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대 임상수의 영화는 내게 늘 뜨거운 감자였다. 개방적이고 당당한 여자들이 저녁식사 자리에서 성을 안주 삼는데 그 속에 나 같은 여자는 없는 것 같고, 엔카를 부르는 박정희 대통령 때문에 정신이 멍해지다가도 지식인이라면 응당 저렇게 쿨해야지 하는 당위에 이끌리게 된다. 임상수, 그가 누구인가. ‘바람난 가족’에서처럼 옥상에서 아이를 휙 던지며 ‘눈 감지 마, 피하지 마’라고 한 대 후려치는 ‘끝까지 가보는 감독, 성깔 좀 있는 감독’ 아니던가.
그런 그가 황석영의 소설 ‘오래된 정원’을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의아했다. 소설 ‘오래된 정원’은 글이 바위였다. 오래 감옥살이한 작가의 물화된 경험 위에 단단한 묘사가 물을 주어, 인생을 건네주고 사회적 고통을 돌려받은 386세대의 애달픈 비가, 그러나 감상도 후회도 없이 걷고 말하고 옷을 입은 것 같은 80년대가 거기 있었다. 그 촘촘한 리얼리즘의 그물을 뚫고 임상수가 무엇을 건져올릴지 궁금했다. 기대가 됐다.
17년 감옥살이 동안 어머니는 복부인으로 변신
보고 나니 ‘오래된 정원’은 역시 황석영보다는 임상수의 영화였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임상수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감독의 자의식은 분명히 전해지는데, 정작 이야기의 알맹이가 전달되지 않는 영화였다. 이제는 늙수그레한 중년들이 술자리에 삼삼오오 모여 ‘사노라면’을 목메도록 부르고, 온몸에 불을 붙이고 노동권을 사수하는 386들의 몸부림이 또 다른 화염병인데도 말이다. 오히려 영화를 보면 볼수록 ‘이건 임상수 영화다. 주인공 한윤희(염정아 분)도 임상수의 여자고, 인권변호사가 된 영작(윤희석 분)은 ‘바람난 가족’의 변호사 영작인 임상수 영화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2000년대가 1980년대를 바라보는 방식에 관한 것이며, 386 운동권 판타지로 회귀하는 2000년대이기도 했다. 따뜻한 이야기이자, 임 감독 말대로 러브 스토리인데 감정의 누수가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임상수의 냉소가 모성과 사랑, 그리움 같은 당의정에 싸여 눅눅해졌는데도 그 진심을 믿어야 할지 말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남자는 감옥살이한 지 17년 만에 세상에 나와, 복부인이 된 어머니에게서 아르마니 양복을 건네받는다. 휴대전화라는 물건을 처음 접하고, 벽 없이 모든 것이 트인 세상이 낯설기만 하다. 운동권이던 그는 지난 17년 동안 자신의 아이를 낳아 기르는 한 여자를 잊지 못하고 지내왔다. 지갑 속 낡은 증명사진으로만 존재해온 여자. 그러나 여자는 암으로 죽었고, 남자는 여자와 처음 만났던 산골, 갈뫼에 다시 스며든다. 17년 전 그날처럼. 그날의 공기가 현재의 추억과 뒤섞인다.
남자가 혼자 ‘도바리(도망)’ 생활을 하다 동료들이 걱정된다며 떠나던 날, 고무신 신고 첨벙 빗속에 서 있던 여자는 “숨겨줘, 재워줘, 먹여줘, 몸 줘. 근데 왜 가니?”라며 울 듯 말 듯 속을 삼킨다. 이 말 참 맞다. ‘몸매 죽여, 씩씩해, 잘 벌어, 애 낳아줘. 근데 어떻게 떠나니?’
주인공과 직접적 연관 없는 역사적 사건들은 왜 등장?
우리는 이 시점에서 원작의 한윤희가 강건하고 소박하며 다소 순종적이고 여린 여자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즉, 황석영의 한윤희가 4·19세대의 판타지였다면, 임상수의 판타지는 임상수로 대변되는 386세대의 남성 판타지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치기 힘들다. 즉, 분신하고, 옥상에서 떨어지고, 문화원을 점거하고, 바리케이드 뒤에서 화염병을 던져도 잠은 운동권이 아닌 여자랑 자고 싶은 바로 그 판타지. 비운동권 여자로서 한윤희는 헌신적이면서도 자기주장이 강한 여성, 1980년대와 2000년대가 혼재하는 여성이다. 그 어느 세계에도 없는 여성 말이다.
윤희는 현우(지진희 분)가 감옥에 간 뒤, 그의 후배인 영작이 데모의 선봉에 나서는 걸 막기 위해 그와 몸을 섞는다. 모성 안에서 도망이란 면죄부를 얻는 그것 역시 운동권 판타지의 일부가 아닌지. 그래서 세트머리를 한 후리후리한 팔등신 미인 염정아는 매우 멋있지만 그녀의 시선으로 재단한 80년대는 운동화 신고 학교 다녔던 또 다른 386 여자아이들에게는 어쩐지 계속 겉도는 느낌을 지울 길 없다. 현우도 영작도 노조운동을 하는 운동권 여학생과는 영원히 친구일 수밖에 없는 설정에서 느껴지는 씁쓸한 뒷맛 같은 것 말이다.
