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석굴암으로 불리는 군위삼존석굴.
이날 팔공산 회동에 참석한 이들은 당대에 쟁쟁한 문사 14명이었다. 이재현(李齋賢)의 손자 이보림(李寶林), 이색(李穡)의 아들 이종학(李種學),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두문동 72현으로 꼽히는 김자수(金自粹), 김약시(金若時), 이행(李行), 안성(安省), 도응(都膺), 조희직(曺希直), 홍노(洪魯), 윤상필(尹祥弼), 홍진유(洪進裕), 고병원(高炳元)이 그들이다. 이들은 이날 태조 왕건의 필적을 보면서 한 편의 연시를 남겼다. 그런데 아쉽게 연시는 7명의 글만 남아 있고, 정몽주를 포함한 7명의 시는 전해오지 않는다.
정몽주와 문학적으로 깊은 인연 맺어
홍씨 문중에서 이 글을 소중하게 여기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의 선조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부림 홍씨인 홍노(1366~ 92)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홍노는 조선이 개국한 날이자, 고려가 망하던 날인 1392년 음력 7월17일에 불귀의 객이 됐다. 이날에 맞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아니다.
삼존석굴이 있는 암벽을 향해 서 있는 홍노의 비석.
홍노가 운명한 이후로, 부림 홍씨 집안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17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마치 스러진 고려를 기리는 것처럼. 그리고 홍노가 살던 마을은 그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팔공산 북쪽 제2 석굴암이라고 불리는 군위삼존석굴이 있는 마을, 경북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와 남산리가 바로 그 동네다.
군위삼존석굴은 경주 석굴암보다 100년 정도 앞서 조성되었는데, 불교가 융성했던 시절에는 이 근처에 8만9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억불정책을 폈던 조선시대에는 초막 하나 정도로 줄어들었고, 대신에 양산서원이 이 일대를 차지해서 마을 이름도 지금까지 ‘서원’이 되었다.
대율리에서 가장 오래된 집인 남천 고택(왼쪽). 대율리의 운치 있는 돌담길.
홍노는 포은 정몽주의 문인이었다. 7세에 효경(孝敬)에 통했고, 22세에 생원이 되었으며, 25세인 1390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포은의 추천으로 한림원에 들어갔고, 이듬해 문하사인(門下舍人·종4품)이 되어 짧은 시간에 상당히 높은 관직에 올랐다. 하지만 1392년에 이르러 국운이 기울자,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사직하고 곧바로 낙향해버렸다.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가 포은 선생은 뵙고 왔냐고 묻자 그는 “그분의 마음을 제가 아는데 구태여 만나본들 무엇 하겠습니까. 만났으면 반드시 못 가게 붙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올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집집마다 성벽처럼 두꺼운 돌담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홍노는 “이제 사람도 없고, 나라도 망했다”며 더욱 체념에 잠겼고 그 때문에 병도 깊어졌다. 홍노와 동년배로 조선 왕조에서 좌의정까지 지냈던 허조(許稠)는 그를 평하기를 “나와 같이 벼슬한 많은 사람들 중에서 홍노처럼 도량이 크고 온후한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홍노는 벼슬살이 기간이 짧았고, 27세에 요절하는 바람에 그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불사이군의 충신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두문동 72현에 꼽히지 않았다. 1932년 전남 장성에 고려 충신각 경현사(景賢祠)을 세울 때 충신 130명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비로소 포함되었다. 부림 홍씨 종친회장인 홍연수(洪淵守) 씨는 “충신이라는 것이 자로 잴 수 있겠습니까, 저울로 달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로 선조의 충절이 누구에게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했다.
홍노의 집안과 홍노가 살던 동네에는 보물이 많다. 태조 왕건의 친필도 지니고 있고, 국보 제109호 군위삼존석굴, 보물 제988호 석불입상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값진 보물이 있다. 바로 홍노가 살고, 그의 후손이 대대로 지켜온 한밤마을, 홍노가 이름 붙였다는 대율리(大栗里)다. 집집마다 돌담을 쌓았는데, 돌담이 마치 성벽처럼 두껍다. 제주의 성읍마을이나 아산 외암리의 전통마을보다 더 굳건하고 짱짱한 돌담들이다.
마을 안에는 1632년에 건립된 늘씬한 대청이 있는데, 이는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청 옆에는 두 그루의 잣나무가 심어진 남천고택 쌍백당(雙柏堂)이 있다. 홍노의 위패를 모신 부림 홍씨 종택도 있다. 마을 동구 솔숲에는 홍노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한 홍천뢰(洪天賚) 장군의 비석이 있다. 또 마을 솟대인 진동단에서는 동제를 지내고, 산신당에서는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국가의 운명과 함께한 홍노의 맑은 삶이 있고, 그 삶을 기리는 후손들이 있기에 지킬 수 있었던 소중한 자산들이다. 그런데 불안한 소식이 들린다. 팔공산에 터널을 뚫어 대율리 마을로 큰길을 내기로 했단다. 예산만 확보되면 터널을 뚫겠다는데, 큰길이 나면 대율리의 평화도 깨지고, 돌담도 흩어질 테니 걱정이다. 대율리가 개발 바람에 휩쓸리더라도 부디 홍노의 혼이 머문 전통마을의 자존심은 굳게 지킬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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