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주도의 금융지주사 최고경영자(CEO)로 내정된 윤병철 하나은행 회장(63)은 어느 누구보다 금융시장을 잘 아는 인물로 알려졌다. 그의 경영철학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하나은행장 시절 경기 지역의 한 지점 개소식 행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통상 은행 개소식 행사에는 은행장의 인사말이 끝난 뒤 해당 지점장이 마이크 앞에 서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이날은 지점장이 먼저 인사말을 하고 가장 마지막으로 윤병철 당시 하나은행장이 간략하게 치사를 함으로써 행사를 매듭지었다. 어찌보면 사소한 일이었지만 당시 행사 참석자에겐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윤회장은 이유를 궁금해하는 참석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그 지역에서 영업을 하는 사람은 은행장이 아니라 지점장이다. 지점장이 그 지역에서는 은행장보다 우선인 것은 당연하다.”
은행 직원들은 이를 윤회장의 시장친화적인 경영방침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억하고 있다.
윤회장은 37년 경남 거제 출신으로 하청고와 부산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60년 농업은행에 입행함으로써 금융계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나 윤회장은 금융권 이외의 분야에서 뜻하지 않은 외도를 해야만 했다. 63∼67년까지 전국경제인연합회 조사과장을 지냈고 64∼77년까지는 국제신보사 논설위원을 맡기도 했다. 주변에서는 이같은 외도가 윤회장의 그릇을 크게 만들어주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실제 윤회장은 국내 최초의 민간 후원단체로 국립발레단 후원회를 만들고 메세나협회장을 맡는 등 문화분야에도 남다른 의욕을 드러냈다. 또 신문사 논설위원을 지낸 탓인지 그가 펴낸 책을 읽어보면 수준 높은 문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진가가 드러난 것은 역시 금융기관 경영 분야에서였다. 운 좋게도 그는 금융환경의 변혁기 때마다 중책을 맡았고 그때마다 ‘독일병정’(한때 윤회장의 별명)처럼 뚝심있게 일을 밀어붙여 보란 듯이 성과를 내곤 했다. 그는 지난 66년 장기신용은행의 전신인 한국개발금융 설립의 산파역을 맡으면서 전환사채 인수 등 새로운 금융기법을 배웠다. 윤회장은 80년 장기신용은행으로 전환된 이후 제2인자까지 올랐지만 82년 느닷없이 자회사인 한국투자금융 상무로 사실상 ‘좌천’당하면서 첫 시련을 맞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한국투자금융을 업계 수위로 올려놓는 뚝심을 발휘했다.
금융인으로서 그에게 닥친 두번째 도전은 지난 91년 당시 사장을 맡고 있던 한국투자금융의 은행전환이었다. 당시 하나은행 초대행장으로 취임한 그는 95년 4월 국내 금융기관으로는 최단기간인 영업 3년 9개월 만에 수신액 10조원을 돌파하는 금자탑을 세웠다. 이후 그는 97년 하나은행장 3회 연임을 마다한 채 당시 김승유 전무에게 행장 자리를 물려주고 용퇴해 화제를 낳기도 했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윤병철식 경영’의 특징은 자유분방한 기업문화를 강조하면서도 일에서만큼은 프로가 되도록 만들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3년간의 공백기를 거쳐 정부 주도 금융지주회사의 선장으로 세번째 도전을 맞게 된 윤회장. 요즘 그가 품고 있는 생각은 뭘까.