그 겉도는 감정은, 임상수가 80년대가 애초에 배태했던 감상성과 관객의 사이를 끊임없이 벌리려 들면서 더 큰 이물감으로 비화한다. 임상수는 순결했던 386세대의 영혼은 타락했다는 것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일깨운다. 감옥에서 수의 한 벌로 지냈던 남자가 유기농 식사를 하고 아르마니 슈트를 입는다. 그의 어머니는 복부인이 됐다. 뜨거운 가슴으로 주변 사람들을 감화했던 후배는 인권변호사가 돼 시시한 바람이나 피운다. 운동권들의 사상 논쟁을 입만 클로즈업하는 화술은, 현 운동권이 ‘입만 살아 있는 것들’이라는 임상수식 직설의 냉소나 다름없다. 거기에 386세대의 회고담이 맞물려 영화는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임 감독은 현우와 윤희의 관계에 직접적 연관이 없는 80년대의 역사적 사건들에까지 시선을 보내는 것일까? 5·18 광주민주화운동, 건국대 점거사건, 노동운동 중의 분신. 자세히 보면 이 장면에는 현우나 윤희, 영작 누구도 참여하고 있지 않다. 주인공들이 역사의 격랑 한복판에 있었던 ‘그때 그 사람들’과 사뭇 다르다. 일례로 감독은 광주에서 아버지 영정을 들고 있는 소년의 눈망울을 화면에서 복원해낸다. 영정 속 꼬마 조천호 씨의 그 눈망울이 하나의 시대적 아이콘이자 사멸해가는 80년대 이미지라면, 임상수는 애써 그것을 하나의 객관화된 현실로 현실 속의 한 지점으로 되돌이키려 하는 것이다.
어느 한쪽 편을 들거나, 마음이 끌리는 개인이 들어가 있는 게 아니라 임상수의 또 다른 시대를 발화하고자 하는 개인적 욕망. 그 쿨하고 건조한 거리가 시대를 바라보는 적절한 자세나 태도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그러나 실제로 그 밑바닥에는 아직 청산되지 못한 거대담론을 선점하려는 어떤 태도, 한국 역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란 부동산을 남들이 건드리기 전에 차지하려는 욕망 같은 게 보인다는 것이다.
영화가 남겨준 의문 하나 … 안 슬픈데 왜 울려고 하지?
나는 임상수 영화를 보면서 항상 드는 의문이 있었다. 임 감독이 주류 사회에 보내는 태도가 냉소적인 것은 이해하겠는데, 왜 화면 속 주인공들에게조차 애정이 없는 것 같을 때가 있을까. 혹은 ‘오래된 정원’을 보면서 드는 더 단순한 생각 하나. 안 슬픈데 왜 울려고 하지? 임 감독은 우리 안에 앙금처럼 가라앉은 욕망을 헤집으며 도발적인 주제를 도발적으로 다룰 때 가장 멋지다. 그러니 부디 오래오래 ‘바람난 감독’으로 남기를. 오래된 386의 뜨락에서 안 나오는 눈물 짜내지 말고.
그런 그가 황석영의 소설 ‘오래된 정원’을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의아했다. 소설 ‘오래된 정원’은 글이 바위였다. 오래 감옥살이한 작가의 물화된 경험 위에 단단한 묘사가 물을 주어, 인생을 건네주고 사회적 고통을 돌려받은 386세대의 애달픈 비가, 그러나 감상도 후회도 없이 걷고 말하고 옷을 입은 것 같은 80년대가 거기 있었다. 그 촘촘한 리얼리즘의 그물을 뚫고 임상수가 무엇을 건져올릴지 궁금했다. 기대가 됐다.
17년 감옥살이 동안 어머니는 복부인으로 변신
보고 나니 ‘오래된 정원’은 역시 황석영보다는 임상수의 영화였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임상수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감독의 자의식은 분명히 전해지는데, 정작 이야기의 알맹이가 전달되지 않는 영화였다. 이제는 늙수그레한 중년들이 술자리에 삼삼오오 모여 ‘사노라면’을 목메도록 부르고, 온몸에 불을 붙이고 노동권을 사수하는 386들의 몸부림이 또 다른 화염병인데도 말이다. 오히려 영화를 보면 볼수록 ‘이건 임상수 영화다. 주인공 한윤희(염정아 분)도 임상수의 여자고, 인권변호사가 된 영작(윤희석 분)은 ‘바람난 가족’의 변호사 영작인 임상수 영화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2000년대가 1980년대를 바라보는 방식에 관한 것이며, 386 운동권 판타지로 회귀하는 2000년대이기도 했다. 따뜻한 이야기이자, 임 감독 말대로 러브 스토리인데 감정의 누수가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임상수의 냉소가 모성과 사랑, 그리움 같은 당의정에 싸여 눅눅해졌는데도 그 진심을 믿어야 할지 말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남자는 감옥살이한 지 17년 만에 세상에 나와, 복부인이 된 어머니에게서 아르마니 양복을 건네받는다. 휴대전화라는 물건을 처음 접하고, 벽 없이 모든 것이 트인 세상이 낯설기만 하다. 운동권이던 그는 지난 17년 동안 자신의 아이를 낳아 기르는 한 여자를 잊지 못하고 지내왔다. 지갑 속 낡은 증명사진으로만 존재해온 여자. 그러나 여자는 암으로 죽었고, 남자는 여자와 처음 만났던 산골, 갈뫼에 다시 스며든다. 17년 전 그날처럼. 그날의 공기가 현재의 추억과 뒤섞인다.
