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오르세미술관전’.
이 그림들을 서울이나 부산에서 볼 수 있다면 경제적이고 행복한 일이다. 여행경비를 들이지 않고도 국내에서 대가들의 명화를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예술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시각적인 감흥도 얻는 일석이조의 문화체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파리나 뉴욕, 암스테르담에 가야 볼 수 있는 인상파 작품이 서울로 대거 몰려오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국공립 대형 전시장에서 열리는 블록버스터 해외 전시의 대다수가 인상파전이거나 인상파 작가를 앞세운 기획전이어서 때 아닌 ‘인상파 붐’이 일고 있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은 지난해 12월부터 올 3월 하순까지 ‘반 고흐에서 피카소까지’전을 열어 30만여 명의 관람객을 모았다. 이 전시회는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이 소장한 인상파 작품 등 94점을 선보였는데, 열화와 같은 반응에 힘입어 4월7일부터 5월20일까지 올림픽공원 내 소마미술관에서 앙코르 전시되고 있다.
또한 한가람미술관은 4월21일부터 9월2일까지 무려 4개월 넘게 ‘오르세미술관 특별전’을 연다. 역사(驛舍)를 개조한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미술관은 19세기 인상파 미술품 컬렉션으로 유명한데 이번 전시회에서는 고흐, 고갱, 마네 등의 거장들 그림과 함께 바르비종파인 밀레의 유명한 ‘만종’이 전시된다. 한가람미술관은 ‘인상파 전용 전시장’이라 불려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지난해에도 6월부터 9월까지 ‘빛을 그린 화가들-인상파 거장전’을 열어 큰 인기를 얻었다.
한편 서울시립미술관은 6월6일부터 ‘빛의 화가 모네전’을 연다. 인상파의 선구자로 불리는 모네의 대표작 ‘수련’ 연작 20여 점을 포함해 70여 점의 유화를 선보인다고 한다. 이어 11월에는 ‘반 고흐 회고전’을 열 계획이다. 걸작 ‘붓꽃’을 비롯한 유화와 드로잉 80여 점을 들여온다.
국내에서 인상파 그림 붐은 1970년대 후반 조선일보 주최로 열린 ‘프랑스 인상파전’ ‘19세기 후기 인상파전’ 등이 점화했다. 당시 덕수궁미술관에는 관람객들이 장사진을 칠 만큼 인상파 그림은 한국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이후 주기가 뜸하던 인상파전은 2000년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오르세미술관전-인상파와 근대미술’이 열리면서 다시 불붙었다. 당시 50만여 명이 전시를 관람했다.
물론 올해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미국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 팩토리전’이 열리고 있고,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전’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려 애호가들의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몇 안 되는 공공전시장이 서양미술, 그것도 19세기 인상파에 치중한 블록버스터전으로 쏠리는 데다 인상파 명화를 프린트한 가방, 스카프까지 인기상품으로 떠오르면서 ‘인상파 과소비가 아니냐’는 논란까지 일고 있다.
미술은 서양에만 있는 장르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양미술 중에서도 인상파 작품만 편중해 소비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전시뿐 아니라 문화상품, 책 등도 그쪽에 쏠려 있다. 서아시아, 동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에도 미술의 전통이 뿌리 깊은데 왜 우리는 서양미술에만 경도된 것일까? 서양미술에도 고전주의, 상징주의, 표현주의가 있고 추상에서 발화된 현대미술은 설치와 사진을 거쳐 영상으로 진화하고 있는데, 우리는 언제까지 인상파에만 매달릴 것인지 답답한 일이다. 우리의 미의식이나 정서가 19세기에 머물러 있는 것은 분명 아닌데 이 같은 쏠림 현상이 이는 것은 뭔가 특수한 원인이 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한국만의 인상파 붐은 2000년 블록버스터 해외미술전이 기획되면서 과열되기 시작했다. 블록버스터란 할리우드 대작을 일컫는 용어로 막대한 제작비와 스타를 내세워 세계시장을 공략하는 상술을 일컫는다. 국내에서는 먼저 영화산업에 불었던 블록버스터 상술이 뮤지컬로 이동했다가 미술 전시로 옮겨붙으면서 서양미술전 수입이 연중행사로 정착되는 양상이다.