“조용히 물러나 쉬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중책을 맡았습니다. 좀더 새로운 금융환경을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금융시장이 엉망이 되면서 국민들이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애꿎은 혈세를 부어가면서도 아직 금융시장은 제자리를 찾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에게 진 빚을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일각에서는 그가 중책을 맡기에는 다소 구시대적인 인물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또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에 정부와 적지 않은 마찰을 빚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간단하다.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금융분야라면 빼놓지 않고 공부해왔기 때문에 큰 그림을 그리는 데는 오히려 나을 것으로 봅니다. 정부와 잘 협의해서 해나가겠지만 원칙은 시장논리에 맞게 경영한다는 것입니다. 정부도 여기에 관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은행장 시절 경기 지역의 한 지점 개소식 행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통상 은행 개소식 행사에는 은행장의 인사말이 끝난 뒤 해당 지점장이 마이크 앞에 서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이날은 지점장이 먼저 인사말을 하고 가장 마지막으로 윤병철 당시 하나은행장이 간략하게 치사를 함으로써 행사를 매듭지었다. 어찌보면 사소한 일이었지만 당시 행사 참석자에겐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윤회장은 이유를 궁금해하는 참석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그 지역에서 영업을 하는 사람은 은행장이 아니라 지점장이다. 지점장이 그 지역에서는 은행장보다 우선인 것은 당연하다.”
은행 직원들은 이를 윤회장의 시장친화적인 경영방침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억하고 있다.
윤회장은 37년 경남 거제 출신으로 하청고와 부산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60년 농업은행에 입행함으로써 금융계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나 윤회장은 금융권 이외의 분야에서 뜻하지 않은 외도를 해야만 했다. 63∼67년까지 전국경제인연합회 조사과장을 지냈고 64∼77년까지는 국제신보사 논설위원을 맡기도 했다. 주변에서는 이같은 외도가 윤회장의 그릇을 크게 만들어주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실제 윤회장은 국내 최초의 민간 후원단체로 국립발레단 후원회를 만들고 메세나협회장을 맡는 등 문화분야에도 남다른 의욕을 드러냈다. 또 신문사 논설위원을 지낸 탓인지 그가 펴낸 책을 읽어보면 수준 높은 문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진가가 드러난 것은 역시 금융기관 경영 분야에서였다. 운 좋게도 그는 금융환경의 변혁기 때마다 중책을 맡았고 그때마다 ‘독일병정’(한때 윤회장의 별명)처럼 뚝심있게 일을 밀어붙여 보란 듯이 성과를 내곤 했다. 그는 지난 66년 장기신용은행의 전신인 한국개발금융 설립의 산파역을 맡으면서 전환사채 인수 등 새로운 금융기법을 배웠다. 윤회장은 80년 장기신용은행으로 전환된 이후 제2인자까지 올랐지만 82년 느닷없이 자회사인 한국투자금융 상무로 사실상 ‘좌천’당하면서 첫 시련을 맞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한국투자금융을 업계 수위로 올려놓는 뚝심을 발휘했다.
금융인으로서 그에게 닥친 두번째 도전은 지난 91년 당시 사장을 맡고 있던 한국투자금융의 은행전환이었다. 당시 하나은행 초대행장으로 취임한 그는 95년 4월 국내 금융기관으로는 최단기간인 영업 3년 9개월 만에 수신액 10조원을 돌파하는 금자탑을 세웠다. 이후 그는 97년 하나은행장 3회 연임을 마다한 채 당시 김승유 전무에게 행장 자리를 물려주고 용퇴해 화제를 낳기도 했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윤병철식 경영’의 특징은 자유분방한 기업문화를 강조하면서도 일에서만큼은 프로가 되도록 만들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3년간의 공백기를 거쳐 정부 주도 금융지주회사의 선장으로 세번째 도전을 맞게 된 윤회장. 요즘 그가 품고 있는 생각은 뭘까.
“조용히 물러나 쉬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중책을 맡았습니다. 좀더 새로운 금융환경을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금융시장이 엉망이 되면서 국민들이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애꿎은 혈세를 부어가면서도 아직 금융시장은 제자리를 찾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에게 진 빚을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일각에서는 그가 중책을 맡기에는 다소 구시대적인 인물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또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에 정부와 적지 않은 마찰을 빚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간단하다.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금융분야라면 빼놓지 않고 공부해왔기 때문에 큰 그림을 그리는 데는 오히려 나을 것으로 봅니다. 정부와 잘 협의해서 해나가겠지만 원칙은 시장논리에 맞게 경영한다는 것입니다. 정부도 여기에 관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