 “북한은 같은 민족인 남한과 대치했지만 쿠바는 다른 민족이자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의 침략 위협을 건국 이래 계속 받아왔다”는 것이다.
특권 없이 국민과 호흡 북한이 본받아야 할 점
경제적인 초기 조건에도 차이가 있었다. 쿠바는 59년 혁명 이전에 60여 년 동안 독립국가로서 자본주의를 경험했다. 또 70년부터 85년까지 소련식 부문 개혁을 단행해 과감한 시장화 분권화 개혁을 경험했다. 이에 비해 북한은 45년 광복 때까지 일제 식민지 상태에서 제한적인 자본주의를 경험했다. 84년 이후 제한적인 개혁개방을 시도했지만 쿠바의 경험에 비하면 일천했다. 한편 쿠바는 외국인 관광객과 투자를 유치하기 좋은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고 있었다. 북한은 자연환경도 불리했다.
그러나 국가가 경제위기에 개혁정책으로 대응하는 과정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현상이다. 경제위기에 빠진 국가의 개혁정책 도입 및 실행 시기(timing), 정책 내용(contents)과 범위(scope) 등은 자본주의 정치경제 학자들의 오랜 연구 대상이다. 정치적 측면에서 쿠바 지식인들에게 질문을 던져 얻은 답을 종합하면, 쿠바와 북한의 가장 큰 차이는 정치적 소통과 권력에 따른 불평등의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카스트로는 혁명 후 대중연설과 집회 등을 통해 최고지도자-권력 엘리트-인민대중의 활발한 정치적 의사소통을 통치에 활용해왔다. 90년대 경제위기를 시인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70년에도 설탕 1000만t 달성 실패를 시인하면서 사임 의사를 밝힌 적이 있다. 이번에도 그는 “사회주의를 포기할 수 있다”며 인민에게 개혁 아이디어를 요구했다.
반면 북한 김 위원장은 폐쇄적인 ‘측근정치’에 의존했다. 최고지도자는 국가 중대사를 인민에게 알리지 않았고 인민은 현장의 목소리를 ‘수령’에게 전할 수 없었다. 한편 김 위원장은 70년대 초반부터 당과 군의 권력 엘리트들을 위한 특권적인 ‘수령경제’를 운영해왔다. 경제위기가 왔지만 최고지도자와 권력 엘리트들은 체제 위협을 무릅쓰고 개혁을 해야 할 정도로 배가 고프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쿠바 경제지 ‘옵시오네스’ 기자 마르타 벨로스는 “카스트로는 위기 이전 국민경제와 별도로 어떤 특권 경제도 운영한 적이 없다”며 “위기가 오자 카스트로 이하 모든 인민이 함께 생활고에 빠졌고 이를 극복하는 개혁에도 동참했다”고 증언했다. 코트라 조영수 아바나무역관장은 “쿠바도 어쩔 수 없는 사회주의 국가이고 카스트로는 독재자라는 점에서 북한이나 김 위원장과 유사하지만, 원활한 소통과 상대적인 평등은 북한이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말했다.
꼭 일주일 전, 평양을 일곱 번째 방문했을 때 북측 안내원은 늘 그랬듯 일행을 만수대 위 김일성 주석 동상 앞으로 안내했다. 일행이 경건하게 머리를 숙이길 원하는 북측과 이를 거부하는 남측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사회주의 쿠바를 49년 동안 철권통치한 카스트로가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카스트로에게 아직 보고 배울 점이 많다. 최고지도자를 우상처럼 숭배하지 않게 한 점은 그중 한 가지에 불과하다.
북한과 쿠바는 1990년 소련 등 소비에트 블록 국가들이 붕괴하자 똑같이 경제위기에 처했다. 카스트로는 과감한 개혁개방을 통해 역설적으로 사회주의를 지켜냈지만 김 위원장은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하다 수십, 수백만 명이 굶어 죽는 아사(餓死)를 초래했다. 무엇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을까.
소비에트 블록 붕괴에 따라 90년 이후 북한과 쿠바 두 나라의 연간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를 나타내기 시작했다(그래프 참조). 카스트로는 경제위기 상황임을 솔직히 시인했고, 이러한 위기를 ‘특별한 시기’로 명명했다. 91년엔 대소(對蘇) 경제의존 실태를 인민들에게 상세히 발표하고 함께 대응책을 마련했다.