삼성미술관 리움이 현대 팝아트를 소개하는 ‘앤디 워홀 팩토리전’.
그러나 지금 같은 블록버스터 전시는 구조적인 문제나 부작용을 파생시키고 있다. 앞서 말했듯 서양 명화들을 자국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인상파 걸작들은 현대인들의 각박한 삶에 정서적 여유와 감흥을 안겨준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창의력을 길러준다는 긍정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인상파로만 쏠리는 블록버스터 해외전 러시는 경계할 여지가 많다. 우선 이 같은 대형 기획전이 국공립미술관 자체 기획이 아닌 대관으로 열린다는 점이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연 ‘루브르박물관’전도 자체 기획이 아니다. 국립미술관급끼리 교환이나 대여전을 할 경우 대여료를 받지 않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그러나 작품 이동에 따르는 보험료는 부담해야 하는데, 중앙박물관은 보험료 부담 능력이 없어 비중 있는 해외전을 유치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하나는 민간 기획사들이 주관하다 보니 비용이 많이 들고 결국 그 부담은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민간 차원에서 블록버스터 명화전을 유치하려면 보험료 외에 여러 명목의 비용, 사실상의 대여료를 내야 한다. 자체 홍보만으로는 흑자를 내기 어려워 매스컴과 손잡는 경우가 많다. 전시장 대관료까지 내는 민간 기획자들은 수지를 맞추려고 관람객들의 구미에 맞는 기획을 하게 되고, 입장료를 높게 매길 수밖에 없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전시가 집중되는 현상은 물론 어린 자녀를 둔 주부들을 타깃으로 잡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식에 따라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인상파나 적어도 한두 명이라도 인상파 작가를 내세운 해외전을 유치해 성인 기준 1만~1만3000원에 이르는 가격을 매긴다. 여기에 부대 수입으로 수익성을 높이다 보면 장삿속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세금으로 건립되고 운영되는 국공립미술관들이 시민을 위한 공익 및 공공 서비스를 뒤로 미루고 임대료 수입을 챙기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이나 영국처럼 국가가 국공립미술관의 해외전 대여에 따르는 보험료를 지불 보증하는 국가보험보장제도를 마련하면 입장료를 지금의 반으로 내릴 수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그런데 우리의 국공립미술관들은 자체 기획 능력이 없는 데다 공공의 공간을 장기간 대관까지 해줌으로써 소비자(국민)에게 이중으로 부담을 안기는 꼴이다. 이는 결코 정상 운영이 아니다.
한국인들이 인상파전에만 몰리는 경향을 무조건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빛과 색채의 향연’으로 불리는 인상파 그림은 예부터 교과서 등에 실려 한국인들의 눈에 익다. 또한 원화가 주는 감동은 복사한 그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고흐나 모네, 르누아르의 그림은 언제 보아도 감흥을 일으키는 만큼 관람객이 몰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영양가 높은 음식이라도 계속 먹으면 질리게 마련이다. 더욱이 현대처럼 장르간 융합이 폭발하는 시대에는 다양성이 중요하다. 고전 못지않게 현대예술에 대한 이해와 감상 폭도 넓혀가야 한다.
문제는 불행하게도 우리가 그 같은 예술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학을 나와도 고흐나 피카소에서 벗어나면 현재 세계적 화제를 모으는 유명 현대작가들의 이름조차 모르는 실정이다. 호주의 고등학교 미술교과서는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는 세계미술의 역사와 사조를 설명하면서 작가별 작품을 실어 실제에 응용케 하고 있다. 안젤름 키퍼, 제스퍼 존스, 바스키아, 사이 톰블리, 신디 셔먼 등 현대작가들이 망라돼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의 현대작가뿐만 아니라 한국작가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교육체계가 열악하다. 그러니 눈에 익은 인상파에만 쏠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문제는 이런 대중의 취향을 상술로 이용해 늘 똑같은 메뉴를 짜는 기획자와 미술관 책임자들의 의식이다. 최근 한국 미술시장의 열기가 뜨겁다고는 하나 이러한 근본적 문제를 개선하지 않고는 시장의 파이를 키우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