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쉬거는 우스꽝스런 헤어스타일에 산소통을 들고 살인을 거듭하는 사이코 살인마다.
텍사스 사막에서 사냥을 하던 모스(조시 브롤린 분)는 우연히 참혹한 학살의 현장을 보게 된다. 마약을 거래하다 벌어진 죽음의 현장에서 그는 운 좋게도 200만 달러의 돈가방을 발견한다. 돈을 챙겨 집에 오지만 유일한 생존자가 물을 달라던 기억이 늘 찜찜하게 남아 있는 모스. 물통을 들고 현장을 찾지만 사내는 이미 죽고 모스는 괴한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런데 산소통을 총 삼아 피도 눈물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 분)가 마약조직의 의뢰를 받아 모스를 추적하면서 그의 길고도 끈질긴 도피 행각은 시작된다. 그리고 이 길에 쉬거의 뒤를 쫓는 보안관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 분)의 발자국이 더해진다.
아무리 봐도 200만 달러에 눈이 완전히 돌아버린 모스가 왜 뒤늦게 물통을 들고 현장에 갔을까? 묻지 마시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코엔 형제의 연출작이고, 이 형제의 영화 세상에선 개연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장르는 무규칙 이종격투기처럼 변칙적이고, 서부극과 날선 스릴러와 하드보일드 누아르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한다. 마치 폭력의 피카소(이 별명은 애초 샘 페킨파의 것이다. 그리고 코엔 형제는 자신들의 영화가 샘 페킨파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털어놨다)께서 깔끔하게 구획한 추상파 헤모글로빈 무비 같다고나 할까.
텍사스의 한 철물점에 들어간 쉬거는 철물점 주인에게 어디서 왔냐는 질문을 받는다. 이런 따위의 질문을 던진 자는 사이코 살인마 쉬거의 세상에서 죽어 마땅하다. 그는 주인에게 동전 던지기 질문을 던진다. 앞이냐 뒤냐. 그러자 주인은 무엇을 건 것인지 알아야 내기를 하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마치 러시안 룰렛게임 같은 죽음의 무작위성 앞에 벌벌 떠는 우리 자신처럼 말이다.
누가 죽을지 누가 살아남을지 알 수 없는 이 영화에서 어쩌면 쉬거는 유일하게 독립적이고 자신을 통제하며, 사람들에게 죽음과 삶의 운명을 부여할 수 있는 자다. 그러나 그런 그마저 우스꽝스러운 헤어스타일에 유령처럼 흰 얼굴로 산소통을 가지고 알 수 없는 미소를 띠며 사람들을 무차별로 죽인다. 사람을 살리는 산소통이 사람을 죽이는 도구로, 마치 거대한 남근처럼 보이는 에어 건으로 살인의 사정을 계속 해대는 이 장면은 참혹하지만 대단히 웃기는 구석이 있다. 그는 동전처럼 세상을 흘러다니는 운명에 대한 믿음이 있는데, 성찰이 없는 믿음은 그저 자기도착적인 틀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른 채 살인을 계속해 나간다.
동정도 연민도 없는 비정한 침묵만이 지배
4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양손에 들고 기뻐하는 코엔 형제.
모스가 마약 딜러로 보이는 괴한들에게 쫓겨 강물에 뛰어들다 맹견을 사살하는 단순한 장면부터, 피를 흘리며 멕시코 국경을 건너는 절박한 순간, 이후 모텔 방문을 사이에 두고 방 안에 숨어 있는 쉬거와 문 밖에서 그의 흔적을 관찰하는 보안관 벨의 모습이 자물쇠 구멍 사이로 비칠 때, 이미 코엔 형제는 완급과 가속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거장이라는 사실을 유감없이 증명한다.
사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코엔 형제의 인장이 찍혀 있다. 우스꽝스러운 거구의 냉혹한 살인마(바톤 핑크의 존 굿맨처럼)나, 모자를 잃고 위기에 빠진 주인공이나(밀러스 크로싱의 가브리엘 번처럼), 방문 앞에서 킬러와 주인공의 날선 긴장의 혈투는 모두 코엔 형제의 트레이드마크다. 여기에 서부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코맥 매카시의 원작도 긴장감 있는 이야기 전개나 로저 디킨스의 무미건조한 아름다움이 배어나는 텍사스 촬영에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인간 운명에 대한 고찰 … ‘오스카’도 반한 작품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이 영화의 일등 공신 중 한 사람은 이번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차지한 쉬거 역의 하비에르 바르뎀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달기 힘들 것 같다. 스페인 출신 배우로 초창기엔 ‘하몽하몽’이나 ‘보카보카’에서 스페인판 변강쇠 같은 이미지였던 이 중견 배우는 나름의 규칙으로 세상을 처단해가는 사이코 킬러 역을 멋들어지게 소화하고 있다.
각설하고, 드디어 아카데미도 이 천재적인 형제 감독의 손을 들어줬다. 수상 소감을 말하는 코엔 형제를 보니 세월이 새삼스럽다. ‘파고’ ‘바톤 핑크’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등 걸작들이 즐비한 이 형제의 필모그래피에서 오스카 작품상 수상은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벨은 아내에게 지난밤 ‘아버지가 돈을 준 것 같았는데 그걸 다 잃어버리는 꿈을 꿨다’고 말한다. 벨의 꿈은 모스의 행적과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이어지는 화면을 채우는 똑딱거리는 시계소리. 그러잖아도 살인자를 놓치고 자괴감으로 삼촌을 찾는 벨은 삼촌에게서 “세월은 막을 수 없다. 널 기다려주지도 않고, 다 부질없다”는 말을 듣지 않았는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차가운 블랙홀처럼 인간의 운명에 대한 고상한 예측과 마지막 남은 희망을 모두 흡수해버린다. 이처럼 무상하고 무기력하며, 우스꽝스럽고 긴장된 영화가 또 있을까? 오스카가 반한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오! 형제는 용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