최고지도자 ‘고백’ 후 개혁개방 vs 경제위기 ‘쉬쉬’
최고지도자의 ‘고백’ 덕분에 쿠바는 권력 엘리트와 인민대중의 동의하에 개혁과 개방을 단행할 수 있었다. 쿠바는 91년부터 외국인 관광과 투자를 대폭 확대했다. 93년과 94년에는 시장의 재도입과 자영업 허용, 내국인 달러 보유 허용 등 개혁조치를 취했다. 쿠바 경제는 94년부터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8년 현재도 전 국민에게 배급제를 실시하고 무상교육과 의료복지 혜택을 주는 등 북한보다 비교적 많은 사회주의적 가치를 유지하고 있다.
북한은 쿠바와 다른 길을 갔다. 실권자인 김 위원장은 경제가 위기이며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권력 엘리트는 물론 인민대중에게 알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92년까지 미국 일본 한국 등과의 관계 개선 및 제1차 핵 위기를 통해 경제난을 해소하려 했다.
이에 실패한 북한 지도부가 경제위기를 간접적으로 시인한 것은 93년 12월이었다. 북한도 91년부터 나진선봉경제특구 도입과 무역자유화 등 부분적인 개방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쿠바와 같은 시장지향적 개혁조치를 단행하지는 못했다. 90년대 후반 북한 사회주의 경제는 물적 기반 자체가 붕괴됐다. 북한은 더욱 심화된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2002년 이후 경제개혁을 했지만 큰 성과를 보지 못했다.
북한이 왜 90년대 초반 쿠바처럼 과감한 개혁을 하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안보 딜레마’ 가설이 가장 일반적이다. 쿠바와 달리 북한은 남한과 대치하고 있어 개혁에 따른 체제붕괴의 불안감이 더 컸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지에서 만난 쿠바 아바나대학 경제학부 호안 트리아나 교수는 이를 일축했다. 그는 “북한은 같은 민족인 남한과 대치했지만 쿠바는 다른 민족이자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의 침략 위협을 건국 이래 계속 받아왔다”는 것이다.
특권 없이 국민과 호흡 북한이 본받아야 할 점
경제적인 초기 조건에도 차이가 있었다. 쿠바는 59년 혁명 이전에 60여 년 동안 독립국가로서 자본주의를 경험했다. 또 70년부터 85년까지 소련식 부문 개혁을 단행해 과감한 시장화 분권화 개혁을 경험했다. 이에 비해 북한은 45년 광복 때까지 일제 식민지 상태에서 제한적인 자본주의를 경험했다. 84년 이후 제한적인 개혁개방을 시도했지만 쿠바의 경험에 비하면 일천했다. 한편 쿠바는 외국인 관광객과 투자를 유치하기 좋은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고 있었다. 북한은 자연환경도 불리했다.
그러나 국가가 경제위기에 개혁정책으로 대응하는 과정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현상이다. 경제위기에 빠진 국가의 개혁정책 도입 및 실행 시기(timing), 정책 내용(contents)과 범위(scope) 등은 자본주의 정치경제 학자들의 오랜 연구 대상이다. 정치적 측면에서 쿠바 지식인들에게 질문을 던져 얻은 답을 종합하면, 쿠바와 북한의 가장 큰 차이는 정치적 소통과 권력에 따른 불평등의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카스트로는 혁명 후 대중연설과 집회 등을 통해 최고지도자-권력 엘리트-인민대중의 활발한 정치적 의사소통을 통치에 활용해왔다. 90년대 경제위기를 시인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70년에도 설탕 1000만t 달성 실패를 시인하면서 사임 의사를 밝힌 적이 있다. 이번에도 그는 “사회주의를 포기할 수 있다”며 인민에게 개혁 아이디어를 요구했다.
반면 북한 김 위원장은 폐쇄적인 ‘측근정치’에 의존했다. 최고지도자는 국가 중대사를 인민에게 알리지 않았고 인민은 현장의 목소리를 ‘수령’에게 전할 수 없었다. 한편 김 위원장은 70년대 초반부터 당과 군의 권력 엘리트들을 위한 특권적인 ‘수령경제’를 운영해왔다. 경제위기가 왔지만 최고지도자와 권력 엘리트들은 체제 위협을 무릅쓰고 개혁을 해야 할 정도로 배가 고프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쿠바 경제지 ‘옵시오네스’ 기자 마르타 벨로스는 “카스트로는 위기 이전 국민경제와 별도로 어떤 특권 경제도 운영한 적이 없다”며 “위기가 오자 카스트로 이하 모든 인민이 함께 생활고에 빠졌고 이를 극복하는 개혁에도 동참했다”고 증언했다. 코트라 조영수 아바나무역관장은 “쿠바도 어쩔 수 없는 사회주의 국가이고 카스트로는 독재자라는 점에서 북한이나 김 위원장과 유사하지만, 원활한 소통과 상대적인 평등은 북한이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