남자가 혼자 ‘도바리(도망)’ 생활을 하다 동료들이 걱정된다며 떠나던 날, 고무신 신고 첨벙 빗속에 서 있던 여자는 “숨겨줘, 재워줘, 먹여줘, 몸 줘. 근데 왜 가니?”라며 울 듯 말 듯 속을 삼킨다. 이 말 참 맞다. ‘몸매 죽여, 씩씩해, 잘 벌어, 애 낳아줘. 근데 어떻게 떠나니?’
주인공과 직접적 연관 없는 역사적 사건들은 왜 등장?
‘오래된 정원’
윤희는 현우(지진희 분)가 감옥에 간 뒤, 그의 후배인 영작이 데모의 선봉에 나서는 걸 막기 위해 그와 몸을 섞는다. 모성 안에서 도망이란 면죄부를 얻는 그것 역시 운동권 판타지의 일부가 아닌지. 그래서 세트머리를 한 후리후리한 팔등신 미인 염정아는 매우 멋있지만 그녀의 시선으로 재단한 80년대는 운동화 신고 학교 다녔던 또 다른 386 여자아이들에게는 어쩐지 계속 겉도는 느낌을 지울 길 없다. 현우도 영작도 노조운동을 하는 운동권 여학생과는 영원히 친구일 수밖에 없는 설정에서 느껴지는 씁쓸한 뒷맛 같은 것 말이다.
그 겉도는 감정은, 임상수가 80년대가 애초에 배태했던 감상성과 관객의 사이를 끊임없이 벌리려 들면서 더 큰 이물감으로 비화한다. 임상수는 순결했던 386세대의 영혼은 타락했다는 것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일깨운다. 감옥에서 수의 한 벌로 지냈던 남자가 유기농 식사를 하고 아르마니 슈트를 입는다. 그의 어머니는 복부인이 됐다. 뜨거운 가슴으로 주변 사람들을 감화했던 후배는 인권변호사가 돼 시시한 바람이나 피운다. 운동권들의 사상 논쟁을 입만 클로즈업하는 화술은, 현 운동권이 ‘입만 살아 있는 것들’이라는 임상수식 직설의 냉소나 다름없다. 거기에 386세대의 회고담이 맞물려 영화는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임 감독은 현우와 윤희의 관계에 직접적 연관이 없는 80년대의 역사적 사건들에까지 시선을 보내는 것일까? 5·18 광주민주화운동, 건국대 점거사건, 노동운동 중의 분신. 자세히 보면 이 장면에는 현우나 윤희, 영작 누구도 참여하고 있지 않다. 주인공들이 역사의 격랑 한복판에 있었던 ‘그때 그 사람들’과 사뭇 다르다. 일례로 감독은 광주에서 아버지 영정을 들고 있는 소년의 눈망울을 화면에서 복원해낸다. 영정 속 꼬마 조천호 씨의 그 눈망울이 하나의 시대적 아이콘이자 사멸해가는 80년대 이미지라면, 임상수는 애써 그것을 하나의 객관화된 현실로 현실 속의 한 지점으로 되돌이키려 하는 것이다.
어느 한쪽 편을 들거나, 마음이 끌리는 개인이 들어가 있는 게 아니라 임상수의 또 다른 시대를 발화하고자 하는 개인적 욕망. 그 쿨하고 건조한 거리가 시대를 바라보는 적절한 자세나 태도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그러나 실제로 그 밑바닥에는 아직 청산되지 못한 거대담론을 선점하려는 어떤 태도, 한국 역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란 부동산을 남들이 건드리기 전에 차지하려는 욕망 같은 게 보인다는 것이다.
영화가 남겨준 의문 하나 … 안 슬픈데 왜 울려고 하지?
나는 임상수 영화를 보면서 항상 드는 의문이 있었다. 임 감독이 주류 사회에 보내는 태도가 냉소적인 것은 이해하겠는데, 왜 화면 속 주인공들에게조차 애정이 없는 것 같을 때가 있을까. 혹은 ‘오래된 정원’을 보면서 드는 더 단순한 생각 하나. 안 슬픈데 왜 울려고 하지? 임 감독은 우리 안에 앙금처럼 가라앉은 욕망을 헤집으며 도발적인 주제를 도발적으로 다룰 때 가장 멋지다. 그러니 부디 오래오래 ‘바람난 감독’으로 남기를. 오래된 386의 뜨락에서 안 나오는 눈물 짜내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